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세계사 이해 (책소개)/1.세계사

아시아가 세계를 재패하는 시대는 다시 오는가?

동방박사님 2022. 7. 30.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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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500여 년 전부터 유럽으로 넘어간 세계사의 패권과 중심축은
다시 아시아로 넘어올 것인가?


아시아는 5,000여 년 인류 역사의 상당 기간 경제적으로 유럽보다 우위에 있었다. ‘세계 6대 문명’(저자는 이른바 ‘4대 문명론’에 반대하며 양자강 문명, 메소아메리카 문명을 더한 ‘6대 문명론’으로 파악한다) 중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을 누린 문명은 중국의 황하 문명이었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 진시황은 춘추전국을 통일하는 과정에 ‘반량전(半兩錢)’이라는 화폐로 거대한 중국의 경제통합을 이루어냈다. 이는 유로화를 매개로 대륙의 경제 통일을 달성한 유럽 연합 모델보다 무려 2,000년 이상 앞선 위대한 도전이자 눈부신 성취였다.

경제적 패권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넘어가게 된 것은 대항해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포르투갈?에스파냐 등으로 대표되는 유럽이 뱃길을 통해 전 세계에 진출하며 부를 축적하는 동안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는 안주하고 있었다. 유럽은 구텐베르크 활자혁명?종교개혁?산업혁명 등을 거치며 세계 패권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그 패권은 제1?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손에 완전히 넘어가는데…….

15~16세기 대항해 시대 이후 500년 넘게 이어져 온 서방 세계의 패권은 21세기 내내 변함없이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애초에 부와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로 다시 넘어올 것인가? 풍부한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한 정교하고 치밀한 역사 해석과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무장한 이 책을 읽다 보면 인류 5,000년사의 도도한 흐름과 판도가 장기판처럼 선명하게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로써 세상의 거대한 흐름에 관한 중요한 통찰을 얻게 될 것이다.

 

목차

서문_ 한눈에 살펴보는 세계 경제 패권의 역사

Part 01_ 인류 역사에서 ‘아시아 우위 시대’가 길게 이어진 이유

1. 인류의 탄생
2. 문명의 전파
3. 농경 생활로 불거진 문제
4. 중국의 융성
5. 당에서 원으로 ― 더욱 발전하는 중국

Part 02_ 유럽은 어떻게 세계를 제패했나

6. 고대 지중해 세계
7. 중세 유럽과 이슬람 세계
8. 이탈리아에서 포르투갈로 ― 유럽의 무역 변화
9. 대서양 경제 형성과 유럽의 대두
10. 정보의 비대칭성이 적은 세계로 ― 구텐베르크 혁명의 의미
11. 패권을 차지한 네덜란드와 유럽 경제의 발전

Part 03_ 아시아, 오랜 잠에서 깨어나다

12. 하나가 된 아시아 바다
13. 영국과 유럽 대륙의 공업화
14. 축소된 세계와 영국의 역할
15. 전신이 영국의 패권을 일구다
16. 미국이 주도한 20세기
17. 전후 아시아의 재부흥에서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까지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 : 다마키 도시아키 (玉木 俊明)
 
오사카에서 태어나 도시샤대학교(同志社大?) 문학부 문학과를 졸업했다. 동대학원 박사 과정을 중퇴하고, 교토산업대학교 경제학부 강사를 거쳐 조교수로 근무했다. 이후 「북유럽의 상업과 경제 1550~1815년」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오사카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경제사학을 전공한 그는 현재 교토산업대학교 경제학부 경제학과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다이아몬드의 세계』『세계사의 중심축이 이동한다』...

역 : 서수지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지만 회사 생활에서 접한 일본어에 빠져들어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일본어를 공부해 출판 번역의 길로 들어섰다.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를 삶의 모토로, 더 많은 책을 읽고 알리기 위해서 오늘도 열심히 책을 읽고 옮긴다. 옮긴 책으로 아동서 『단단한 마음 기르는 법』, 『초등 과학 실험 대백과』 「추리 사건 파일」 시리즈,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 『세계사를 바꾼 13가지 ...
 

책 속으로

인류는 지금까지 세 번의 커다란 글로벌리제이션을 경험했다. 먼저 호모에렉투스가 유라시아 대륙으로 퍼져 나간 제1차 글로벌리제이션이 있었다. 이어서 호모사피엔스가 아프리카를 나와 세계 각지로 뻗어나간 제2차 글로벌리제이션이 있었다. 그리고 대항해 시대에 유럽인이 세계 곳곳으로 원정을 떠난 제3차 글로벌리제이션이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현대 사회는 제3차 글로벌리제이션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
--- p.7~8

6대 문명 가운데 메소아메리카 문명은 다른 문명과 고립되어 있을 뿐 아니라 성립 시기도 비교적 늦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오리엔트라는 하나의 문명권을 형성했다. 이 오리엔트에서는 다양한 국가가 난립했고 전쟁이 끊이지 않아 통일 국가가 생겼다 멸망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했다. 인더스 문명 또는 인도 문명도 비슷한 상황에서 장기간에 걸쳐 하나의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했다.

반면 황하 유역에서는 일찍부터 통일 국가가 완성되어 전란의 시기에도 국가 통일이 당연한 전제로 여겨졌다. 황하 유역의 통일 왕조는 중국 경제라는 무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도맡았다. 다시 말해 근세나 근대 유럽과 마찬가지로 국가 주도로 경제 성장이 이루어졌다. 이때까지 양자강 유역은 그 권역에 편입되지 못했다.
--- p.063~064

서기전 221년,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 중국에서는 갖가지 화폐가 통용되고 있었다. 시황제는 다양한 화폐를 반량전으로 통일해 넓은 지역에서 두루두루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영토가 단일 화폐로 통일된 것은 말하자면 오늘날 유럽 연합(EU)에서 사용하는 유로를 고대 중국이 훨씬 이전에 만들어 단일 통화권을 구축했다는 의미다. 춘추전국 시대에 이미 시작된 경제 성장이 화폐 통일로 가속화한 것이다.
--- p.067~068

진에서 한(전한)의 무제에 이르는 80여 년은 황제 독재, 즉 중앙 집권 정책의 역사로, 이 정책을 시작한 인물은 진의 시황제, 완성한 인물은 한의 무제였다. 이 정책은 경제적으로는 단일 시장 탄생을 지향점으로 삼았다. 시황제부터 무제까지 약 100년에 걸쳐 중국은 경제 성장에 적합한 제도를 갖추어 나갈 수 있었다. EU가 만들어지기 무려 2,000여 년 전 중국에 단일 시장이 탄생했던 셈이다.
--- p.71

카이두의 반란을 끝으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몽골의 평화)가 찾아왔다. 유라시아 대륙의 상당 부분이 원의 지배하에서 안정을 찾았고 동서 교류가 활발해지며 상업이 발전했다. 몽골 제국이 만든 평화는 지중해 무역의 증가로 이어졌고 지중해 무역은 인도양과 동남아시아 무역으로 이어졌다. 유라시아 대륙의 상업이 아시아 바다(인도양·동남아시아)와 통합되어 더욱 큰 상업 네트워크를 실현한 것이다.

몽골 제국의 한국이 서로 경쟁 관계에 있었다고 해도 황제가 종주권을 장악한 점에서 원은 중앙 집권을 지향한 국가였다. 원에서는 몽골인 제일주의가 채택되었고 한족은 낮은 지위에 머물러야 했다. 그렇지만 원의 통치 체제는 상당 부분 이전의 중국 왕조를 계승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진의 시황제가 시작해 한의 무제가 완성한 중앙 집권화는 원대에도 여전히 강력했다.
몽골 제국은 상업을 보호했다. 역참제를 채택했을 뿐 아니라 이전 왕조와 마찬가지로 해상 무역을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원의 상업 정책은 이전의 중국 왕조와 판박이처럼 닮았다. 팍스 몽골리카 덕분에 유라시아 대륙의 상당 부분과 아시아 바다의 일부가 통합될 수 있었다.
--- p.092~093

1500년에 포르투갈인 페드루 알바르스 카브랄이 브라질에 표착해 브라질은 포르투갈령이 되었다. 17세기에 브라질에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발전하자 브라질 경제가 포르투갈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커졌다. 브라질과 아시아 두 지역의 유대가 강화되면서 이베리아반도, 라틴아메리카, 아시아에 걸친 거대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뉴 크리스천의 무역망은 대서양으로 확장되었고 브라질, 페루, 멕시코로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 네트워크가 포르투갈인이 사는 마카오와 마닐라 네트워크와 연결되었다. 포르투갈의 뉴 크리스천은 유럽, 대서양, 아시아를 하나의 무역망으로 통합하는 중대한 역할을 수행했다.
--- p.135~136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프리카산 금을 확보하기 위한 유럽인의 노력이 대항해 시대의 서막을 연 셈이다. 사하라 사막에서 이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유럽인이 직접 금을 수입한다는 목표 하나만 앞세워 포르투갈의 항해왕 엔히크는 바다로 나갔다. 1415년,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대륙 북부의 세우타(Ceuta)를 획득했다. 유럽이 최초로 획득한 유럽 밖의 식민지였으며 이를 계기로 유럽의 제국주의가 시작되었다. 포르투갈은 1444년에 카보베르데, 이듬해인 1445년에 베르데곶에 도달했다. 포르투갈인이 서아프리카 일대를 포르투갈령 기니(기니비사우)로 삼은 때는 1446년이었다. 1480년에는 말리 제국 수도였던 통북투에 이르렀다. 이처럼 유럽은 바닷길을 통해 바깥 세계에 진출했고 바야흐로 유럽이 아시아보다 경제력에서 앞서는 계기를 마련했다. 유럽인은 유럽의 배를 타고 아시아로 항해해 상품을 수입했으며 시간이 지나자 아시아에 상품을 수출하게 되었다.
--- p.140~141

구텐베르크의 혁명으로 소수의 사람이 지식을 독점하는 시대가 종말을 고했다. 문자 정보는 독점적 재산이 아니고 일반인이 보유하는 재산으로 전환되었다. 서적의 양이 엄청나게 증가했고 일부 성직자만 구사할 줄 알던 읽고 쓰는 능력이 여러 계층으로 확대되었다. 또 성서를 자국어로 번역하는 계기가 마련되면서 종교 개혁으로 이어졌다. 구텐베르크가 개발한 활판 인쇄술이 없었다면 마르틴 루터는 독일어 성서를 완성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상인도 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되었다. 상인의 문맹률은 예전에도 다른 계층보다 낮았지만 구텐베르크 혁명 이후 문맹률은 더욱 줄어들었다.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은 상인에게 꼭 필요한 도구였다. 구텐베르크는 종교계뿐 아니라 세상 전체를 크게 뒤바꾸어 놓았다.
--- p.154~156

아시아의 바다는 인도양이든 동남아시아든 이슬람 상인이 하나로 만들었다. 그리고 태평양은 갤리언선이 하나로 묶었다. 이제 아시아의 바다에서는 유럽의 배가 아시아의 배를 대신하게 되었다. 17세기에는 말레이반도와 자바섬 사이 크고 작은 섬들을 오가는 배 가운데 비유럽 선박의 비율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 시기에 네덜란드는 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는 무역 선박의 수를 약 네 배로 증가시켰다. 또 인도양과 말라바르 해안, 중국, 특히 자바섬에서의 무역 선박 수를 늘렸다. 아시아의 바다는 물류 측면에서 보면 아시아인의 바다가 아닌 유럽인의 바다로 변모했다. 유럽인은 우선 유통망을 확보하고 차츰 유럽산 상품을 아시아로 운송했다. 유통망 확보는 훗날 유럽의 승리로 이어졌다.
--- p.189

19세기 후반, 상품과 생산 요소 시장이 전 세계 규모로 통합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시점에 세계 시장과 무관한 지역은 거의 없었다. 세계 경제가 하나로 통합되고 가격의 차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무역과 대량의 이민이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으며 개방 경제를 세계 일체화의 원인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실질 자금 차이는 1873~1914년 사이 전 세계에서 크게 줄어들었다.
--- p.208~209

세계 대부분 지역이 영국 선박의 정기 항로로 이어졌다. 세계의 일체화는 영국 선박이 주도했으며 이 시기 유럽은 아시아보다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다. 원래 유럽은 아시아 상품 수입을 아시아의 운송에 의존했다. 예를 들어 향신료는 동남아시아의 말루쿠 제도에서 홍해까지 거의 아시아 상인 또는 이슬람 상인의 손으로 운송되었다. 유럽 상인이 해상 운송을 담당하는 지역은 지중해에 머물렀고 이탈리아 상인이 그 임무를 맡았다. 그런데 이제 세계 해상 물류는 유럽과 미국이 지배하게 되었다. 물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세계는 엄청난 변모를 겪었다.
--- p.218~219

전신은 제국주의를 표방하는 ‘보이지 않는 무기’였다. 전신망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대영 제국의 통치 시스템의 효율성은 상당히 열악했을 것이다. 아예 제국 유지가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전신은 중요한 제국 내부의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게 해주었다. 대영 제국 그리고 전신은 상업 정보 전달의 확실성을 엄청나게 증가시켰다.
--- p.232

미국이 세계 경제를 지배하는 방법은 영국과 전혀 달랐다. 수많은 국제기관 창설의 배후에 미국이 버티고 있었다. 미국은 자국의 힘뿐 아니라 국제기관을 이용해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다. 브레턴우즈 회의는 이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회의였다. IMF와 세계은행이 바로 미국이 패권을 차지하는 데 첨병 역할을 하는 국제기관이었다.
--- p.245~246

패권 국가란 ‘무엇이 옳은가?’, 다시 말해 ‘누가 정의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국가를 말한다. 과거 영국이 그랬듯이 ‘자동’으로 수수료 수입으로 이익을 벌어들일 수 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자동’으로 수익이 들어오는 시스템은 패권 국가의 중요한 특징이다. 패권 국가란 세계 경제를 이끄는 국가다. 세계 여러 나라는 적어도 국제적으로 거래하려고 하면 패권 국가가 구축한 시스템을 사용해야 한다. 세계 각국이 자진해서든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든 어쨌든 그 시스템을 이용하고 수수료를 낸다.
--- p.267
 

출판사 리뷰

700만 년의 인류사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 ‘글로벌리제이션’

이 책 『세계사의 중심축이 이동한다』의 저자이자 권위 있는 경제사학자인 다마키 도시아키는 700만 년의 인류사를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이라는 핵심어로 정리한다. 그에 따르면, 인류는 총 세 번의 ‘글로벌리제이션’을 경험했다. 제1차 글로벌리제이션은 160만 년 전~25만 년 전 기간 호모에렉투스가 유라시아대륙으로 퍼져나간 사건이다. 제2차 글로벌리제이션은 7만 년 전 호모사피엔스가 아프리카대륙을 나와 세계 각지로 뻗어 나간 일이다. 그리고 제3차 글로벌리제이션은 15세기에 시작된 대항해 시대로, 유럽인들은 배를 타고 세계 곳곳으로 원정을 다니며 막강한 힘과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저자는 이 세 차례의 글로벌리제이션 중 특별히 ‘제2차’와 ‘제3차’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이 두 차례의 글로벌리제이션에 ‘세계사의 중심축’이 형성되고 작동해온 주요한 맥락과 크고 작은 집단과 민족, 국가의 거대한 부와 권력이 만들어지고 이동해온 과정을 통찰할 수 있게 해주는 열쇠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문명이 태동한 이후 수천 년간 세계사의 중심축은 ‘중국 문명’에 있었다

제2차 글로벌리제이션으로 인류는 세계 각지로 이주해 정착 생활을 했다. 그 과정에 처음으로 농경 생활을 시작했으며 ‘6대 문명’을 탄생시켰다. 6대 문명이란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인더스 문명, 황하 문명, 그리고 양자강 문명과 메소아메리카 문명을 말한다. 6대 문명 중에서 최초로 경제 성장에 성공한 문명은 ‘황하 문명’이다. 황하 문명은 양자강 유역에서 일어난 문명을 포괄한 ‘중국 문명’으로 변모했고, 세계에서 가장 생활 수준이 높은 문명을 이루었다. 이는 경제사적 관점에서 볼 때 세계 6대 문명 중 양자강 문명을 아우른 황하 문명, 즉 중국 문명이 패권을 쥐고 있었으며 ‘세계사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중국 문명의 패권은 놀랍게도 유럽에서 대항해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5세기 무렵까지 수천 년간 이어졌다.

‘세계사의 중심축’과 경제 패권에 관한 3가지 핵심적인 질문

이 책 『세계사의 중심축이 이동한다』에서 저자는 3가지 핵심적인 질문을 던지고 ‘경제사학자’로서 자신의 전문지식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탁월한 관점과 해답을 제시한다. 3가지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황하 문명, 혹은 양자강 문명을 아우른 중국 문명은 어떻게 세계사의 중심축을 형성했으며 수천 년간이나 경제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2. 오랜 세월 중국 문명, 혹은 아시아가 장악하고 있던 경제적 패권과 세계사의 중심축은 15세기 이후 왜 유럽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을까?

3. 15세기 대항해 시대 이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동한 세계사의 중심축과 경제 패권은 어떻게 이동해왔으며 향후 어떻게 이동해갈 것인가? 그리고 세계사의 중심축은 다시 아시아로 넘어올 것인가?

중국 문명은 어떻게 ‘세계사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경제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을까?

먼저, 첫 번째 질문에 관한 저자의 관점을 살펴보자. 중국 문명이 수천 년간 세계사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경제 패권을 장악한 데 반해 다른 주요 문명들이 그렇게 하지 못한 데에는 ‘통일성’과 ‘집중력’의 차이가 있다.

6대 문명 중 메소아메리카 문명은 성립 시기도 한참 늦을 뿐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고립되어 있어 다른 문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메이저 문명으로 성장하지 못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오리엔트’라는 하나의 문명권을 형성했으며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이룩했으나 세계사의 중심축을 형성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오리엔트에서는 수많은 국가가 난립했고 전쟁이 끊이지 않아 통일 국가가 생겼다 멸망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힘이 분산되었고 지리적 약점도 안고 있어 세계 경제 패권을 장악하는 데 실패했다. 인더스 문명도 비슷한 상황에서 장기간에 걸쳐 하나의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했으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반면 황하 유역에서는 일찍부터 통일 국가가 완성되어 전란의 시기에도 국가 통일이 당연한 전제로 여겨졌다. 황하 유역의 통일 왕조는 중국 경제라는 무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도맡았다. 근세, 혹은 근대에 들어 유럽의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의 강대국이 등장하여 국가 주도로 비약적 성장과 경제 발전을 이룩하며 세계사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패권을 장악했는데, 놀랍게도 중국에서는 이미 2천 년도 훨씬 더 전에 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난 셈이었다.

중국 문명 또한 다른 문명과 마찬가지로 혼란과 분열의 시기를 겪었는데 춘추전국 시대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분열의 시기인 춘추전국 시대조차 중국에서는 철제 무기의 도입과 함께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고 우경(牛耕)이 널리 퍼져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으며 괄목할 만한 경제 발전이 이루어졌다.
춘추전국 시대를 통일한 나라는 진(秦)이다. 혼란과 분열기인 춘추전국 시대에도 이미 중국 경제는 세계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월등했는데, 탄탄한 경제적 기반을 물려받은 진나라 대에 이르러 중국 경제는 한층 더 풍요롭고 수준도 높아졌다.

진나라 왕 정(政)은 법가 사상에 바탕을 두고 중국을 통일했다. 이후 그는 도량형과 문자, 화폐까지 통일했다. 그는 중앙 집권적 군현제를 채용해 단순한 왕이 아닌 최초의 ‘황제’를 표방하며 ‘시황제’가 되었다. 서기전 221년,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 중국에서는 갖가지 화폐가 통용되고 있었다. 시황제는 다양한 화폐를 반량전(半兩錢)으로 통일해 넓은 지역에서 두루 사용할 수 있게 했다. 하나의 작은 대륙에 맞먹을 정도로 거대한 영토를 가진 중국을 단일 화폐로 통일해낸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는 말하자면 오늘날 유럽 연합(EU)에서 사용하는 ‘유로화’와 같은 화폐를 고대 중국이 2,000년도 더 전에 만들어 사용하며 단일 통화권을 구축했다는 의미이다.

시황제는 ‘군현제(郡縣制)’라는 중앙 집권제를 만들었다. 춘추전국 시대에는 각지에서 호족이 할거해 중앙 정부에서 통제할 수 없었다. 시황제가 중국이라는 국가 전체를 중앙 정부가 일괄적으로 관리하는 체제로 개편한 것은 그런 연유에서였다. 시황제의 과단성 있는 통합 덕분에 경제 활동에 걸림돌이 되는 갖가지 불필요한 장벽이 없어졌다. 요컨대 시황제의 정책으로 상업 활동에 뒤따르는 여러 비용이 큰 폭으로 절감된 셈이다. 중국 상품은 단일 시장에서 유통되기 시작했고 그 시장은 국가 권력의 강화로 이어졌다. 이는 국가가 시장에 개입해 상품 흐름(물류)을 촉진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어졌다. 이 정도의 대규모 경제 정책은 당시 유럽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시황제의 정책이 너무도 가혹했기에 진 왕조는 고작 15년 뒤인 서기전 206년에 멸망했다. 이후 항우와 유방이 패권을 다투었고 최종적으로 유방이 승리해 서기전 202년에 한(漢) 왕조가 탄생했다. 한은 당연히 진과 반대되는 국가를 세웠고 진의 군현제와 봉건제를 절충한 군국제(郡國制)를 채택했다. 유방은 자신을 위해 싸워준 제후의 공적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직할지에는 중앙 집권제인 군현제를, 그 외 지역에는 지방 분권제인 봉건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한나라 6대 황제 경제(景帝)는 제후의 권력을 빼앗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 이에 반발한 제후들이 서기전 154년에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을 일으켰다. 오초칠국의 난은 석 달 만에 진압되었고 경제의 뒤를 이은 무제(武帝)의 치세에 이르러 제후의 힘은 약해지고 군주 독재체제가 강화되었다.

진에서 한의 무제에 이르는 80여 년은 황제 독재, 즉 중앙 집권 정책의 역사로 이 정책을 시작한 인물은 진의 시황제, 완성한 인물은 한의 무제였다. 이 정책은 경제적으로는 단일 시장 탄생을 지향점으로 삼았으며, 시황제부터 무제까지 100여 년에 걸쳐 중국은 경제 성장에 적합한 제도를 착실히 갖추어 나갔다. 이렇듯 유럽에서 단일 경제공동체 EU가 만들어지기 무려 2,000여 년 전 중국에는 이미 강력한 단일 시장이 탄생했던 셈이다.

오랜 세월 중국 문명이 장악하고 있던 경제적 패권과 세계사의 중심축이
15세기 이후 유럽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이 아시리아 제국에 통합되며 오리엔트 세계가 탄생했다. 동시대에 유럽은 변방에 머무르며 나름대로 독자적인 문명을 이룩했다.

유럽 문명은 지중해에서 태동했다. 지중해 세계의 주역은 고대 그리스인, 페니키아인, 고대 로마인이었다. 지금껏 페니키아인의 중요성이 과소평가되곤 했는데, 지중해 세계를 하나의 상업권으로 통합한 이가 바로 페니키아인이다. 7세기 무렵 이슬람이 하나가 된 지중해 세계를 침입했다. 이슬람이 유럽에 들어옴으로써 지중해는 더 큰 이슬람 세계의 일부로 기능했다. 중세 유럽의 세계는 이슬람 세력에 둘러싸인 보잘것없는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
바이킹의 활약으로 유럽의 북부와 남부, 즉 북해와 발트해와 지중해가 하나의 상업권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유럽의 경제력은 아시아와 비교해 한참 뒤처졌다. 유럽에 상승 기운이 형성되며 역전의 발판이 마련된 것은 15세기 말 대항해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대항해 시대의 첫 주자 포르투갈이 희망봉을 돌아 아시아로 향하는 경로를 개척하면서부터 유럽은 맹렬한 속도로 아시아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 이미 이탈리아가 향신료를 수입했다고는 해도 동남아시아의 말루쿠 제도에서 아시아 상인, 이슬람 상인의 손으로 홍해까지 운송된 제품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럽으로 운송하는 단순한 ‘전달자’의 역할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신항로 개척 이후 유럽은 선박에 상품을 가득 싣고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에 활발히 진출했다. 유럽인은 해로를 통한 물류를 야금야금 장악하더니 마침내 거대한 해상 경제권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그들은 서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신세계로 데려와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사탕수수를 재배해 생산한 설탕을 전 세계에 내다 팔았다. 대서양 경제 개발로 유럽에 설탕과 커피 등의 소비재가 수입되었고 유럽인의 생활은 한층 풍요로워졌다.

유럽은 구텐베르크 혁명으로 지식과 정보의 독점을 막아 시장 진입 장벽을 낮추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유럽에는 자유롭게 경제 성장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유럽은 본격적인 대외 진출과 함께 유럽의 상업 체계를 수출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유럽은 세계의 경제 메커니즘을 유럽에 유리한 방향으로 재편성한 셈이었다.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유럽인은 대서양, 인도양, 동남아시아에 진출해 시장을 장악하고 엄청나게 부를 늘려갔지만 아시아 상인은 희망봉을 돌아 유럽과 대서양에 진출하는 일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아시아 상인의 유통망은 유럽 상인의 유통망에 비해 훨씬 작게 형성되었고 거의 아시아권 내부에만 머물다시피 했다. 이러한 아시아 상인의 소극적인 자세가 이후 유럽과 아시아의 결정적 차이를 만든 셈이었다.

세계사의 중심축은 어떻게 이동해왔으며, 향후 어떻게 이동해갈 것인가?
세계사의 중심축은 다시 아시아로 넘어올 것인가?


영국은 식민지에서 재배한 면화를 본국으로 가져와 완성품인 면직물로 가공하는 체제를 마련함으로써 산업화를 동력으로 한 성공 가도를 달렸다. 영국은 증기선을 보급해 세계의 시간 거리를 좁혔고 ‘보이지 않는 무기’인 전신으로 세상을 더욱 가깝게 만들었다. 18세기 무렵 영국인은 세계 경제가 발전할수록 수수료 수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시스템을 완성한 것이다. 바야흐로 영국은 세계의 경제 패권을 거머쥔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지만 제1?2차 세계대전 이후 급속히 힘을 잃었다.

뒤이은 미국은 영국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세계 경제를 지배했다. 미국은 자국의 힘과 더불어 수많은 국제기관과 거대 다국적 기업을 이용해 세계 경제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로써 미국은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엄청난 성공을 이루었고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미국의 승승장구에도 브레이크는 있었다. 1970년대부터 미국 경제는 눈에 띄게 활력을 잃게 되면서 강력히 유지되어 왔던 경제 패권은 시나브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제 세계사의 중심축은 어디로 이동할까? 수천 년 동안 우위를 점하다가 15세기에 이르러 역전당한 아시아가 다시 패권을 차지할 수 있을까? 세계사의 중심축을 유럽과 미국의 뒤를 이어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각 나라는 유럽과 미국이 구축해놓은 시스템 안에서 빠르게 경제 성장을 이루며 정상을 향해 줄기차게 나아갔지만 패권을 되찾기에 아직은 역부족인 상황이다.

세계 경제가 하나로 통합되어 세계 시장에 영향을 받지 않는 지역이 거의 없게 된 것은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나타난 현상이다. 오늘날의 세계는 단순히 하나로 통합된 정도에서 한발 더 나아간, 전 세계가 그야말로 하나의 운명 공동체가 된 모습이다.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전 세계가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하는 시대, 서로 긴밀하게 영향을 주고받는 시대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발생한 전염병이 곧 나의 문제가 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점점 더 짧아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지 않을 방법도 없다. 이에 더해 산업화를 기반으로 한 경제 성장의 부작용으로 전 세계의 심각한 위기 상황을 초래한 환경오염 문제를 보면 우리는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살아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저자는 현대 사회를 지탱하는 경제 시스템, 산업화가 중심 역할을 하는 기존의 경제 시스템은 이미 한계를 맞이했다고 진단한다. 또 그는 전혀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시급히 구축해야 할 시기라고 주장한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하나의 운명 공동체가 된 이 세계에서 함께 잘살기 위한 기준, 세계사의 중심축의 패러다임 변화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과연 앞으로 어느 나라, 혹은 어느 문명권이 무엇을 무기로 세계 패권을 장악하고 세계사의 중심축을 형성하게 될까? 이 책에서 작지만 분명한 실마리를, 그리고 세계사의 거대한 흐름과 전 지구적인 세력 판도를 한눈에 조망하는 안목과 통찰력을 얻게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