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폭력연구 (책소개)/1.국가폭력

대구10월 폭동 / 제주 4.3사건 / 여순반란사건

동방박사님 2022. 8. 3.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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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해방공간의 남한 사회를 강타한
좌익들의 폭동·반란 3종

1946년 10월 1일의 대구 폭동, 1948년 4월 3일 일어난 제주폭동,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서 발생한 여수·순천 반란사건은 해방공간에서 대한민국의 탄생을 폭동과 반란을 통해 저지하고자 스탈린과 소련공산당, 그의 충실한 하수인인 김일성, 그리고 남로당 괴수 박헌영과 남한 내 좌익들이 합작하여 일으킨 폭동·반란 3종 세트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 사회가 좌회전하면서 미증유의 살육극이 벌어졌던 폭동·반란 3종 세트의 용어가 완전 세탁되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탄생과 건국을 방해하고자 했던 폭동 주모자와 반란자들이 마치 통일 조국 건설을 위해 싸우다 희생된 영웅인 양 예우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이 뒤집혀지고 있는 현대사의 광란 속에서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의 추적을 통해 폭동·반란의 본질을 제기한 문제의 저작이 바로 이 책이다.

 

목차

머리말 : 반란사건 제대로 보기
1부 한국, 공산주의의 세례를 받다
2부 1946년 10월 1일, 대구의 비극
3부 피로 물든 제주
4부 국군 제14연대, 대한민국에 반역하다
5부 축복으로 끝난 비극

저자 소개

저자 : 김용삼
대전고, 중앙대 문예창작과, 경남대 북한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조선일보 기자, 시사월간지 [월간조선] 편집장, 경기도 대변인, 경기콘텐츠진흥원 감사를 역임했다. 월간조선 기자로 활동하며 50여 개국 현지취재를 통해 전·현직 국가원수 네 명을 특종 인터뷰했다. 현재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기획실장, 격월간 잡지 [박정희정신] 편집장으로 활동 중이다. 황장엽 망명사건 특종보도로 제1회 대한민국 언론상 수상, 2008년 ...
 

책 속으로

1945년부터 힘겹게 진행된 대한민국 건국 및 국가건설의 세계사적인 키워드는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 즉 반공 투쟁의 살아 있는 역사다.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중국과 몽골, 인도차이나 반도를 휩쓸며 질풍노도처럼 밀려오는 공산주의의 거센 공격을 이승만은 경찰과 군대를 강화하여 온몸으로 막아냈다. 대한민국은 유라시아 대륙을 붉게 물들인 공산주의의 기세등등한 진격을 휴전선에서 막아냄으로써 세계사에서 공산주의에 대해 통렬한 승리를 기록한 경이와 기적의 존재가 됐다.
오늘날 좌파들과 공산주의 신봉자들이 ‘반공’이란 말만 나오면 집단 히스테리 증세를 보이는 이유를 냉정하게 분석하면 해방 후부터 건국 초기의 혼란기에 한반도 전체를 손쉽게 공산화할 수 있었는데, 고집쟁이 영감(이승만)의 강력한 반공주의 때문에 실패했다는 자책감, 자괴감의 발로 아닌가.
--- p.9

공산주의와의 싸움에 있어서는 당대 최고의 이론적 기반과 승리의 비법을 보유한 이승만이기에 반공을 위해 일본 제국주의의 때가 덕지덕지 묻은 경찰과 군인, 관료들까지 총동원하고, 유엔을 움직이고, 적당히 휴전으로 미봉하고 떠나려는 미국의 뒷다리를 붙잡고 늘어져 공산군의 남침을 원천 봉쇄하는 한미동맹의 원대한 포석을 놓는 데 성공한다. 그 대가로 이승만이 미국에 제공한 것은 “우리는 휴전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종이 한 장이었다.
--- p.10

민주주의 이론의 대가인 로버트 달을 비롯한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자유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1인당 국민소득 4,000~7,000달러 정도의 물적 기반, 잘 교육된 탄탄한 중산층, 그리고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민주시민교육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한다.
대한민국이 1인당 국민소득 4,000~7,000달러에 이른 시기는 전두환 정권 말기에서 노태우 정부 시기였다. 바로 이 시기에 이 나라가 민주주의 시대로 이행한 것은 학자들의 연구 결과와 일치한다.
그전까지, 특히 건국 초기는 공산세력과 국가의 존망을 놓고 생존을 건 싸움을 할 수밖에 없는 극한의 시기였다. 아직 국가로서의 기초가 취약한 최악의 혼란기에 국가 전복을 획책하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투쟁을 위해 사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이 와중에, 즉 신생 국가가 망하든 말든 일제 출신 군인과 경찰관을 당연히 척결했어야 마땅하다는 좌파들의 철부지 주장은 치안과 안보를 총체적으로 취약하게 만듦으로써 남한이 공산화되건 말건 상관없다는 주장으로 해석될 소지가 없지 않다.
--- p.12

당시 국공내전은 미군과 소련군의 대리전쟁 양상으로 전개됐다. 1946년 5월 팔로군이 장제스 군대에게 참패한 것은 미국의 지원 때문이라고 판단한 스탈린은 이에 대한 복수를 위해 박헌영에게 남한의 미군정을 상대로 난폭한 폭력 활동을 전개하도록 「신전술」 지령을 내린 것이다. 박헌영이 「신전술에 대한 지시서」를 발표하자 조선공산당은 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행동지침을 내렸다.
“주로 우익 정당에게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우던 것을 미국으로 그 초점을 바꾸어 미군정을 ‘조선인민을 노예화하기 위해 미국이 설치한 기관’으로 공격해야 한다. 그리하여 장래에 미소공위 지연의 책임을 단지 우익 인물들뿐 아니라 미국 대표 측의 국제적 반동 전략 역시 나눠지게 해야 한다.”
--- p.62

남로당은 1947년경부터 박헌영 이하 대부분의 수뇌급 간부들이 월북했는데, 그중 극소수의 인원이 평양 정권에 참여했을 뿐 대다수는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따라서 실질적으로는 당의 중추부가 북으로 이동하여 북로당에 합류된 상태였다. 그들은 북한 당국으로부터 식객 취급을 받아 평양에서 멀리 떨어진 해주에 집결하여 무위도식하고 있었다.
남로당이 북한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들의 노력으로 남한 내에서 ‘주목할 만한 투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김점곤은 남로당이 김일성으로 하여금 남침전쟁을 결심하도록 하기 위해 이에 호응할 수 있는 자신들의 정치적·군사적 기반이 남한에 구축되어 있다는 사실을 북로당 권력층에게 보여주기 위해 남한에서 무력투쟁을 벌이라고 지시했다고 지적한다.
--- p.112

박헌영을 위시한 남로당 지도부가 월북하면서 자신들의 지지기반이었던 남한으로부터 분리되었고, 지도부를 상실한 남로당은 소멸 시기가 언제냐의 문제만 남은 상황이었다. 남로당은 조직 재건을 위해, 그리고 이승만 정권에 대항하기 위한 빨치산 투쟁 역량을 축적하기 위해 평양 근처의 강동정치학원에서 빨치산 간부를 양성하여 군사적 대결을 준비했다.
--- p.140

반란사건 여파로 숙군작업이 계속되어 1949년 7월에 일단 종료되었는데, 이 시기까지 총 4,749명의 장교와 하사관, 사병들이 사형·유기징역·불명예제대 등의 처벌을 받았다. 또 숙군 조사 과정에서 체포 위험이 닥치자 군 내부의 남로당원 및 좌익 적색분자 5,568명이 탈영했다. 군 총병력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1만 317명이 좌익 공산세력이거나 그와 관련이 있는 세력이었다는 뜻이다.
좌익 공산세력을 솎아낸 자리는 훈련된 우익 청년들과 월남한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원들이 입대하여 메웠다. 1948년 12월 20일 서북청년회 위원 200명이 대전 제2여단에 입대했고, 대동청년단원 4,000명이 경찰에 들어갔다. 국군은 청년단들로부터 병사들을 충원 받아 1949년 3월 현재 6만 9,000명으로 증강되었다.
--- p.268

14연대 반란사건을 계기로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반공국가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의 반공을 위한 강력한 의지는 1948년 12월 1일, 법률 제10호로 국가보안법이 제정되고, 12월 20일 공포되는 것으로 표출되었다.
국가보안법은 반란의 단계에 이르지 않더라도 반란을 꾀하는 단체의 구성이나 이적 행위만으로도 처벌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은 14연대 반란사건으로 공산 반군의 위험성과 무서움을 뜨겁게 체험한 이승만 정부가 비상시에 위험을 사전 제거하기 위한 예방적 조치가 가능하도록 한 특별형법이었다.
--- p.253

14연대 반란사건 참여자들은 대한민국의 국민 되기를 거부하고 조선인민공화국에 충성하며, 무상몰수·무상분배에 의한 토지개혁을 주장하고 나섰다.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 대한민국 법령을 인정하지 않고, 정권을 부정했으며, 공산주의를 해야 한다고 무장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었으니 이승만 정부에겐 ‘내부의 적’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 p.325
 

출판사 리뷰

14연대 반란사건 참여자들은 대한민국의 국민 되기를 거부하고 조선인민공화국에 충성하며, 무상몰수·무상분배에 의한 토지개혁을 주장하고 나섰다. 대한민국 영토 내에서 대한민국 법령을 인정하지 않고, 정권을 부정했으며, 공산주의를 해야 한다고 무장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었으니 이승만 정부에겐 ‘내부의 적’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의 법학자 칼 슈미트는 정치의 핵심은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14연대 반란사건을 계기로 ‘외부의 적’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내부의 적’이란 사실도 확실하고 분명하게 밝혀졌다. 신생 대한민국은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생존을 위해 공산세력과 처절한 전쟁을 벌여야 했다.
자신들의 체제를 부정하고 적의 승리를 돕는 내부의 적을 “같은 민족이니까” 하며 구경만 할 정신 나간 정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적을 먼저 타도하지 못하면 내가 타도당하는 것이 전쟁터의 살벌한 교훈이다.

중국의 국공내전 과정에서 장제스의 국부군 군대가 마오쩌둥의 군대에 쉽게 무너진 가장 큰 원인은 군 내부에 침투한 공산당의 책동 때문이었다. 미국이 제공한 최신 무기와 장비로 무장한 장제스의 국부군은 내부에 공산당이 대대적으로 침투하여 사기를 저하시키고, 인민해방군을 만나면 싸우지도 않고 미국이 제공한 무기와 장비를 가지고 집단 투항한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14연대 반란은 비극으로 점철된 사건이었지만, 한편에선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계기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숙군작업을 통해 군부에 침투한 붉은 세력을 거의 대부분 제거함으로써 대한민국 국군은 6·25 남침을 당했을 때 와해되지 않고 용맹하게 싸워 이 나라를 구해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14연대 반란(여·순 반란)사건은 존 메릴이 말한 것처럼 ‘축복으로 끝난 비극’이었다.
-본문 중에서

1946년 10월 1일의 대구 폭동, 1948년 4월 3일 일어난 제주폭동,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서 발생한 여수·순천 반란사건은 해방공간에서 대한민국의 탄생을 폭동과 반란을 통해 저지하고자 스탈린과 소련공산당, 그의 충실한 하수인인 김일성, 그리고 남로당 괴수 박헌영과 남한 내 좌익들이 합작하여 일으킨 폭동·반란 3종 세트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 사회가 좌회전하면서 미증유의 살육극이 벌어졌던 폭동·반란 3종 세트의 용어가 완전 세탁되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탄생과 건국을 방해하고자 했던 폭동 주모자와 반란자들이 마치 통일 조국 건설을 위해 싸우다 희생된 영웅인 양 예우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이 뒤집혀지고 있는 현대사의 광란 속에서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의 추적을 통해 폭동·반란의 본질을 제기한 문제의 저작이 바로 이 책이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잡기 위해 기획된 『대구 10월 폭동/제주4·3사건/여·순 반란사건』은 대구 폭동, 제주 폭동, 여·순 반란사건이 벌어진 해방공간의 시대상을 면밀 분석하고, 발생원인과 진행경과, 후폭풍을 정밀 복기하여 이 세 사건이 스탈린의 지령과 남북 공산주의자들의 합작품이란 사실을 증명해내고 있다.
특히 이 책에서 저자는 해방 직후 남한 사회가 급격히 좌경화된 이유로 여운형이 정권을 이양받는 조건으로 조선총독부의 엔도 류사쿠(遠藤柳作) 정무총감에게 받아낸 정치범의 석방과 식량 배급권을 지적하고 있다. 여운형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1945년 8월 16일 오전 9시, 일제하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 수감된 1만여 명의 사상범이 일시에 석방되면서 남한 사회는 순식간에 좌익으로 기울어졌다.

또 남로당들이 격렬한 폭력 투쟁 전술로 이행한 문제와 관련하여 1948년 2월 19일부터 인도의 캘커타(현 콜카타)에서 열린 ‘동남아 청년대회’를 주목한 부분은 의미심장하다. 이 회의를 통해 모스크바로부터 캘커타 회의에 참여했던 각 나라들에 무장투쟁이 지령되었고, 소련은 각국의 무장투쟁을 적극 지원했다.
캘커타 회의에서 소련은 동남아의 공산주의자들과 직접 접촉을 함으로써 회의 이후 수개월 내외에 말레이반도, 미얀마(현 미얀마),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일대와 한국에서 일제히 일어난 무장투쟁은 모스크바의 명령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지금까지 북한을 비롯하여 좌파 학계에서는 여·순 반란사건은 남로당이나 북한의 조직적인 지도하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14연대의 좌익 맹동분자들이 일으킨 사건이라고 발뺌을 해왔는데, 그로부터 두 달 후 발생한 제주 폭동, 8개월 후 벌어진 여·순 반란사건이 캘커타 회의와 어떤 연계가 있는지 학계의 연구를 자극하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임동원의 연구에 의하면 1948년 2월부터 1950년 4월까지 남로당의 폭력투쟁으로 인한 피해는 사망 3만 6,000명, 부상 1만 1,000명, 가옥 손실 5만 호와 이로 인한 피해자가 31만여 명에 달했다. 해방 후 한국의 상황을 연구한 브루스 커밍스는 빨치산 투쟁이 절정에 달했던 1949년 10월 무렵 빨치산 규모는 8만 9,900여 명, 빨치산의 출몰 횟수는 1,330회나 되었다고 추산했다. 14연대 반란사건이 발생한 1948년 10월부터 1949년 8월 사이에 전개된 빨치산 토벌작전에서 빨치산 9,500여 명이 사살, 부상 또는 생포되었다.

14연대 반란은 비극으로 점철된 사건이었지만, 한편에선 새옹지마의 계기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숙군작업을 통해 군부에 침투한 붉은 세력을 거의 대부분 제거함으로써 대한민국 국군은 6·25 남침을 당했을 때 와해되지 않고 용맹하게 싸워 이 나라를 구해냈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 14연대 반란사건은 존 메릴이 말한 것처럼 ‘축복으로 끝난 비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