35.일본학 연구 (책소개)/2.일본문화

목화꽃과 그 일본인 : 외교관 와까마스의 한국 26년

동방박사님 2022. 6. 22.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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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일본을 우리는 대개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표현한다. 세계 어디에서 한국과 일본만큼 역사, 지리, 경제, 문화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나라가 또 있을까? 긴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일본과 끊임없이 교류하고 충돌해왔다. 하지만 일본이 한반도를 강압으로 병탄한 일이야말로 우리와 일본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간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일본에서는 정치인, 군인, 민간인 등 많은 사람이 각자 목적을 가지고 한반도로 건너왔다. 《목화꽃과 그 일본인》의 주인공 와카마쓰 도사부로도 그중 한 사람이다. 와카마쓰는 일본 정부 외교관으로 한반도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인생의 절정기를 외교관으로, 사업가로 26년 동안 한반도에서 보냈다. 우리가 한반도에서 살다 간 많은 일본인 가운데 특히 와카마쓰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화학섬유가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가 입고 덮은 옷과 이불 등에 쓰인 목화를 한반도에 들여와 널리 재배할 수 있게 하고, 천일염전을 도입해 누구나 큰 부담 없이 소금을 먹을 수 있게 한 사람이 바로 와카마쓰이다.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된 지 70년이 되었지만 일제 그림자는 아직도 우리에게 짙게 드리워져 있다. 우리는 일본, 일본인이라면 먼저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데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고 현재를 충실하게 살며 밝은 미래를 희망하려면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재평가하는 일 또한 가치 있고 뜻깊은 노력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통으로 알려진 저자 김충식과 도쿄 다이도분카대학 안몽필 명예교수의 노력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착한’ 일본인 와카마쓰의 삶과 행적은 우리가 한일관계사를 큰 틀에서 겹눈으로 바라보는 데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목차

들어가는 글
추천사

1장 시골뜨기 소년의 푸른 꿈
고향 모리무라와 소년 시절
규슈 오이타 시골의 수재들

2장 독실한 크리스천의 영성으로
도시샤대학교에서 양심과 자유, 인류애를 배우다
독실한 기독교도 니지마 조와 인연을 맺다
도시샤대학교의 스승과 인재들

3장 학문과 배움의 궤적
꿈에 그리던 도쿄대학교에 들어가다
대학 시절의 인연들
재학 중 외무고시에 합격하다

4장 국제무대에 서는 설레는 꿈
외교관으로서 첫걸음을 내딛다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본공사의 원죄
자유와 다양성의 신천지, 뉴욕에 서다
중국 항저우와 사스의 영사 시절

5장 목포에 미국종 육지면을 심다
다시 밟은 목포에서 발견한 ‘대박’
육지면 시험재배지 고하도
육지면 시험재배 성공, 도쿄를 움직이다
목포 고하도와 충무공 이순신 유적
재배협회가 설립되어 대량보급으로
재배지 확장에 나서다
한일 공동으로 육지면 재배를 장려하다
이토 히로부미와 독립운동가 안창호의 대화
권업모범장과 시험재배지
육지면 보급과 면 산업의 발달
새롭게 부각되는 면화의 가치

6장 천일염 꿈을 이루다
끓여 만든 재래식 ‘자염’과 수입 소금
천일염 시험염전을 만들다
한국 최초의 천일염 시험장
정부 주도로 천일제염을 시작하다
천일염을 수출하다

7장 외교관 인생에 닥친 위기
개항기 목포 부둣가의 노동시장
국제 문제로 번진 목포 노무분쟁

8장 통감부·총독부 관료 시절
‘목포외교관’에서 내무행정관으로
원산에서 보낸 내무행정 관료 시절
가슴 졸이며 보낸 평양이사관 시절
숨죽이고 소일하던 부산부윤 시절

9장 인천 ‘쌀?콩거래소’ 사장으로
총독부의 인천 근무 요청을 받다
인천 ‘쌀?콩거래소’의 뿌리
‘쌀?콩거래소’ 재건에 성공하다
주식회사 인천 ‘쌀?콩거래소’의 부침
서울주식시장과 인천거래소 합병 문제

10장 모교 도시샤대학교에 ‘재능 기부’
한반도를 떠나 교토로 돌아오다
도시샤대학교 교우회장으로 활동하다

11장 재일 한국인의 인권 옹호와 교회 설립
교토에서 한국인을 위해 힘쓰다
교토에 한국인 교회당을 세운 어빈 선교사

12장 가족과 함께 만년을 보내다
교토에서 유유자적한 퇴역인사
가장 아꼈던 큰딸 아쓰요
셋째 딸 미도리와 ‘화가 남편’ 오카모토 신소
넷째 딸 모미지와 의사 가족
와카마쓰 집안을 이끈 남자들
세 딸과 아내의 죽음
 
 
저자 소개
저 : 김충식
 
가천대학교 교수(언론영상광고학과)로 일본 게이오대학(慶應大學)에서 법학박사학위(미디어 저널리즘 전공)를 받았다. 1977년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30년간 뛰었으며, 주로 정치부에서 국회, 정당, 청와대, 외무부를 출입했다. 현장기자로서 금단의 성역이었던 중앙정보부, 즉 KCIA(Korea Central Intelligence Agency)를 심층 해부한 《남산의 부장들》을 펴내 큰 반향을 ...

 

저자 : 김충식
가천대학교 교수(언론영상광고학과)로 일본 게이오대학(慶應大學)에서 법학박사학위(미디어 저널리즘 전공)를 받았다. 1977년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30년간 뛰었으며, 주로 정치부에서 국회, 정당, 청와대, 외무부를 출입했다. 현장기자로서 금단의 성역이었던 중앙정보부, 즉 KCIA(Korea Central Intelligence Agency)를 심층 해부한 《남산의 부장들》을 펴내 큰 반향을 ...
 

책 속으로

나는 와카마쓰의 일생도 소개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비록 심정적으로는 ‘불편한’ 총독부의 일제 관료였지만, 일본 해군의 레거시(legacy, 유산)가 된 이순신 영전에 엎드려 기도하는 일본 장교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목화재배와 천일염전 개발이라는 적산敵産의 레거시를 남기고 한반도를 떠난 와카마쓰도 있는 그대로 전할 필요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 p.8

와카마쓰는 어릴 적부터 동네 사람들이 알아주는 총명한 아이였다. 한자를 어린 나이에 익혔고, 여섯 살 때 막 창설된 모리소학교에 최연소로 입학해 나이가 많은 아이들과 어울려 공부했다. 모리소학교에는 두 학급이 있었는데, 1반에는 다섯 살 위인 둘째 형 도요조가 있었고 와카마쓰는 2반에 속했다. 소학교를 마쳤을 때 아홉 살이었으나 시골 중에서도 완전히 시골인 모리무라에는 진학할 공립학교가 없었다.
--- p.30

당시 도시샤정법학교 설립 여부를 두고 찬반이 엇갈려 학내가 시끄러웠는데, 와카마쓰는 이에 반대하면서 “그런 학교를 굳이 세우려면 도쿄에 설립하라”고 반발한 주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이 일로 와카마쓰는 학교 당국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그러니 예비학교 교사로 채용하겠다는 제안은 그야말로 뜻밖이었다. 와카마쓰는 고민 끝에 고사키 교장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 p.54

시데하라와 와카마쓰는 성격도 인생관도 달랐다. 와카마쓰는 번뜩이는 처세와는 거리가 멀었고, 외무성의 ‘내부 정치’도 모르는 고지식한 스타일이라서 외교관으로서는 영사에 그쳤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 속에서 외교관의 직무를 내려놓고 통감부와 조선총독부의 지방관리인 이사관과 부윤으로 전직하여 평생 중요한 시기 대부분을 한반도에서 보내게 된다.
--- p.66

일본으로 돌아온 와카마쓰는 외무성에서 통상국 과장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통상국에 오래 다니지 못하고 다시 해외근무를 지망했다. 이 무렵 ‘양심적’인 와카마쓰는 다나카가 어린 시절 이래 오랫동안 지원해준 학비를 다달이 조금씩 갚아나가고 있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큰형 마사타로가 실직해서 별다른 수입이 없었기 때문에 와카마쓰 한 사람 수입으로 대가족이 생활해야 하는 곤궁한 형편이었다. 그래서 국내에서 근무하는 외무성 직원의 급여로는 가족을 부양하기 어려웠다. 해외특근 수당이라도 받아야 했기에 와카마쓰는 외국 근무를 희망했다. 그 결과 외무성 안에서 인맥이 엷어져 출세에는 마이너스가 되었다.
--- p.89

목포에서 보고한 내용이 도쿄에 전달되자 농상무성을 비롯한 관계 관청과 방적업계는 물론 정계 유력자들도 환영 일색이었다. 전라남도 지방은 고려 말기 이래 재래종 목화의 주산지였다. 이곳에서 난 목화는 일본종과 다르게 방적원료로 많이 쓰였다. 그래서 상당한 생산량이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조선종 재래면은 미국종보다 품질이 떨어지고, 경작법이 원시적이어서 물량이 적었으며, 대량수출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목포의 풍토가 미국종 재배지로 기대를 모으게 된 것이다.
--- p.107

다른 농작물과 달리 면화 재배에는 농약이나 비료를 아주 적게 사용하기 때문에 친환경적인 농산물일 뿐 아니라 자원 절약, 에너지 절약형 섬유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지구상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다. 의류의 주요 성분인 화학섬유는 원료가 석유다. 화석연료도 화학섬유도 친환경이 아니기에 여러 문제를 낳고 있다. 이에 반해 목화는 햇빛과 공기가 있고 토양만 적합하다면 영구적으로 활용 가치가 있는 친환경 농산물이다. 목화가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 신성장의 동력원이 될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 p.145

그들 대부분이 반농반어(半農半漁)의 농어촌에서 부업으로 소금을 제조하는 실정이었다. 설사 어민들이 천일제염의 유익함을 인정한다 해도 염전 개척 비용을 짊어지고 새로운 경영에 도전하리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게 활성화되지 않으면 ‘천일제염 생산체제를 대대적으로 정비해 외국 소금 수입을 저지하겠다’는 본래 목적은 물거품이 될 수도 있었다.
--- p.163

와카마쓰 영사가 일부러 보고하지 않은 것은 ‘국가의 외교문제에 대처해야 할 공사관에 이런 지방 분규를 보고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러?일 사이에 전쟁 분위기가 급박하게 번지면서 언제 국교단절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라 공사관은 밤낮없이 매우 바빴다. 또한 인부 소란 사건은 그때까지 몇 차례 일어났고 그때마다 해결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목포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 p.188

와카마쓰는 도시샤 이래 기독교를 신봉해온 덕분에 길 목사와 대화하면서 상당 부분을 이해하고 서로 공감할 수 있었다. 대화록이 없기 때문에 추측할 수밖에 없지만, 와카마쓰는 일본 관료로서 한계를 감안하고라도 한일 양국의 공생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해서 노력하고 싶다고 호소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당시 상황으로 미루어볼 때, 민족정신을 대변하는 길 목사가 납득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와카마쓰는 자기 마음을 이해해준 길 목사에게 마음 깊이 감사했다.
--- p.208

왠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인천거래소에는 주민 반발에 대비해 옥외 경계에 경찰관 70여 명이 배치되고 소방차까지 동원되었다. 오후 4시 30분이 되어서야 임시총회가 열렸다. 와카마쓰 사장이 의장석에 앉아 제안 이유를 설명했지만, 반대파가 처음부터 방해하는 바람에 소란이 일었고 주주들끼리 논쟁이 붙어 폭력 사태까지 벌어지게 되자 6시 50분에 휴회했다. 옥외 군중 사이에서도 돌을 던지는 등 폭력 사태가 벌어져 여러 명이 붙잡혀갔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한밤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결국 휴회 상태로 폐회했다.
--- p.229

1940년대 초반 미국과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일본에 살던 한국인은 경찰의 감시와 박해 때문에 행동에 제약이 심했다. 재일 한국인은 불가피한 일로 한국에 잠시 왔더라도 다시 일본으로 입국할 수 없었다. 그때 수많은 한국인이 ‘한국통’인 와카마쓰에게 찾아와 해결을 부탁했다. 와카마쓰는 거절하지 않았다. 귀찮다는 내색도 하지 않고 그들을 대신해 경찰부장 같은 관리들을 만났고, 각처의 경찰서에 몸소 나가서 딱한 사정을 설명하고 한국인이 재입국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 p.243

멜리사와 만나게 된 것도 와카마쓰 탐사가 계기가 되었다. 빠른 시일 안에 그녀의 집을 방문하기로 다짐하던 차에 와카마쓰의 직계 후손과 연락이 됐다. 그 집에서 자라서 50년 전에 이사했다는 손자손녀들도 합류해 첫 대면을 했다.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저택에 신구 거주자와 연구원이 한자리에 모이는 진기한 광경이 펼쳐졌다. 근처 신여당 한쪽에 모셔둔 와카마쓰 일가의 묘에도 들러 예를 올렸다. 와카마쓰는 한국 근무를 마치고 1927년 교토로 돌아가 20여 년을 살다가 1953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84세 때였다. 시력이 나빠져 차를 피하지 못해 생긴 사고였던 것 같다.
--- p.257

자식이 여덟이면 형제자매라 해도 성격이 다르고 생김새도 제각각이다. 아버지 와카마쓰를 가장 닮은 자식은 넷째 딸 모미지와 둘째 아들 시히로이고, 나머지 자식들은 어머니 소마를 닮았다. 와카마쓰는 아이디어 내는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것을 쉽게 받아들이는 반면 우유부단했다. 공부를 하지 않아도 성적이 좋고 명석한 자식을 더 좋아했다.
--- p.281
 
 

출판사 리뷰

외교관 와카마쓰, 한국 땅에 최초로 목화와 소금을 보급하다

우리가 일제강점기 이후 입은 솜옷이나 무명옷의 원재료는 사실상 고려 말 문익점이 중국에서 올 때 붓두껍에 숨겨온 그 재래면이 아니다. 이 옷들은 미국산 개량종 육지면으로 만들어졌다. 질과 양에서 재래면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한 육지면은 한 일본인 외교관이 1900년대 초 도입해 우리나라에 퍼졌다.
190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은 소금은 서해 개펄에서 난 ‘천일염’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에는 천일염전은 존재하지 않았고, 소금이라면 바닷물을 끓여서 만든 자염(煮鹽)뿐이었다. 그러던 중 바로 이 일본인 외교관이 중국의 천일염전에 착안하여 만들자고 제안한 덕분에 ‘남서해안 천일염’이 시작되었다. 목포에서 외교관 인생을 시작한 일본인의 이름은 와카마쓰 도사부로(若松兎三郞)이다.

《목화꽃과 그 일본인》은 우리에게는 생소한 와카마쓰 도사부로라는 인물을 발굴?추적해서 기록한 결과물이다. 메이지유신이 시작된 1869년 규슈 오이타 현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84세를 일기로 교토에서 숨을 거두기까지 와카마쓰라는 사람의 한평생을 이 책에 담았다. 또한 와카마쓰 개인의 삶과 더불어 이토 히로부미, 안창호 등 동시대를 살다간 굵직한 인물들의 이름도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에서는 특히 와카마쓰가 우리나라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목화를 재배하게 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있다. 또한 천일염전을 개발하게 된 계기와 천일염이 우리 삶은 물론 우리 경제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알 수 있다.

‘착한’ 일본인 이야기

와카마쓰는 어릴 때부터 고향 마을 학교에서 늘 우등생이었다. 기억력이 좋고 답변도 잘해서 마을 사람들 사이에 장래가 촉망되는 아이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야말로 벽지의 작은 마을에서 보기 드문 수재였다. 동네 사람들은 ‘개천에서 용 났다’고들 했다. 하지만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아 학비를 벌며 공부했다. 지역 유지의 도움을 받아 도쿄대학 법학부에 입학한 뒤 일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외교관의 길로 들어섰다.
첫 부임지 한반도 경성을 시작으로, 중국 항저우와 사스, 미국 뉴욕, 한반도 목포 등에서 외교관 생활을 했다. 그리고 내무관료로 원산, 평양, 부산에서 근무하며 인생의 절정기를 보냈다. 관료 생활을 마친 뒤에는 인천 쌀?콩거래소 사장으로 망해가던 회사를 재건했다. 일본 교토로 돌아가서는 도시샤대학에서 교우회장으로 활동하며 재일 한국인의 인권을 보호하려고 노력하고, 한국인이 한국인 교회당에서 자유롭게 예배를 볼 수 있도록 일본 경찰을 설득하러 다녔다. 만년을 가족과 함께 기쁨과 슬픔을 맛보는 가운데 유유자적했지만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목화꽃과 그 일본인》을 쓴 저자 김충식은, 심정적으로는 ‘불편한’ 총독부의 일제 관료였지만 목화 재배와 천일염전 개발이라는 적산(敵産)의 레거시(유산)를 남기고 한반도를 떠난 와카마쓰라는 사람을 독자에게 있는 그대로 전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그의 삶을 기록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추규호 한일미래포럼 대표가 쓴 추천의 글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한일 간에는 글과 말로 다할 수 없는 곡절과 은원(恩怨)의 역사가 있지만, 이를 단세포적이고 조건반사적인 홑눈[單眼]으로만 보며 대응할 일이 아니다. 아베 정권으로 상징되는 일본의 우경화와 반한?혐한의 퇴영적 바람은 그것대로 따지고 제어해나가야겠지만, 그와는 다른 차원에서, 또 큰 틀에서 ‘한일 관계사’를 겹눈으로 보아 입체적?종합적으로, 호혜적?미래지향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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