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인물사 연구 (책소개)/2.한국인물평전

내 마음의 안중근

동방박사님 2022. 9. 26.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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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일본 우익의 고개까지 숙이게 한 바로 그 책!

한민족의 주권을 빼앗은 일본 대룍침공의 상징 이토 히로부미를, 나라의 쇠망을 통감하여 의병을 일으킨 구국의 영웅 대한의병군 참모중장 안중근에 의해 1909년 10월 하얼빈역에서 저격당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응징한 안중근 의사를 여순형무소에서 만나 한평생 공양한 일본 헌병 치바 토시치의 이야기. 당시 여순 관동도독부 육군 헌병 상등병으로서, 안 의사의 의거 소식을 듣고 분노와 증오를 느꼈던 치바 토시치가 수감과 재판, 사형에 이르기까지 당당하게 시종일관 동양 평화를 깨트린 일본의 범죄와 의거의 정당성을 주장한 안 의사의 인격에 감동, 처형 당일 받은 유묵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을 간직하여 평생 향을 사르며 안 의사의 명복을 빌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이 책은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한국의 국제적 국내적 배경과 의의를 상세히 말하고 있다. 비록 일본 헌병이었지만 만부득이한 의거를 결행한 조선 젊은이의 당당한 행동은 한 일본 간수를 감동시키고 평생을 모시게 만든다.

 

목차

연보
기원의 날들
어린 시절
불타는 대륙
일본의 원훈, 이토 히로부미 쓰러지다
두 사람의 만남
빗속의 처형식
조국으로 돌아간 유묵
저자 후기
증보판을 내며
역자 후기

 

저자 소개

저 : 사이토 타이켄 (齋藤泰彦)
 
1935년 미야기현 구리하라군 칸나리쵸 서만사에서 출생. 센다이 일고, 도호쿠대학 문학부 불문과 졸. 아사이신문 기자를 거쳐 1990년부터 현재까지 미야자기현 와카야나기쵸의 조동종(曹洞宗) 대림사(大林寺) 주지. 1909년 10월 안중근은 일본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사살하였다. 사형판결을 받은 안중근은 처형직전 옥중에서 보살펴준 간수 치바 토시치에게 감사의 뜻으로 <爲國獻身軍人本分위국헌신군인본...
 
역 : 이송은
 
동덕여자대학교 무역학과 졸업. 일본어능력시험 1급 합격. ㈜엔터스코리아에서 번역가로 활동중.
영상번역으로 일요스페셜「통한의 증언-북송선」「나고야의 태양 선동열」등과 추적 60분「한일 어업협정 파기 그 이후」외 다수가 있고단행본 번역으로는「한의학 대백과사전」「인간은 왜 섹스를 하는가?「환상세계 3」「마법사전」등이 있다.
 
 

책 속으로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해외망명을 결심, 산둥을 거쳐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지면이 있는 프랑스인 신부에게 ‘국내에서 교육 등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충고를 듣고 다음해에 귀국하였다. 1906년 3월에 진남포 용정동으로 이사하여 석탄상회를 경영하다가 정리한 뒤 서양식 건물을 지어 삼흥학교를 설립하였다. 곧이어 남포의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학교경영에 전념하였다.
---「연보」중에서

치바가 기억하고 있는 ‘그날’은 바로 1909년 10월 26일이었다. 이날 오전 9시 만주(현 중국 동북부)의 하얼빈역에 도착한 일본의 원훈, 추밀원(樞密院, 일본 구 헌법에서 천황의 정치자문기관) 의장 이토 히로부미는 마중 나온 러시아 재무장관과 30분가량 회담을 나눈 뒤 환영식장으로 향했다. 역구내의 플랫폼에서 러시아군 의장대를 사열하고, 각국의 외교단과 인사를 마치고 곧이어 하얼빈 재류 일본인 환영단 쪽으로 걸음을 옮길 때였다. 러시아 군대의 후방에서 다가온 신식 머리에 양복을 입은 한 청년이 불과 4미터 밖의 가까운 거리에서 이토를 향해 잇달아 총탄을 발사했다. 꼬리를 물고 울려 퍼지는 금속음과 함께 이토의 발길이 멈추는가 싶더니 이내 무너지듯 쓰러졌다.
---「기원의 날들」중에서

같은 무렵 일본에서는 1877년에 있었던 서남전쟁에서 메이지유신에 큰 공을 쌓았던 사이고 타카모리가 전투에 패배하여 사망했고, 역시 유신정부에서 가장 개혁적이며 정한론을 반대하던 키도 타카요시도 사망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유신정부의 중심인물로서 정한론에 반대하던 오쿠보 도시미치 역시 사망했다. 이와 같이 명치유신을 감행하는데 지도적 역할을 수행한 세 사람의 잇달은 죽음은 유신정부의 수뇌부 구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키도 타카요시를 모시던 죠슈번(長州藩)의 하급무사인 이토 히로부미와 같은 인물들이 그들을 대신해 신정부의 지도자로 대두되었다.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유신 일본의 조선 진출공세는 1895년의 청일전쟁이 종결될 때까지 강제적으로 추진되었다. 약 20년간 조선의 정치정세는 망국적 당파싸움에 휩싸여 있었고, 이를 계기로 일본과 청국은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노골적인 다툼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중에서

이즈음 조선에 접근해 온 러시아가 민비의 환심을 사게 되고 국왕 고종도 친정을 선언해서 배일노선을 취하기 시작해 일본의 강압에 의한 내정개혁을 전부 재검토한다는 조칙을 내렸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메이지 시대의 조일외교 사상 가장 심각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바로 신임 공사가 된 육군중장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일으킨 민비시해사건(을미사변)이다. 이 만행은 그가 부임한 직후인 1895년 10월 8일에 발생했다. 사건 직후 일본정부(제2차 이토내각)는 세계를 향해 ‘범죄를 저지른 증거가 있는 자는 관민을 막론하고 엄벌에 처한다’는 약속을 하며 비난의 폭풍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당시 일본의 신문도 강력하게 ‘타국의 궁중에 들어가 치욕스러운 만행을 저지르는 것은 참으로 있을 수 없는 행동이며, 그 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재판 결과 미우라를 포함한 일본의 관련자들은 전원 무죄판결을 받았다.
---「불타는 대륙」중에서

환영회는 대성황이었다. 많은 박수를 받은 이토는 만면에 미소를 띄며 수행원에게 ‘내일부터 시작될 여행도 기대되는데’라고 말을 건넬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비록 외교적인 인사말이라고는 하지만, 만주문제를 표면에 내놓은 이토의 말은 주도면밀했고, 가는 곳마다 상대를 안심시키고자 배려했다. 그러나 이토가 대련을 방문했을 때, 그의 만주방문의 목적인 당시 동양문제를 책임지고 있는 러시아의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의 회담은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끌고 있었다.
---「일본의 원훈, 이토 히로부미 쓰러지다」중에서

검찰관 미소부치는 ‘이토 죄상 15개조’를 다 듣고 나서 크게 놀랐다. ‘이것은 취조를 받는「인물」이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라고 내심 혀를 내둘렀던 것이다. 하나하나가 정확한 지적이었고,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안중근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던 미소부치는 무의식중에 말했다. “지금 당신의 진술을 들어보니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동양의 의사(義士)입니다. 의사가 사형을 받는 법은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에 안중근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생사에 대해서는 논하지 말아 주십시오. 다만 내가 지금 말한 것을 바로 일본 천황에게 상소해 주시오. 지금 당장이라도 이토의 잘못된 정략을 고쳐서 위급한 동양대세를 구해 줄 것을 간절히 바라는 바이오.”
---「두 사람의 만남」중에서

재판관은 살해목적에 대해 더 할 말이 없느냐고 재차 물었다. 안중근은 여전히 한국 통감이었던 이토의 죄상을 폭로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재판관은 마침내 정치상의 의견은 그만 진술하도록 주의시키고 나서 ‘만일 그런 의견을 진술하지 않는다면 다시 심리를 공개해서 재판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안중근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토를 살해한 이유가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이유에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소견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의견 공개를 금지하는 이유는 알고 있습니다. 또 유명인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 역시 유감입니다만, 꼭 필요하기 때문에 말했을 뿐입니다. 지금부터는 다시 그런 얘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빗속의 처형식」중에서

치바는 1934년 12월 17일 50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그는 생전에 보잘것없지만 훈 8등 서보장(瑞寶章)을 받은 군인이었으나,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부처님의 자비에 맡긴 채 연명십구관음경과 그 사람의 이름, ‘안중근 의사’를 외우며 생애를 마쳤다. 안중근 의사가 처형된 후 그의 사상과 인품에 깊은 감동을 받은 치바는 평생 그의 유덕을 기리며 날마다 불전에 향을 바치고 명복을 비는 동시에 한결 같은 마음으로 한일양국의 독립되고 명예로운 우호와 평화의 회복을 기원했다. 아내 기츠요도 남편의 유언에 따라 불단에 ‘유묵’과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남편의 위패와 함께 모시고 조석으로 공양을 계속하다 1965년 10월 22일 향년 74세로 이 세상을 떠났다. 대림사에 있는 묘비에는 아래와 같이 계명이 생전의 고인의 인품을 기리고 있다.
---「조국으로 돌아간 유묵」중에서
 

출판사 리뷰

-이토 히로부미를 응징한 안중근을 여순형무소에서 만나 한평생 공양한 일본 헌병 여순형무소 간수치바 토시치 이야기
-우리에게 공개되지 않은 역사의 진실을 밝힌 책!
-아사히신문, 산케이신문, 각종 방송 및 언론 매체에 절찬되었던 바로 그 책!


1909년 10월 26일 9시 30분경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이 있은 지 일주일 뒤인 11월 3일 이후부터 재판을 받고 처형되기까지 5개월간 여순형무소에 안중근이 수감되었을 때 간수였던 치바 토시치와의 이야기를 쓴 넌픽션이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하기까지의 상황과 재판과정, 한국의 독립운동과 1910년 전후 국제적 국내적 상황도 상세하게 이 책에서는 적고 있다.

당시 일본 헌병이었던 치바 토시치의 나이는 24세였다. 그는 11월 3일 이후 마지막 날까지 안중근의 곁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이였다. 검찰관의 취조 과정과 재판 과정을 지켜본 것은 물론 형무소에서도 간수로서 같이 지냈다. 그러는 사이에 남몰래 안중근을 존경하게 된 치바는 마음 깊은 곳에서 ‘안중근을 잃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분명 한국의 미래를 위해 한몫할 인물인데……'라고 아쉬워했다. 그리고 안중근이 처형된 3년 뒤인 1913년 3월 20일 기츠보와 결혼했다. 당시 치바의 나이는 28세, 기츠보는 21세였다. 그 후 요노츠네 소학교 출신자로서는 최고의 지휘인 헌병특무조장까지 진급했으나 뜻한 바가 있어 군에서 퇴역하고 한국 통감부 경찰관으로 전직한 뒤, 마지막 임지인 연해주와 가까운 한국 북부의 함경도에서 경부보로 퇴관했다. 1921년 4월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아내와 생가 근처에 집을 마련하고 여생을 보냈다.

치바는 남은 여생을 보내면서 안중근을 위해 남몰래 참회의 불공을 올렸다. 여순형무소에서 안중근이 써준 글씨인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을 대림사에 모시고 향을 피웠다. 그런 그의 행동은 당시의 일본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치바는 안중근을 위해 불공을 드리는 것을 하루의 일과로 삼았다. 죽음을 앞둔 치바는 아내에게 안중근의 유묵을 잘 보존할 것과 안중근이 영락정토로 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불공을 드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치바의 아내 기츠보도 죽고 나자 치바의 친족들은 그의 뜻을 이어 안중근의 유묵을 70년간 소중히 보관해 왔다. 서울에서 안중근 의사 탄신 백주년 기념식이 거행된다는 것을 전해들은 치바의 유족들은, 한국의 발전을 기원하면서 1979년 늦가을에 유묵을 안중근의 고국에 반환하였다. 그리고 2년 후인 1981년 3월 26일 미야기현 구리하라군에 있는 대림사에는 비석이 세워졌다. 이 비석에는 안중근과 치바의 우정을 기념하고 아울러 불행했던 한일합방 35년간의 일제의 탄압지배에 대한 속죄가 담겨 있다.
 

추천평

21세기적 과제인 〈좋은 한국인〉과 〈좋은 일본인〉의 연대를 가능하게 해줄 만한 책
- [한겨레신문]

일본인들에게 100년 전 하얼빈의 총성이 의미하는 바를 똑바로 기억시켜 준 책
- [국민일보]

이 책을 읽고 한국이 일본을 왜 미워하는지 마음 깊은 곳에 와 닿았다.
- [나카다 노보르 (한일종교문화교류단)]

민족을 위해 자기애를 극복한 할아버지의 가르침이 생생하게 내 마음 속에 살아 있다.
- 안옹호 (안중근의 직계손자)

죽음 앞에서도 안중근은 평상시와 전혀 다른 사람처럼 신비한 모습이었다.
- 소노키 (안중근 순국 직전 통역관)

안중근 의사는 마지막까지 참 신앙인으로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살다간 참 그리스도인이다.
- 신성국 (신부, 안중근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