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사회학 연구 (책소개)/5.노동문제

생명을 짜 넣는 노동

동방박사님 2022. 8. 29.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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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철학자 고병권과 함께 마르크스의 『자본』을 공부하는 프로젝트 [북클럽『자본』] 시리즈의 다섯 번째 책 『생명을 짜 넣는 노동』이 출간되었다. 이번 책에서는 마르크스의 『자본』 제3편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의 일부(제5~7장)를 꼼꼼히 분석한다. 흥미롭게도 고병권은 이 책을 위화의 소설 『허삼관 매혈기』로 연다.

이번 책에서 다루는 『자본』 제3편 제5장(영어판은 제7장)의 제목은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이다. 제목만 보면 마치 두 개의 과정을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의 생산과정(노동과정이 곧 가치증식과정)을 마르크스가 두 개의 다른 ‘제목’으로 쓴 것이다. 이는 마르크스의 의도적 ‘서술순서’에 따른 것으로, 이번에도 그는 동일한 과정에 대해 해석을 두 번 한다. 한 번은 ‘현물’[사용가치]을 생산하는 노동과정으로, 다른 한 번은 ‘가치’를 생산하는 가치증식과정으로.

노동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이 책 『생명을 짜 넣는 노동』을 마무리하면서 저자 고병권은 ‘논전’이 시작되었음을 선포한다. 마르크스의 『자본』에서 주장과 항변 형식의 논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하나의 목소리와 또 하나의 목소리가 부딪치고 있다. 아직 전면화하지 않았지만 양쪽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한 목소리가 ‘잉여가치율’이나 ‘이윤율’이라 부르는 것을 다른 목소리는 ‘착취도’라고 부른다. 잉여노동의 시간을 ‘이윤’이라 부르는 사람과 ‘착취’라고 부르는 또 한 사람.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목차

저자의 말-노동자 매혈기

1 인간과 꿀벌-합목적적 노동
· 우리는 거의 소가 되어야 한다 · 노동은 합목적적 활동 · 건축가가 꿀벌보다 나은가

2 죽은 것들을 살려내다-살아 있는 노동
· 생산수단?노동대상(원료)과 노동수단 · 생산수단에 깃든 과거의 목소리 · 노동의 마법과 사물의 환생

3 자본가의 통제 아래서-소외된 노동
· 노동과정은 노동과정이다, 그런데…… · 자신의 통제 vs. 자본가의 통제 · 노동자는 어떻게 에일리언이 되는가 · 노동자는 왜 동물로 돌아갔을 때 행복한가 · ‘소외’는 『자본』에서도 중요한 주제

4 요술의 성공, 마침내 탄생한 괴물
- 가치를 늘리는 노동
· 자본가의 관심은 인류 복지가 아니다 · 투입물과 생산물의 가치 분석 · 살아 있는 노동의 또 다른 마법 · 시제를 통합하면 · 생명을 짜서 가치를 더한다
· 막간극?노동의 선물 ·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 ‘노동과정’·‘가치형성과정’·‘가치증식과정’이라는 용어 · 인간임을 확인하려는 노동자의 저항 · 단순노동과 고급노동

5 죽어 있는 것과 살아 있는 것-불변자본과 가변자본
·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개념적 준비물 · 가치형성과 가치이전의 차이 · 생산과정에 머무는 것과 사라지는 것 ·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건네는 선물 · 가변자본과 불변자본

6 동일한 것의 다른 이름?‘잉여가치율’과 ‘착취도’
· ‘가치생산물’과 ‘생산물의 가치’ · 이윤율과 잉여가치율 · 개념의 탄생은 눈의 탄생이다 · 필요노동과 잉여노동 · 무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다 · 야곱과 이스라엘처럼 연습 문제를 풀어보자! · 맨체스터의 어느 공장주 · 계산이 유발하는 환상 · 최후의 ‘한 시간’ · 학문 너머에 있는 것 · 왜 시니어인가 · 목소리 vs. 목소리

부록노트
· I 정신의 왕국과 자본의 왕국
· II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의 구분
· III 사이보그 노동자의 에일리언 되기
 

저자 소개

저 : 고병권
 
서울대에서 화학을 공부했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했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사회사상과 사회운동에 늘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왔다. 오랫동안 연구공동체 ‘수유너머’에서 생활했고 지금은 노들장애학궁리소 회원이다. 그동안 『화폐, 마법의 사중주』, 『언더그라운드 니체』, 『다이너마이트 니체』, 『생각한다는 것』,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그는 마르크스의 『자본』을 1991년에 처음 ...
 

책 속으로

노동하는 인간은 한마디로 인조인간입니다. 인간은 노동대상에 다가서기 전에 먼저 노동수단과 합체합니다. 노동대상을 변형하기 전에 노동수단으로서 자기 자신을 변형시키는 겁니다. 자신의 신체와 노동수단이 거부반응 없이 결합하도록, 그래서 신체기관들끼리 그러하듯 노동수단과도 물질대사가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만듭니다. 노동수단을 또 다른 신체기관화하는 거죠. 노동수단을 자기화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p.38

나 자신이 내게 타인처럼 느껴지는 것을 ‘소외’(Entfremdung)라고 합니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합목적성이 인간의 고유한 자질이 맞는다면 노동의 소외는 이 자질에서 생겨난 인간 고유의 질병입니다. 인간의 자질에서 생겨난 인간의 질병, 한마디로 인간이 인간을 앓는 병이라고 하겠습니다.--- p.59

마르크스는 자본가가 구매한 노동력을 ‘살아 있는 효모’라고 불렀는데요. 실제로는 노동자가 일하지만 자본가 눈에는 자신이 구매한 효모가 일하는 것과 같습니다. 노동과정이란 생체 상품인 ‘살아 있는 효모’(노동력)와 죽어 있는 사물(생산수단) 사이에서 벌어지는 물질대사일 뿐이죠. 효모가 무엇을 만들어내든 생산물은 이 과정을 주관한 유일한 인간, 즉 자본가에게 모두 귀속됩니다. “그러므로 이 과정의 생산물은 마치 포도주 창고에서 일어나는 발효과정의 산물이 그런 것과 똑같이 그에게 귀속된다.” --- p.62

합목적적 노동은 인간의 고유한 자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에서 노동하는 인간은 노동을 하지 않을 때에야 자신을 되찾았다고 느낍니다. 노동할 때는 자신이 마치 남처럼 느껴지고요. 노동 바깥에서 자신을 느끼는 것, 이는 노동이라는 활동이 ‘외화’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노동할 때의 내가 나 같지 않다는 것, 마치 나 자신이 ‘에일리언’처럼 느껴진다는 것은 ‘이방인 되기’라고 할 수 있지요. --- p.66

자본가가 원하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이윤입니다. 그가 마음을 쓰는 것은 인류 복지가 아니라 잉여가치입니다. 새로운 사용가치는 그가 갈망하는 ‘황금알’이 아닙니다. 물론 더 많은 물건을 더 싸게 만들어 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기를 바라는 자본가도 있을 수는 있습니다. 첨단 기술을 사용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쉽게 소통할 수 있는 세상을 바라는 마음에서 스마트폰을 만든 자본가가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자본의 인격적 구현인 한에서 자본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욕망은 자본의 정의 자체입니다. 자본이란 가치를 증식해가는 가치죠. 자본가는 더 많은 물건이 아니라 더 많은 가치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 p.76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살아 있는 노동’의 힘을 확인합니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노동력에는 새로운 가치를 더하면서 과거의 가치를 보존하는 ‘천부적 자질’(Naturgabe)이 있습니다. 가치를 더하는 일을 했을 뿐인데 그것이 가치를 보존하는 일도 된 것이죠. ‘천부적 자질’이라고 했지만, 직역하자면 자연의 선물입니다. 노동자는 자연이 자신에게 건네준 선물을 아무런 대가 없이 자본가에게 건네는 겁니다. --- p.134

이로써 우리는 ‘잉여가치율’이라는 마르크스의 또 다른 개념을 만났습니다. 앞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을 만났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잉여가치’ 개념도 있었지요. 앞으로도 우리는 마르크스의 개념들을 더 만나게 될 겁니다. 모두가 마르크스만의 독특한 개념들입니다. ‘개념’(Begriff)이라는 말에는 ‘붙잡는다’(begreifen)라는 뜻이 들어 있는데요(우리말에는 ‘파악한다’라는 말에 붙잡는다는 뜻이 있지요). 마르크스는 이 개념들을 통해 우리에게 일어난 현상들,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을 붙잡습니다. --- p.150

필요노동의 지점을 넘어선 후의 노동을 잉여노동이라고 했는데요. 노동자의 노동은 달라질 게 없습니다. 노동력을 계속 지출하지요.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지불받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자본가만을 위한 생산 기간이죠. 자본가에게는 이 점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는 노동력의 ‘하루 사용권’을 구매했고 하루 노동을 시켰으니 노동자에게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았다고 생각하겠죠. 그런데 생산과정이 끝나면 잉여가치가 생깁니다. 모든 상품의 가치를 다 지불했는데도 생긴 이득이죠. 그는 잉여가치의 정체가 잉여노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모든 지불이 끝났기 때문에 마치 무에서 세상을 창조한 신처럼 자본이 어떤 창조력을 발휘했다고 생각하겠지요. --- p.154

실제로 어떤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기도 할 겁니다. 원료 값과 기계 값 등 이런저런 잡비 내고 월급까지 주고 나면, 한 시간이나 자기 몫으로 떨어질지 모르겠다고요. 이런 자본가라면 노동자가 조금 지각하거나 옆 사람과 잡담이라도 한다면 결코 그 꼴을 볼 수 없을 겁니다. 그 짧은 시간에 자기 몫이 허공으로 사라진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과연 이게 말이 될까요. 1836년 옥스퍼드의 경제학 교수 시니어(Nassau Senior)가 비슷한 주장을 폈습니다. 당시는 하루 10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운동이 벌어질 때인데요. 『공장법에 대한 편지』Letters on the Factory Act에서 그는 10시간 노동제가 시행되면 자본가에게는 한 푼도 안 떨어질 거라고 했습니다.--- p.171

이 문장이 사실은 무시무시한 문장입니다. 너무 단순해서 그렇습니다. 노동시간이 단지 두 개의 항으로만 이루어져 있습니다. 필요노동과 잉여노동. 이 ‘과’라는 연결사가 내게는 계급투쟁의 전선으로 보입니다. 그 오른쪽이 전쟁터입니다. 단 한 시간이라도 늘리려는 자본가와 단 한 시간이라도 줄이려는 노동자. 시침 한 칸, 분침 한 칸도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딱 두 개의 항입니다. 여기에는 신조차 앉을 자리가 없습니다.
--- p.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