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한국역사의 이해 (책소개)/4.한국학연구

고구려 광개토왕의 정치와 외교

동방박사님 2022. 8. 1.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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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기존의 광개토왕대에 관한 연구는 ‘고구려의 영역 확장’을 중심에 두고 이루어져 왔다. 반면 광개토왕의 백제정벌과 북중국정벌을 가능하게 했던 국제정세는 간과된 측면이 있다. 때문에 신정훈 교수는 광개토왕대 무렵의 북중국지역과 몽골지역의 정세에 대한 검토가 우선된 후에, 광개토왕의 정치와 외교 활동을 들여다 볼 때에야 실제 역사상이 드러나며, 이 책은 그 연구의 결과이다.

목차

책을 내면서

제1장 고구려 廣開土王의 백제 정벌이 가진 의미에 대하여-392~394년을 중심으로-
Ⅰ. 머리말
Ⅱ. 광개토왕 즉위 무렵의 주변정세와 백제정벌
Ⅲ. 393~394년 북중국·몽골 지역의 정세와 고구려·백제의 공방
Ⅳ. 맺음말

제2장 고구려 廣開土王代의 稗麗 征討와 後燕과의 冊封이 가진 의미
Ⅰ. 머리말
Ⅱ. 고구려의 패려 정벌이 가진 의미
Ⅲ. 고구려와 후연의 책봉이 지닌 실제적 의미
Ⅳ. 맺음말

제3장 동아시아의 정치적 정세와 고구려의 동향-397년(廣開土王 6)~400년(廣開土王 9)을 중심으로-
Ⅰ. 머리말
Ⅱ. 397년(광개토왕 6)~398년(광개토왕 7) 後燕·百濟의 정세와 高句麗의 국력 비축
Ⅲ. 399년(광개토왕 8)~400년(광개토왕 9) 後燕의 약화와 고구려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대
Ⅳ. 맺음말

제4장 401년(廣開土王 10)~404년(廣開土王 13) 동아시아의 정세와 고구려의 동향
Ⅰ. 머리말
Ⅱ. 401년(광개토왕 10)~402년(광개토왕 11) 北魏·後秦의 격돌과 고구려의 동향
Ⅲ. 403년(광개토왕 12)~404년(광개토왕 13) 後燕 慕容熙의 失政과 고구려의 동향
Ⅳ. 맺음말

제5장 405년(廣開土王 14)~407년(廣開土王 16) 동아시아의 정세와 고구려의 동향
Ⅰ. 머리말
Ⅱ. 405년(광개토왕 14)~406년(광개토왕 15) 後燕의 契丹·高句麗 공격과 고구려의 대처
Ⅲ. 407년(광개토왕 16) 후연의 멸망과 고구려의 백제 공략
Ⅳ. 맺음말

제6장 東晉의 北進과 고구려의 대응
Ⅰ. 머리말
Ⅱ. 南燕 慕容超 시기의 정치적 불안정과 고구려의 남연에 대한 千里人·千里馬 공헌
Ⅲ. 高句麗 長壽王의 東晉에 대한 朝貢과 冊封
Ⅳ. 맺음말

보론1 백제 枕流王·辰斯王代의 정국과 고구려의 동향
Ⅰ. 머리말
Ⅱ. 침류왕대의 주변 국제정세와 고구려의 요동 장악
Ⅲ. 진사왕대의 정국과 고구려와의 공방
Ⅳ. 맺음말

보론2 신라 瑞鳳塚의 銀盒 연대와 그 築造時期에 대한 신 검토-역사적 맥락과 관련하여-
Ⅰ. 머리말
Ⅱ. 은합의 연대에 대한 견해와 분석-故國壤王 8年의 기사와 관련하여-
Ⅲ. 역사적 맥락에서 본 서봉총의 축조연대
Ⅳ. 맺음말

참고문헌
 

저자 소개 

저 : 신정훈
 
1965년 생. 여의도고등학교 졸업, 서강대학교 사학과 졸업, 연세대학교 대학원(문학석사), 중앙대학교 대학원(문학박사), 중앙대학교 한국교육문제연구소 전임연구원, 중앙대학교 인천대학교 가천대학교 서울예술대학교 강사, 서울대학교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구축사업 해제원, 택민국학연구원 연구교수 현재 초당대학교 교양교직학부 교수 논저_ 『8세기 신라의 정치와 왕권』(한국학술정보), 『한국 고대의 ...
 

출판사 리뷰

기존의 광개토왕대에 관한 연구는 ‘고구려의 영역 확장’을 중심에 두고 이루어져 왔다. 반면 광개토왕의 백제정벌과 북중국정벌을 가능하게 했던 국제정세는 간과된 측면이 있다. 때문에 신정훈 교수는 광개토왕대 무렵의 북중국지역과 몽골지역의 정세에 대한 검토가 우선된 후에, 광개토왕의 정치와 외교 활동을 들여다 볼 때에야 실제 역사상이 드러나며, 이 책은 그 연구의 결과라고 말한다.
광개토왕이 즉위한 392년에 고구려는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전의 국제관계에서 고구려는 고국원왕(331~371)대에 선비족이 세운 전연과의 전쟁에서 크게 패했다(342). 수도가 함락되고 왕의 어머니와 왕비, 5만 명의 고구려인들이 전연으로 끌려갔다. 그뿐 아니라, 371년에 고국원왕이 평양에서 백제와의 전투 중에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이렇게 고구려는 서북쪽과 남쪽에서 강력한 적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이들 적대국에 비해 우세한 군사력을 가지지 못했다.
이런 세력관계는 몇 십년 동안 계속되었다. 고구려는 고국양왕 2년(385) 6월에 4만 명의 대군을 동원해 요동을 획득했지만 그해 11월에 전연의 뒤를 이은 후연에게 요동을 빼앗겼다. 고구려는 그때까지 전연과 후연과의 전쟁에서 단 한 번의 승리도 거두지 못하였다. 고구려는 백제와의 관계에서는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소수림왕 5년(375) 7월에 고구려는 백제의 수곡성을 함락했다. 그러나 390년 백제 진사왕은 달솔 진가모를 사령관으로 해 고구려를 공격했고, 고구려의 도곤성이 함락되고 200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고구려가 서북방의 전연·후연과의 전쟁에서는 일방적인 패배를 당했으며, 남방의 백제와는 치열하게 대립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광개토왕이 즉위한 것이다. 광개토왕이 당면한 목표는 후연과 백제, 두 적대세력 중 한 세력의 기세를 꺾어놓는 것이었다.
광개토왕은 두 적대국 중 상대적으로 약한 적인 백제를 먼저 공격하려 했다. 여기에는 고국원왕이 전사한 것에 대한 보복이라는 목표도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전쟁에 필요한 전비(戰費)와 말이 필요하였다. 395년, 광개토왕은 패려(거란)을 정벌했는데 이는 소수림왕대에 거란이 침공해 고구려인들을 끌고 간 것에 대한 응징이기도 했다. 이 정벌로 고구려는 수많은 소와 말, 양들을 얻음으로써 백제와의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와 인원을 충분히 확보하게 되었다.
396년 광개토왕은 수군을 동원해 아리수(한강)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한강변에 있는 풍납토성에서 고구려군에 포위된 백제 아신왕은 광개토왕에게 노객(奴客:노예 같은 손님)이 될 것을 맹세하고 항복했다. 이로써 광개토왕은 백제의 58개 성과 7백개 촌을 획득해, 인적자원과 수취자원을 확대했다.
이어 광개토왕은 400년 주로 만주지방에 있던 5만 명의 보병과 기병을 신라로 보내 신라 영토에 침입한 왜를 무찔렀다. 이 왜(倭)는 한반도 남부에 있던 가야인들이 왜 지역에 세운 정치집단이었다. 4~5세기에 우수한 철기문화를 가진 가야인들이 왜 지역으로 집단적으로 이주했고, 이들은 청동기 문화를 가진 일본열도의 원주민을 쉽게 정복하고 왜라는 정치집단을 만들었던 것이다.
400년 이후 고구려군은 가야의 근거지인 낙동강 하류지역까지 진출했다. 이때 본가야는 큰 타격을 받고 가야인들은 본격적으로 왜 열도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 무렵 왜 지역에서 발견되는 가야 계통의 스에키 토기와 철제 갑옷, 철제 칼이 가야인들의 이주를 말해준다. 결국 고구려군이 낙동강 하류까지 진출함에 따라 가야가 타격을 입었고, 가야의 전통적인 우방이었던 백제 역시 타격을 받아, 고구려에 대한 설욕은 엄두도 낼 수 없게 되었다.
고구려군의 원정은 한반도 남부의 역학관계에 대변혁을 가져왔다. 고구려군의 원정 이전까지 가야는 신라보다 군사력이 우세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이 가야를 약화시킴으로써, 신라는 이 지역의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한편 북중국 후연과의 관계에서, 385년 고구려는 후연에게 요동을 빼앗긴 후 후연과 아무런 교섭이 없이 잠재적인 적대국으로 서로 국경을 접하며 대립하고 있었다. 광개토왕은 396년에 후연과 책봉관계를 맺어, 평주목(平州牧) 및 요동과 대방의 국왕으로 책봉되었다. 조공-책봉관계의 전통적인 이론에 따르면, 후연 모용보가 황제로서 광개토왕을 신하로 책봉한 것이 된다.
그런데 396년을 전후해, 동아시아에서는 격변이 진행되고 있었다. 선비족이 세운 북위가 무서운 기세로 뻗어나가, 기존의 강대국이었던 후연과 접전을 벌였다. 395년에 일어난 참합피(參合陂) 전쟁에서 북위는 후연군을 대파했다. 이런 가운데 396년 모용보가 후연 황제로 즉위했지만, 후연의 백성 가운데 반란을 생각하는 자가 열에 아홉일 정도로 내정이 크게 혼란스러웠다.
모용보가 즉위하고 2개월 후인 396년 6월 북위는 다시 후연의 광령(廣?)을 공격해 승리한 데 이어 10월에는 상산(常山)에서부터 그 동쪽에 있는 군과 현들을 모두 점령했다. 이런 대위기 속에서 후연은 고구려 광개토왕을 책봉한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가 후연에게 군사적으로 열세여서 책봉 받은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요동지역의 영유권 문제이다. 광개토왕은 후연의 모용보로부터 요동왕으로 책봉받았다. 이 점은 고국양왕대에 후연과의 전쟁에서 상실했던 요동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장차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관계는 400년 2월 후연의 모용성이 고구려의 700리 땅을 빼앗음으로써 끝났다. 당시 후연의 공격이 성공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만주에 있던 고구려군 5만 명이 신라를 돕기 위해, 한반도 남부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402년 5월, 남방을 평정한 고구려 광개토왕은 이제 후연의 숙군을 공격했다. 이에 평주자사 모용귀는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후연은 모용성의 뒤를 이어 정신적 문제가 있는 모용희가 즉위하면서 능묘 조성에 국가재정을 탕진하고, 백성들을 과다한 노역에 동원하는 등 재정 악화와 민심의 이반으로, 407년 7월에 쿠데타가 일어나 모용희는 살해되고 후연은 멸망했다.
407년에 호각지세를 다투던 후연이 멸망하고, 후연의 뒤를 이은 북연은 모용희 재위시의 국력 피폐가 이어졌다. 또한 당시 탁발규의 북위 내정도 불안했다. 남중국의 동진(東晋)은 410년 2월 남연을 멸망시켰다. 고구려는 동진의 북진에 주목하고 외교적 교섭을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413년 고구려 광개토왕은 사망하고 장수왕이 즉위하자,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고 조공을 바쳤다. 동진은 이에 대해 장수왕을 ‘고구려왕 낙랑군공’으로 책봉했다. 고구려와 남쪽으로 국경을 접한 백제는 전지왕 치세에 정치적 불안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신라는 고구려의 정치적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제 북중국과 한반도 정세는 고구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고구려 두 개의 강력한 적에게 끼여 있다는 공포감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고구려의 국부도 크게 증대되어갔다. 거란정벌로 소와 말, 양을 꾸준히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백제를 공파해 얻은 한반도 중부지역의 백성들과 조세 수입 역시 상당한 것이었다.
414년 9월 29일 장수왕은 『광개토왕릉비』를 건립했다. 그 시기까지 건립된 비석 중 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것이었다. 『광개토왕릉비』에는 ‘영락(永樂)’이라는 광개토왕의 연호가 새겨져 있다. 동진의 연호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 점은 고구려가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세계를 가졌음을 보여준다. 『광개토왕릉비』는 이때의 상황을 ‘국부민은’(國富民殷: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잘 살았다)으로 표현하고 있다. 진정 ‘고구려의 전성기’라 부를 만한 시기였다.
광개토왕은 재위 22년간 고구려를 둘러싼 사방의 적을 격파하면서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 거의 2~3년에 한번꼴로 원정도 계속하였다. 그전까지 북쪽과 서쪽의 영토를 두고, 부여와 선비족, 한족들과 싸워왔던 데서 벗어나 한반도 남진정책을 펼쳤고, 고구려를 수세에서 공세적 위치로 변화시켰다. 광개토왕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국경을 맞대던 나라들과 한반도 정세를 변화시켰다는 점이다. 북서쪽의 후연은 멸망하고, 남쪽의 백제는 약화되었다. 이제 더 이상 고구려인들은 두 개의 강력한 세력에 끼여 있지 않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다음 세기에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간 전쟁이 치열해지는 계기, 한국 고대국가 체제의 틀을 변화, 발전시키는 큰 원인이 되었다.
이 책이 광개토왕대의 고구려를 둘러싼 동아시아 정세의 격변과, 변화의 물결에 대한 훌륭한 리더의 대응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역사상을 통해 제대로 파악하는 데 유용한 디딤돌이 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