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교육의 이해 (책소개)/2.교육문제비평

역사교육으로 읽는 한국현대사

동방박사님 2022. 9. 19.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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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19세기 교실에서 21세기 학생들을 가르쳐온 20세기 역사교육사

박사 대통령의 일민주의 신념이 교육이념이 되고, 쿠데타를 국난극복 사례로 동학농민전쟁과 함께 배우고, 정권이 바뀌면 역사교과서 내용이 바뀌고……. 70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역사교육의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필수냐 선택이냐, 대입시험에 들어가느냐 아니냐를 논쟁하고 있을 뿐이다. 책은 역사를 왜 알아야 하는지, 어떤 역사를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위해 해방 이후 역사교육 70년의 발자취를 살펴본다.

또한 학교 교육에 한정시키지 않고 역사교육과 관련된 이념이나 정책, 연구까지 포함한 역사교육에 관한 23가지 주제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첫 번째 항목인 ‘국민학교와 국민과’부터 마지막 항목인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파동’까지 하나하나의 사건은 한국현대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첫 번째 항목인 ‘국민학교와 국민과’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 말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해방 이후 한국교육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상당 기간 학교 교육에 영향을 주었다.

마지막 항목인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파동’은 저자인 김한종 교수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으며, 역사교육과 관련하여 빠뜨릴 수 없는 현재진행중인 중요한 사건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23개 역사교육 이야기는 대체로 한국현대사의 시기순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정치,사회적 상황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책의 내용을 읽다 보면 한국현대사의 흐름을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각각의 항목은 사건의 전개과정이나 당시 상황뿐 아니라 뒷날의 이야기를 담거나 저자의 개인적 경험이나 감상을 곁들여 독립적인 글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독자들이 현대사와 함께해온 역사교육 70년사를 꿰어보고 역사교육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다.

 

목차

서문_역사교육에 비친 한국현대사의 모습

1부 해방 전후부터 1960년대까지
01 황국신민을 기르는 교육 - 국민학교와 국민과
02 해방 이후의 첫 국사 교과서 - 《초등국사》와 중등용 《국사교본》
03 민주시민 육성과 미국식 민주주의 교육 - 새교육운동과 사회과 도입
04 민주적 민족교육에서 과학적 역사인식까지 - 해방 직후 한국사 인식과 국사교육론
05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다’ - 단군사상과 홍익인간의 교육이념
06 이승만 정부의 통치이데올로기로 변한 역사이념 ? 일민주의
07 서로 다른 삼한의 위치 ? 1950~60년대 중학교 국사 교과서의 학설 문제
08 발전적 관점의 한국사 인식 - 한국사 연구와 국사 교과서의 식민사관 극복

2부 196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09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 - 국민교육헌장과 역사교육
10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국사를 필수로 - 국사교육 강화와 국사과 독립
11 주체적 민족사관을 명분으로 - 국사 교과서 국정화
12 국난극복사관과 전통윤리 - 박정희 정부의 역사교육관
13 국회에 선 ‘국사되찾기운동’ - 상고사 논쟁과 국사 교과서
14 지배층의 역사에서 민중의 역사로 - 민중사학의 대두와 역사 교과서 비판
15 ‘살아 있는 삶을 위한 역사교육’ - 전국역사교사모임의 역사교육운동
16 ‘항쟁’인가 ‘폭동’인가 - 국사 교과서 준거안 파동

3부 1990년대 중반 이후 현재까지
17 역사와 사회과는 적인가 - 사회과 통합과 국사교육 선택 논란
18 포스트모던 역사학과 민족주의 역사학 - 민족주의 역사학과 역사교육을 둘러싼 논쟁
19 ‘서구 중심’에서 ‘유럽 중심, 중국 부중심’으로 - 유럽 중심의 세계사 교육 비판
20 전쟁과 식민지배를 합리화하는 역사교육 - 일본의 역사왜곡과 한?일 역사분쟁
21 고구려사는 어느 나라 역사인가 - 중국의 동북공정과 고구려사 논란
22 자국사를 넘어서 지역사로 - 동아시아사의 탄생과 역사화해
23 정권이 바뀌면 교과서 내용도 달라져야 하나 -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파동

후기_역사교육 70년의 기록을 남기며
 

저자 소개

저 : 김한종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고등학교 역사 교사를 거쳐 현재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로 선생님이 될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역사교육을 연구하면서 사회와 교육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의 올바른 역사인식을 위한 방안을 찾는 것도 근래 고민하는 중요한 과제입니다. 지은 책으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의 역사 3』(공...
 
 

책 속으로

역사교육도 마찬가지이다. 주변 나라들과의 갈등을 전쟁으로 해결하고, 비록 ‘적의 침공을 당하면’이라는 조건이 붙기는 하지만 전쟁에서 자신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용감히 싸우다 죽는 것을 미덕으로 묘사한다. 시기와 장소, 그리고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일제 말 국민학교 교육의 모습은 해방 후 오랜 시간 동안 우리 교육에도 비슷하게 되풀이되었다. 당시 국민학교에서 길러내고자 한 인간상은 여전히 학교 교육과 사회에서 모범이었다. 역사교육도 여기에 한몫을 했다. 앞으로 살펴볼 역사 교육의 여러 문제들이 이를 보여준다. 이제 그런 인간을 기르는 도구로 사용된 역사교육은 그쳐야 한다. 그것이 해방 이후 역사교육의 모습을 찾는 이 책에서 첫 번째 항목으로 구태여 해방 이전의 국민학교 교육을 다루는 이유이다.
---「황국신민을 기르는 교육」중에서

더 궁극적인 문제는 과연 ‘사회과’라는 교과가 학교 교육에 적합한지 여부다. 사회과에 포함되는 역사, 지리, 사회과학은 사회현상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사회현상을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연구하려는 사회과학과 인문학적 성격이 강한 역사를 하나의 교과로 묶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계속되었다. 지리도 인문지리의 경우는 인문학적 성격이 강하다. 물론 사회과는 학문보다는 교육목적을 기준으로 생겨난 과목이다. 그렇지만 교과내용 없이 이런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다. 그런데 내용과 이를 공부하는 방법에서 사회과는 이질적인 영역들을 묶어놓았다. 결국 사회과의 도입은 이후 한국 교육에서 오랜 논쟁의 불씨가 되었다. 특히 역사와 사회과의 대립이 계속되었다. 이는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나타난 현상이다.
---「민주시민 육성과 미국식 민주주의 교육」중에서

역사의 전통은 독재정치에 자주 이용된다. 이데올로기는 사상을 전제로 하는 만큼, 다른 견해를 가지면 안 된다고 말하기 어렵다. 거기에 비하면 민족이나 전통은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라는 명목 아래 모든 국민에게 강요되곤 한다. 그래서 민족주의는 다른 학문이나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역사학 내부에서도 공격을 받는다. 그런 공격을 둘러싼 논란과 갈등을 뒤에서 다시 살펴볼 것이다. 그렇지만 이처럼 우리의 역사와 전통이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이용되는 모습은 서글프고 답답하다.
---「이승만 정부의 통치이데올로기로 변한 역사이념」중에서

1978년 6월 27일에 전남대학교에서 11명의 교수들이, 그동안의 국가주의 교육을 반성하고 교육자의 양심과 민주주의에 입각한 교육,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교육의 실천을 다짐하는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했다. 선언문에서 국민교육헌장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오늘날 교육의 실패는 교육계 안팎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자발적 일치를 이룩할 수 있게 하는 민주주의에 우리 교육이 뿌리박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국민교육헌장은 바로 그러한 실패를 집약한 본보기인바, 행정부의 독단적 추진에 의한 그 제정 경위 및 선포 절차 자체가 민주교육의 근본정신에 어긋나며 일제하의 교육칙어를 연상케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속에 강조되고 있는 형태의 애국애족교육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있다. 지난날의 세계 역사 속에서 한때 흥하는 듯하다가 망해버린 국가주의 교육사상을 짙게 풍기고 있는 것이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중에서

그러나 ‘역사’가 아닌 ‘국사’를 필수로 해야 하는가, 교과의 명칭을 ‘국사’로 해야 하는가 ‘한국사’로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상관없이, 박정희 정부의 국사교육 강화정책의 의도와 실제 시행정책을 별개로 파악하는 것은 비역사적이다. 박정희 정부가 국사교육을 강화하라는 국사학자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정책을 시행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국사교육을 강화한 의도를 정책의 결과와 분리하여 볼 수는 없다. ……이명박 정부의 한국사교육 강화정책은 박근혜 정부 들어서 더욱 확대되고 있다. 한국사를 대학수학능력시험에 필수로 하겠다는 방침이 발표되고 역사수업을 어려움에 빠뜨렸던 집중이수제도 완화되고 있다. 그런데도 사회 분위기가 조금만 달라지면, 또다시 한국사를 사회과에 통합하자거나 필수과목에서 제외하자는 주장이 다시 나오지 않을까 우려된다. 만약 그런 때가 오면 이제는 한국사를 비롯한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역사학계의 목소리는 더 이상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하고, 학교 역사교육은 돌이킬 수 없는 위치로 전락할 수도 있다. 정부의 정책적 의지가 아니라 학교와 사회의 요구에 따라 역사교육이 강화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초등학교에서 대학교까지 국사를 필수로」중에서

5·16쿠데타나 10월 유신이 동학농민전쟁 같은 ‘혁명’임을 국민들에게 알리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비문의 ‘대통령 박정희’라는 글자는 언제부터인가 훼손되어 있다. 아마도 동학농민전쟁과 쿠데타를 같은 성격으로 보아야 한다는 박정희의 주장에 대한 분노의 표현일 것이다. 이런 일은 탑골공원에서도, 충의사에서도 일어났다. 2001년 11월 23일에 ‘민족정기소생회’라는 단체의 회원들이 박정희가 쓴 현판 글씨인 탑골공원의 ‘삼일문’ 현판을 떼어냈다. 2005년 3월 1일에는 민족문제연구소 전 충남지부장이던 양수철이 충의사의 ‘충의사(忠義祠)’라는 현판을 떼어내어 친일작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던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 앞에 전시했다. 이들의 행위가 바람직한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친일행위를 한 박정희의 친필 글씨를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곳에 둘 수 없다는 의지를 확실히 보여준 행위였다. 탑골공원의 ‘삼일문’ 현판은 2003년 2월에 독립선언문의 서체를 본떠 새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충의사 현판은 논란 끝에 결국 2005년 4월 말에 박정희의 친필 글씨로 복원되고 말았다.
---「국난극복사관과 전통윤리」중에서

1981년에 상고사 내용을 둘러싼 국회 청문회에서 이기백이 한 다음의 말은 핵심을 지적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제가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영토가 넓으면 위대하고 영토가 좁으면 열등하다고 하는 식으로 국사교육을 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제의 식민주의사관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요, 다음 시대를 이끌어갈 학생들을 숙명론자·비관론자로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비관론자가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중국의 땅은 우리보다 월등하게 크고, 그러니까 중국은 우리보다 위대하고, 소련도 영토가 넓으니까 우리보다 위대하고, 이런 식으로 나가게 되면 결론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이기백, 『국사 교과서 개편 청원에 대한 국회 문공위에서 의 진술』, 36쪽)”
---「국회에 선 ‘국사되찾기운동’」중에서

민중사학자들은 이런 관점에서 국정 국사 교과서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이들의 분석에 따르면, 국정 국사 교과서는 역사의 전개 과정을 지배층의 관점과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으며 민중을 수동적인 존재로 그리고 있다. 사회의 모순과 대립을 숨긴 채 지배층 위주의 정치사·제도사 서술로 일관하여 역사의 주체인 민중이 제대로 나타나 있지 못하며, 역사 발전을 올바로 이해하기 어렵다. 특히 집중적인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이 근현대사였다. 국정 국사 교과서의 개화기와 일제통치기 서술은 서구식 근대화론의 관점에서 개화파를 역사의 주류로, 민중을 보조적인 존재로 그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을 축소하고,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운동을 배제하고 있다는 비판도 덧붙여졌다. 현대사 서술은 분단과 냉전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으며 정권의 정당성을 옹호하거나 정부의 정책이나 그 성과를 홍보한다는 것이 비판의 핵심이었다. 또한 친일파를 비호하거나 심지어 미화하는 서술도 적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들이 보기에 국사 교과서가 이런 문제점을 가지는 가장 큰 원인은 국정으로 발행되는 데 있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바꾸고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이 이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목적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었다.
---「지배층의 역사에서 민중의 역사로」중에서

초기 역사교사모임에 적극 참여한 교사들의 주된 관심은 올바른 역사인식과 역사관에 있었다. 기존의 역사교육은 지배층 중심의 역사, 권력에 종속되어 있는 역사교육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살아 있는’의 반대말은 ‘죽은’일 것이다. 그래서 역사교사모임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던 말이, “그렇다면 기존의 역사교육은 ‘죽은 역사교육’이라는 말이냐?”라는 것이었다. 물론 전국역사교사모임에서 먼저 기존의 역사교육을 ‘죽은 역사교육’이라고 한 적은 없다. 그러나 기존 역사교육의 어떤 부분에 그런 점이 포함되어 있다면, ‘죽은 역사교육’은 권력에 종속되어 있는 교육, 학생들로 하여금 무조건 외우게 해서 사고를 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리는 교육을 의미할 것이다. 1970~80년대 학교 교육의 일반적 현상이었지만, 역사교육은 다른 어떤 교과 못지않게 이런 성격이 강하였다. ‘살아 있는’이란 이러한 역사교육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포괄적으로 표현한 말이었다.
---「‘살아 있는 삶을 위한 역사교육」중에서

궁극적으로 배척해야 할 것은 우리와 차이가 있는 주변 나라의 역사인식이 아니라,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고 전쟁을 정당화하며 폭력과 억압을 합리화하는 역사인식이다. 일본 우익은 자신들의 역사 서술을 비판하는 한국의 교과서도 베트남인에 대한 가해 사실을 숨기고 베트남전을 합리화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도쿄재판에서 일본 전범들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수많은 민간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미국의 책임자들도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전범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베트남인의 시각에서 보면 가해의 사실을 숨기고 있는 한국의 역사 교과서도 베트남전을 왜곡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원자폭탄 투하 행위가 전쟁범죄에 해당하는지는 지금까지도 논란거리이다. 일본 우익들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이런 행위들은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 역사인식과 역사교육을 둘러싼 분쟁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침략과 전쟁, 갈등과 대립을 정당화하려는 데서 비롯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침략이나 전쟁도 불가피하며 힘으로 주변을 억눌러야 한다는 군국주의적 국가관이 역사왜곡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역사교육은 지난날의 경험을 통해 전쟁을 막고 갈등을 줄이며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인류가 공동으로 실현해야 할 가치라는 의식을 기를 수 있다.
---「전쟁과 식민지배를 합리화하는 역사교육」중에서

동북공정을 계기로 고구려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크게 높아졌지만, 이것이 학교 역사교육에 크게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일부 교사들이 계기수업으로 동북공정을 둘러싼 문제들을 다루기는 했으나, 논란이 된 고구려사 서술이 교과서에서 특별히 늘어나거나 수업시간에 비중 있게 다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물론 학교 역사교육의 내용은 역사 연구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므로, 새로운 고구려사 연구성과가 금방 나올 수 없는 상태에서 역사교육의 내용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새로운 연구성과가 나오기 전이라도 고구려사를 좀더 상세히 가르칠 수는 있다. 그렇지만 한국사교육 전체를 생각해보면, 고구려사의 비중만 늘리는 것도 문제이다. 결국 이러저런 이유로 고구려사를 비롯한 한국고대사 교육은 동북공정 이전에 비해 큰 변화가 없었다. ……고구려연구재단이나 동북아역사재단에서 고구려사를 비롯한 동아시아 역사, 동북공정에 대한 많은 연구서와 논문, 자료들이 간행되었지만 일반인 중에서 이를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중의 올바른 역사 이해’와 별로 상관없는 역사학자들만의 잔치가 될 수도 있다. 과연 우리는 역사를 왜 공부하는 것일까? 동북공정을 비롯한 역사분쟁에서 비롯된 관심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역사학계는 역사교육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필요하다는 인식을 심어주지 못하였다. 역사교육의 본질과 필요성을 진지하게 논의하지 못한 탓이다.
---「고구려사는 어느 나라 역사인가」중에서
 

출판사 리뷰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은?

사람들은 역사에 관심이 많다. 옛일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나 흥미 때문만은 아니다. 너무나 진부한 말이지만, 역사는 사회의 뿌리이며 근원이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나 집단의 존재 근거를 제공하기도 한다. 우리는 지난날 사람들의 삶을 자신에 투영하고 삶에 적용하기도 한다. 특히 근현대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형성되어온 직접적인 과정이다. 사람들이 근현대사에 민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역사교육과 관련된 문제들이 학문적 관심이나 교육적 목적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다. 정치적 의도가 깔려 있거나 사회 분위기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 헌법에서는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한다고 명시하고 있지만, 교육만큼 정치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것도 없다. 특히 역사교육은 더욱 그렇다. 한국 사회에서 역사교육은 통치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국가가 필요로 하는 국민을 만드는 데 이용되었다.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역사를 이용하려고 한다. 특히 권위주의 정권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독재정권에 맞서 사회민주화에 힘쓰던 사람들도 사회의식을 높이는 데 역사를 이용했다. 목적은 서로 정반대라도 정치적·사회적 이유로 역사를 강조하고 중시한다는 점은 마찬가지였다.

역사교육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

해방 이후 역사교육의 과제는 독립 한국에 걸맞도록 역사교육을 바로 세우고 자국사 교육을 재건하는 일이었다. 수십 년의 식민통치를 거치면서 황폐화된 역사교육을 다시 일으키는 과정에서, 미국식 민주주의교육을 도입하려는 교육주도세력과 민족 전통에 토대를 둔 교육을 바라는 민족주의자들 간에 갈등이 빚어졌다. 해방 직후에는 마르크스 사관에 토대를 둔 역사 연구와 교육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미국식 교육을 받아들이기 위한 새교육운동이 벌어지고 사회과 교육이 도입되었지만, 단군신화에서 나온 홍익인간이 교육이념으로 채택되었으며 이는 일민주의라는 이승만 정부의 통치이데올로기와도 연결되었다.

1970년대 들어 국민교육헌장의 반포부터 국난극복의 정신과 전통윤리를 강조하는 데 이르기까지 박정희 정부의 교육정책은 역사교육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국사는 국민윤리와 함께 국민에게 국가주의 정신자세를 심으려는 정신교육에 이용되었으며, 이전까지 검정으로 발행되던 국사 교과서는 국정도서로 바뀌었다. 1980년대 중반 사회민주화가 진전되면서, 과학적?실천적 역사학을 내세운 역사학자들은 역사 교과서가 지배층 위주 서술, 정부의 홍보 역할, 지나친 반공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민중 중심의 역사 서술을 주창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 출범한 역사교사모임도 ‘살아 있는 삶을 위한 역사교육’을 주장하면서, 역사교육운동으로 확산해갔다. 그러자 이러한 변화를 경계한 보수 세력이 역사인식의 차이, 특히 근현대사 서술을 이념논쟁으로 몰고 간 결과, 1994년에 국사 교과서 준거안 파동을 초래했다.

국사 교과서가 국정화되면서 교과서가 학교 역사교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더 높아졌다. 자연히 이해관계나 관점을 달리하는 집단의 국사 교과서에 대한 관심이 이전보다 훨씬 커졌다. 흔히 ‘재야사학자’로 일컬어지는 일부 학자들은 국사 교과서의 상고사가 축소?왜곡되었다고 주장하였으며,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파동으로 대표되는 근현대사 인식을 둘러싼 국내의 논쟁에 일본 우익교과서의 역사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한국이나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과 일본, 한국과 중국 사이의 역사분쟁이 더해졌다. 이 밖에도 포스트모던 역사학과 민족주의 역사학,역사교육 논쟁, 유럽 중심 세계사교육 비판 등은 역사교육에 관심을 가지는 계층이 확산되고 관심 문제들이 다양해졌음을 보여준다.

21세기 역사교육을 그려보다

역사교육, 특히 한국사교육이 부실하다는 지적이 나오면 사회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역사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그러나 왜 역사를 알아야 하는지, 어떤 역사를 배워야 하는지는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는다. 그저 사회 분위기에 따라서 역사과목을 필수로 하거나, 시수를 늘리고, 시험에 포함시킬 뿐이다. 그 결과 학교 교육에서 역사의 비중은 어느 정도 높아지겠지만, 역사교육이 제자리를 찾았다는 말은 들을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의 관심이 줄어들면,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일이 반복된다. 이처럼 해방 이후 역사교육이 걸어온 발자취는 사회적 산물이었다. 역사교육은 한국 사회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창이다. 교육제도나 교육과정과 같은 규정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관점에서 역사교육을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세기의 역사교육은 전쟁에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용감히 싸우다 죽는 인간을 기르는 교육, 기존의 사회에 인간을 동화시키는 교육, 민족과 민족성이라는 문구만 추상적으로 제시하는 교육, 권력 강화를 위한 논리로만 역사와 전통을 내세우는 교육이었다. 정부는 국가주의 교육사상을 강요하는 교육정책을 폈으며, 국정 국사 교과서에 정권의 역사관을 반영하고 정책을 홍보하였다.

21세기 역사교육은 다인종 사회에서 나타날 수 있는 사회문제에 대처하고 사회적 효용성을 높이기 위한 교육이어야 하며, 국민들로 하여금 자발적 일치를 이룩할 수 있게 하는 민주교육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개혁의 의지를 가진 새로운 젊은 역사교사들이 더 많이 활동해야 하며, 각국의 목적을 위해 갈등과 대립을 정당화하는 역사왜곡을 지양하고, 여론이나 교육정책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와 사회의 요구에 따라 역사교육이 강화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