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문화예술 입문 (책소개)/1.건축문화

건축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들

동방박사님 2022. 7. 12.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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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건축’이라는 말 속에는 아주 오래된 고정관념이 내포되어 있다. 건축은 ‘건물’과 다르다는 것, 공학적 산물인 건물과 달리 건축은 예술작품이자 인문적 사유의 소산이라는 것, 평범한 주택이나 획일적인 아파트나 경박한 쇼핑몰 따위는 건축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는 것. 도면이나 사진 밑에 심오한 주석 달기를 즐기는 건축가들과 자기의 집을 건축으로 여기지 않는 거주자들(혹은 독자들)의 교감 속에 끊임없이 재생산되어 온 이 고정관념은, 건축물의 물성만큼이나 단단하고 견고하다.

글쓴이는 그런 구분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잘라 말한다. “건축과 건물을 구분하는 것은 ‘인간이냐 사람이냐’라는 구분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인간은 한자어고 사람은 순우리말이다. 그뿐이다.” 그러고는 “건축가만이 공간을 창조한다고 믿는 것은 커다란 착각”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건축가라는 직업이 생기기 이전부터 인간은 이미 그 존재의 본질에서 건축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건축이 특정 전문가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면서 우리는 타고난 본성을 잃은 채 살아가고 있다. 내 몸이 거주하는 공간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며, 무엇이 좋은 건축인지 분별해내는 판단력마저 상실해버렸다. 글쓴이의 여정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건축물을 단지 감상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수동적 태도에서 벗어나 ‘짓는 인간’으로서의 능동적 본성을 회복하도록 돕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이 책에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유명한 건축가들, 당대의 사상가들, 그리고 수많은 건축물과 건축공간들이 등장한다. 방대하지만 명료하고 단호하면서도 친절한 글쓴이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은 “건축은 진리를 찾는 학문이 아니다. 그러나 진실한 건축은 분명 존재한다”는 그의 믿음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쉬이 파악할 수 있다. 건축은 예술이 될 수 없음을 논증하는 폭넓은 근거들은 역설적이게도 이 책을 깊이 있는 예술서로 만들고 있으며, 현학적인 ‘인문적 건축론’을 지양하고 건축을 건축 자체로 사유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문서가의 앞자리를 차지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목차


머리말

제1장 집을 왜 짓는가?

1. 건축은 창가의 빈 병
2. 건축은 오래 남는 ‘시작’
3. 건축은 모두의 기쁨
4. 우리는 그릇 안의 물이 아니다
5. ‘사이’에서 답을 찾는 건축
6. 건축과 공동체

제2장 건축 이전의 건축

1. 스톤헨지가 완성되던 날
2. 피난처가 의례공간으로
3. 짓기를 배워야 거주한다
4. 진실한 건축은 있다
5. 건축은 ‘근원을 아는 자’의 기술

제3장 사회가 만드는 건축

1. ‘建’이 ‘聿’과 ‘?’인 이유
2. 건축은 사회적 공간
3. 공간은 생산된다
4. 거대한 사회적 디자인
5. 사회는 건축을 자라게 한다
6. 고딕 대성당을 오늘날 지을 수 없는 이유

제4장 시설, 제도, 공간

1. 고대 그리스인들이 발명한 시설들
2. 시설은 사회와의 접점
3. 사라지고 생기는 빌딩 타입
4. 백화점, 백 가지 물건을 파는 가게
5. 쇼핑몰, 현대건축의 매개체
6. 학교라는 근대시설
7. 현대건축의 모델, 지하철역과 공항

제5장 건축은 작은 도시

1. 모여야 마을이다
2. 길은 건물, 건물은 길
3. 건축은 지붕 덮인 공공공간
4. 존재와 욕망의 탑
5. 중정, 회랑, 광장

제6장 신체와 장소

1. 아잔타 석굴에 몸을 댈 때
2. 롱샹 성당이 최고의 성당이 아닌 이유
3. 건축은 바로 이 장소에 선다
4. 장소를 없애는 몇 가지 방법
5. 장소를 살리는 몇 가지 단서

제7장 오늘의 건축을 만드는 힘

1. 환경은 나와 무엇 사이
2. 정경을 갈아입는 건축
3. 건축‘으로’ 만들기
4. B급 건축, 작은 건축

제8장 정보가 건축을 바꾼다

1. 위키피디아가 건축을 만든다면
2. 휴대전화, 편의점, 인터페이스
3. 미디어가 짓는 건축

제9장 시간의 건축과 도시

1. 시간을 이어가는 건축
2. 과거와 미래를 기다리는 집
3. 도시 속의 시간
4. 지속가능한 사회의 건축

제10장 건축은 모든 사람을 가르친다

1. 모든 이의 공동의 노력
2. 늘 새로운 원시적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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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 이미지

저자 소개

저 : 김광현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거쳐 도쿄대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8년까지 42년간 서울시립대학교와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에서 건축의 공동성(共同性, commonness)에 기초한 건축의장과 건축 이론을 가르치고 연구했다. 대통령 소속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 대한건축학회 부회장, 한국건축학교육협의회 회장을 역임했고, 대한건축학회 사회공헌진흥원 원장, 젊은 건축가들을 가르치는 ‘공동건축학...
 

책 속으로

건축은 집을 짓는 일이지만 사람이 만드는 다른 구조물과는 다른 바가 많다. 건축은 기술을 사용하되 사람이 무엇을 바라는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묻는다. (…) 사람은 집을 통해 자기가 바라는 바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하고, 집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건축은 예술적으로 잘 지은 집을 감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 p.머리말

내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고유한 존재라는 것 이상으로 소중한 것이 있을까? 자기만의 개별성을 인정받기 위해 다들 얼마나 애를 쓰는가? 이 고유성과 개별성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소중한지를 가장 가까이 알게 해주는 것이 바로 건축이다. 건축을 전공하는 이들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사실에 터 잡아야 하고, 건축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 또한 이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 p.23

이집트 신전의 거대한 벽면에는 그들의 종교와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탑문의 부조는 파라오가 신들 앞에서 적을 무찌르는 장면이고, 신전 안 벽면에는 신들이 파라오에게 성수를 뿌리는 장면도 그렸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의 장식으로만 여기지만, 사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건축물을 지은 이유이고 “왜 짓는가?”에 대한 그들의 대답이었다. 그들에게 건축은 말이었고 글이었다.--- p.31

건축설계는 새로운 것, 남이 이제까지 말하거나 만들지 않은 것, 뭔가 전위적인 것을 ‘발명’하듯이 만들어내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무언가를 발견하는 작업이다. 훌륭한 건축가는 자기만의 것을 표현하기보다는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잠재하고 있는 것, 표현하고 싶지만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그 무엇을 과감하게 드러내 보이는 사람이다. --- p.44

집을 짓는다는 것은 무대를 만드는 것이다. 건축이 삶을 만들고 삶을 바꾼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대의 연출자가 건축가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연출자는 그 집에서 생활하는 사람, 그 집을 이용하는 사람이다. 건축가는 사는 사람의 생활을 결정해준 게 아니고 단지 생활이 이루어지는 무대를 만들어 준 것일 따름이다. --- p.80)

음표와 음표 ‘사이’가 음악을 만들어내듯 건물과 건물 사이가 공간과 환경을 만들어낸다. 건축가는 건물과 건물 사이, 건물과 사람 사이가 연속되는 환경을 만드는 사람이다. 건축을 전공하거나 건축을 교양으로 배우는 것은 이쪽과 저쪽의 무수한 ‘사이’를 발견하는 지혜를 배우는 것이다. 좋은 건축은 무엇을 지향하지 않고, 무엇과 무엇의 ‘사이’에 늘 있어왔다. --- p.90

독일 국회의사당과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 그리고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내가 임의로 선택하여 이 책에 함께 기술했다는 것 외에는 지역적으로나 시대적으로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본질이 세 개의 건축물을 관통하고 있다. 이 건축물들은 어려운 철학적 내용이 아닌, 인간 존재의 원천과 같은 것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건축은 만드는 것이지 발명하는 것이 아니다. 건축이란 우리의 공동체 안에 이미 존재하는 ‘건축 이전의 것’을 발견하여 구조물로 만드는 작업이다. --- p.147

분명한 사실은, 진실한 자동차는 없고 진실한 도로도 없으며 진실한 스마트폰도 없지만 진실한 건축은 있다는 것이다. 비바람을 막아주고 일상을 지켜주며 어떤 일을 하기에 적합한 실용적인 집은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하고, 매순간 사람의 마음과 정신에 호소하는 바가 크다. 댓돌에 벗어놓은 부석사의 고무신이나 음악당 대기실의 작은 창이 건물의 진실함을 드러낼 수 있다. 나는 학생들에게 건축은 진리를 찾는 학문이 아니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지만, 건축에는 진실한 건축이 분명히 있다. --- p.187

1944년에 루이스 칸은 이렇게 말했다. “마그나카르타(Magna Crarta: 대헌장)를 작성하는 데 최고의 잉크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가장 값비싼 재료를 쓰고 가장 최상의 기술을 동원한다고 해서 기념비적인 건축이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 잉크가 좋아서가 아니라 근대 헌법의 토대를 이룬 ‘정신’이 담겨 있어서 역사적인 대헌장이 되었듯이, 기념비적인 건축은 최고의 재료나 최고의 기술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칸의 말을 바꾸면 이렇게 된다. “마그나카르타를 작성하는 데 최고의 잉크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매일 사용하는 강의실과 폐기된 물탱크로 교사 남윤철과 시인 윤동주를 기리는 데는 값비싼 대리석이 필요하지 않았다.” --- p.274

건축이 이미 있는 것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것은 자기가 집을 설계할 대지 안에 있는 오래된 나무 한 그루를 어떻게 할 것인지 묻는 것과 같다. 건축주를 대신하여 이 나무를 자르는 일에 나선다면 그는 건축가가 아니다. 건축가는 이미 있었던 한 그루의 나무를 자르지 말아야 한다는 쪽에 굳건히 서야 한다. --- p.469

건축설계가 궁극적으로 시간에 관한 것임을 이해하는 데는 그리 어려운 생각이 필요치 않다. 설계 자체는 평면에 그리는 것이니 2차원적인 작업이다. 그러나 그것은 3차원적으로 지어질 공간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사람은 짧은 찰나 속에서 살 수 없고 지속하는 시간 속에서만 살 수 있으므로, 건축공간은 사람이 머물고 움직이며 생활하는 긴 시간을 위해 수많은 물질로 지어진다. 건축설계는 이렇듯 물질을 통해 시간을 불러내고 이어가는 일이다. --- p.627

건축가가 사용하는 트레이싱 페이퍼는 반투명이다. 절반은 투명하고 절반은 불투명하다. 예전의 것을 절반쯤 받아들이되, 나머지 절반은 다시 새롭게 고치라는 것이다. 건축만큼 질문을 수없이 하는 배움도 없을 것이다. 말하고, 쓰고, 그림으로 만들고, 각종 매체로 설득하고, 이론을 만들고, 기술을 도입하고, 법을 따르고, 인간을 생각하는 것이 건축이다. 신체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감정까지를 이해하고 예측하고 다루는 인간 본연의 실천이다. --- p.697

지나가다가 우연히 본 이름 없는 건물도 이런 지혜를 가르쳐주는데 이 세상의 유명한 건축물과 도시공간은 얼마나 많은 것들을 보여주고 가르쳐줄지 생각해보라. 건축은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지속적인 가치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또한 크고 작은 사물들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관여하고 있는지를 가르쳐 준다. 건축물 안에 있는 하나의 사물은 방을 거쳐, 건물을 거쳐, 그리고 다시 저 밖에 있는 다른 건물들을 거쳐 세계와 두루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사실을 통해서 건축은 크고 작은 환경의 의미를 가르치고, 지속가능한 사회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가르친다.
--- p.703
 

출판사 리뷰

한국 건축계의 큰 스승이 전해주는 ‘사람 중심의 건축론’
건축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국민건축교과서

모든 인간은 태생적으로 건축가

‘건축’이라는 말 속에는 아주 오래된 고정관념이 내포되어 있다. 건축은 ‘건물’과 다르다는 것, 공학적 산물인 건물과 달리 건축은 예술작품이자 인문적 사유의 소산이라는 것, 평범한 주택이나 획일적인 아파트나 경박한 쇼핑몰 따위는 건축의 반열에 오를 수 없다는 것. 도면이나 사진 밑에 심오한 주석 달기를 즐기는 건축가들과 자기의 집을 건축으로 여기지 않는 거주자들(혹은 독자들)의 교감 속에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온 이 고정관념은, 건축물의 물성만큼이나 단단하고 견고하다.
글쓴이는 그런 구분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잘라 말한다. “건축과 건물을 구분하는 것은 ‘인간이냐 사람이냐’라는 구분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인간은 한자어고 사람은 순우리말이다. 그뿐이다.” 그러고는 “건축가만이 공간을 창조한다고 믿는 것은 커다란 착각”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건축가라는 직업이 생기기 이전부터 인간은 이미 그 존재의 본질에서 건축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건축이 특정 전문가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면서 우리는 타고난 본성을 잃은 채 살아가고 있다. 내 몸이 거주하는 공간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며, 무엇이 좋은 건축인지 분별해내는 판단력마저 상실해버렸다. 글쓴이의 여정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건축물을 단지 감상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수동적 태도에서 벗어나 ‘짓는 인간’으로서의 능동적 본성을 회복하도록 돕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사진만 보고 '예쁘다, 멋지다' 하는 것은 건축 공부가 아니다. 건축을 알려면 먼저 몸을 그 안에 둘 줄 알아야 한다. 건축은 생활 속에서 체험되는 것이므로. (…) 건축을 배운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이 어떻게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건축을 통해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인간은 왜 집을 짓는가?

한국 건축계의 큰 스승으로 꼽혀온 글쓴이는 ‘작가주의’가 만연하는 한국 건축계에 종종 날카로운 비판을 던져왔다. 건축의 근본은 난해한 콘셉트나 현학적 이론 속에 있지 않으며, 그것을 걷어낼 때 비로소 인간이 집을 짓는 이유가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건축은 본래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다. (…) 애초에 인간은 어려운 생각이나 별난 사유를 담기 위해 집을 만들지 않았다. 단순하고 소박하다는 것은 아무것도 안 해도 저절로 알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건축은 단순하고 소박하기 때문에 그만큼 근본적이다.”
그가 말하는 ‘근본’은 “인간은 왜 집을 짓는가?”라는 근원적 질문과 맥이 닿아 있다. 원시주거에서 현대의 첨단건물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여전히 변하지 않는 건축의 정신과 가치를 찾아내고, 이를 통해 이 시대의 건축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다.
“건축에는 모든 사람에게 공동으로 다가오는 근원적인 감각이 있다. (…) 건축물의 모양이 어떠하며 어디에 어떻게 지어졌는가 하는 외적인 조건을 넘어, 돌과 나무와 흙으로 만들어진 건물의 거친 물질 속에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다가오는 가치와 본질이 있다. 바로 이것이 건축의 ‘공동성’이며, 건축을 건축이게끔 하는 근본이다.”
이것을 물질적 공간으로 구현하기 위해 건축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주택이나 교회 또는 학교라는 건축물의 ‘시작’을 발견하는 일이다.
“가령 유치원이라고 하자. 무엇이 유치원 설계의 시작일까? 조기교육이나 영재교육 같은 것일까? 아니면 인간으로서 배워야 할 배려, 자유로이 마음껏 뛰노는 곳, 커다란 나무 그늘 밑에서 자연을 배우는 것 등일까? 이런 질문을 계속하다 보면 무엇이 ‘시작’인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것 이상이 없다고 생각되는 소중한 것, 바로 그게 유치원이라는 시설의 ‘시작’이다. 기원에 접근하고 기원으로 돌아가는 독창적 건축설계는 이런 사유의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건축의 본질은 ‘모두의 기쁨’

그렇게 만들어진 건축물은 인간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 기쁨은 건축물을 사용하거나 바라보는 사람들과 건축가를 이어주는 접점이며, 건축의 가장 소중한 본질이기도 하다. 예나 지금이나 건축은 도시의 핵심 요소이므로, 건축이 주는 기쁨은 곧 공동체 전체의 기쁨이 된다.
"건축의 본질은 공동의 기쁨을 담는 그릇이라는 점이다. 어떤 건물에 사는 사람이나 그곳에 찾아오는 사람에게 그 건물이 조용한 기쁨을 준다면 그 건물은 모두의 건물이 된다. 만약 '건축은 예술'이라고 굳이 말한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사회적 예술'이라는 의미에서다."
단적인 예가 바로 ‘사그라다 파밀리아’다. 사람들은 그것을 건축가 가우디의 작품으로만 여기지만, 공사 기간만 100년이 넘는 ‘무모한’ 설계안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도시의 미래를 걸었던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안목이 없었다면 저 위대한 건축물은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성당은 부정형의 돌덩어리에서 ‘태어나고 있는’ 건축이다. 즉, 사회의 많은 사람의 손에서 손으로 이어지고, 계속 지어지며, 도시에 영원히 남기 위해 자라고 있는 건축이다. (…) 그렇다. 건축은 짓는 것이 아니다. 건축은 사회 모두가 자라게 하는 것이다.”

무엇이 좋은 건축인가

건축은 미학적 감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거주자들의 기쁨과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는 소신에서 드러나듯, 그에게 중심이 되는 것은 언제나 ‘사람’이다. 사람의 몸이 기거하고 일상이 펼쳐지는 공간으로, 혹은 공동체의 삶과 희망이 구현되는 공간으로 건축물을 바라볼 때만 좋은 건축과 그렇지 못한 건축을 정확히 구분할 수 있다.
‘건축사에 손꼽히는 걸작’으로 평가받는 르 코르뷔지에의 롱샹 성당 또한 예외가 아니다. 말과 소리와 빛과 몸으로 미사를 드리기에 좋은 장소가 되지 못하면 그곳은 결코 좋은 성당, 좋은 건축이 될 수 없다. 눈으로만 둘러봤던 두 번의 방문에 이어 세 번째 방문에서 처음으로 미사를 경험한 뒤, 글쓴이는 이렇게 고백한다.
“그날 나는 롱샹 성당을 물체와 공간으로서가 아니라 빛과 소리가 현상하는 공간으로서 체험하였다. 물체와 공간으로서는 20세기 최대의 걸작인 곳에서 제대 위의 어두움을 보았고, 소음처럼 엉키며 감도는 어수선한 소리를 들었다. 근대건축에서 현대건축으로 넘어가는 획을 그은 건물로 평가받는 성당에서 이런 있을 수 없는 상황을 겪으면서, 대체 ‘작품’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을 두고 ‘걸작’이라고 말해왔는지 커다란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건축을 건축에서 배웠다”

노르웨이 헤드마르크 박물관 창가의 빈 와인병에서 건축의 원형을 발견하는 것(‘건축은 창가의 빈 병’)으로 시작하는 글쓴이의 여정은 다리 잘린 의자가 놓여 있는 어느 골목길 풍경에서 인간의 건축적 지혜를 확인하는 것(‘늘 새로운 원시적인 것’)으로 마무리된다. 건축의 근원이나 가치를 찾아내는 실마리는 거창한 텍스트나 화려한 이미지가 아닌 건축 그 자체에 있다. “내게 건축을 가르쳐준 이는 유명 건축가나 건축학자가 아니었다. 나는 건축을 건축에서 배웠다”는 말처럼.
그러니까, 그는 독자들에게 건축을 가르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건축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들》이라는 인상적인 제목은 평생에 걸친 본인의 배움을 독자들과 공유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 책에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유명한 건축가들, 하이데거와 한나 아렌트와 푸코 같은 당대의 사상가들, 고딕 성당에서 홍대 앞 거리에 이르는 수많은 건축물과 건축공간들이 등장한다. 방대하지만 명료하고 단호하면서도 친절한 글쓴이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은 “건축은 진리를 찾는 학문이 아니다. 그러나 진실한 건축은 분명 존재한다”는 그의 믿음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쉬이 파악할 수 있다. 건축은 예술이 될 수 없음을 논증하는 폭넓은 근거들은 역설적이게도 이 책을 깊이 있는 예술서로 만들고 있으며, 현학적인 ‘인문적 건축론’을 지양하고 건축을 건축 자체로 사유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문서가의 앞자리를 차지하기에도 부족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