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중국.동아시아 이해 (책소개)/6.중국공산당

국가의 죄수 : 1989년.6.4텐안먼 민주화 운동을 돌아보다

동방박사님 2022. 10. 4.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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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중국 역사의 빈자리, 6 ㆍ 4 톈안먼 민주화 운동을 돌아보다

톈안먼 운동 때 광장에 모인 학생들을 독려하고 무력 진압에 반대하다 덩샤오핑에게 숙정된 당 총서기 자오쯔양이 가택 연금 중에 과거를 돌아본 회고록이다. 자오쯔양은 누구보다 오랫동안 덩샤오핑을 보필하며 중국 경제의 선진화를 이끌었으나 1989년 계엄이 선포된 톈안먼 광장에서 총성이 울려 퍼진 후 무려 16년간 가택 연금된 상태에서 2005년 85세로 사망했다. 중국 총서기를 지내며 인민의 사랑을 받았던 그는 지금 중국 서적과 잡지, 신문, 심지어 역사에서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6ㆍ4 이후 그는 죽어서도 국가의 죄수로 남아 제대로 평가받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

『국가의 죄수』는 자오쯔양이 톈안먼 유혈 진압에 이르기까지 당내의 갈등부터 1980년대 주요 경제정책, 정치개혁에 대한 구상, 가택 연금에 대한 그의 심경 등을 상세하게 담고 있다. 자오쯔양이라는 한 정치가의 고백서라기보다 중국 개혁사를 평가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향후 중국이 어떤 길을 선택하든지 간에 그에 대한 평가는 톈안먼 사건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와 더불어 중국의 정치적 부담으로 남게 되었다.

 

목차

서문 역사는 인민이 쓰는 것이다
머리말 자오쯔양 녹취 회고의 역사적 배경

Ⅰ. 1989년 6·4 사건

1장 | 1989 학생운동의 시작
2장 | 4·26 사설
3장 | 학생시위와 정치투쟁
4장 | 무력 진압
5장 | 속죄양
6장 | 2차 문화대혁명
7장 | 큰형님 덩샤오핑

Ⅱ. 연금의 심정

8장 | 당과 국가의 심판
9장 | 고군분투

Ⅲ. 개혁개방의 13가지 문제

10장 | 덩샤오핑과 천윈 간의 논쟁
11장 | 1981년의 완충 역할
12장 | 대외개방의 진통
13장 | 경제 건설의 새로운 길
14장 | 후야오방과는 다른 경제적 견해
15장 |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16장 | 점진식 경제체제개혁
17장 | 경제 과열과 연착륙
18장 | 국제무역으로 장점을 살리다
19장 | 농촌 농가생산책임제
20장 | 연해 지역의 대외경제 발전 전략
21장 | 연해로 전국을 선도하다
22장 | 부패에 직면하여

Ⅳ. 후야오방 시대에서 자오쯔양 시대로

23장 | 후야오방의 하야
24장 | 1987년 반자유화의 한 해
25장 | 좌파 안의 좌파
26장 | 중국 사회주의 노선을 확립하다

Ⅴ. 거대한 변화, 1988년

27장 | 13대 이후의 서광
28장 | 상품질서를 찾다
29장 | 경제 후퇴
30장 |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물가개혁
31장 | 개혁이 후퇴하고 체제가 과거로 돌아가다
32장 | 실권 잃은 총서기
33장 | '자오 타도의 바람'이 불다

Ⅵ. 개혁의 이름으로

34장 | 덩샤오핑의 행정개혁
35장 | 중국의 이름 없는 공포
36장 | 후야오방의 사회주의민주
37장 | 민주와 법제 사회

주·416
부록1 연해 발전 전략에 관한 단독 녹취
부록2 민주와 법제의 궤도에서 문제를 해결하자
부록3 5월 19일 톈안먼 광장에서의 즉석연설
부록4 6·4 사건에 관한 해명 발언

자오쯔양 연보
인명록
옮긴이 후기
 

저자 소개

저 : 자오쯔양 (趙紫陽)
 
본명은 자오시우예趙修業, 1919년 허난河南 화滑현 지주 가정에서 태어났다. 13세에 공청단에 가입했고 고등학교 때부터 자오쯔양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다. 농민운동으로 성공하여 중국 공산당 내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46세에 최연소의 나이로 광둥성위 제1서기에 오른다. 문화대혁명 당시 비판을 받아 하방되어 노동 개조에 참여한다. 1975년 쓰촨에서 정무를 주관하면서 농촌경제개혁에 성공한다. 당시 ‘식량을 구하려면...
 
편 : 바오푸
 
자오쯔양 생전의 비서 바오퉁의 아들. 홍콩에서 신세기新世紀출판사를 세웠다.
 
역 : 장윤미
 
연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중국 베이징대학교 정부관리학원에서 『시장화 개혁시기 중국의 노동정치』라는 논문으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성균관대, 동서대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서강대 강사로 있다. 주요 논저로는 『열린 중국학 강의』(공저, 2017), 『중국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가능한가』(공편, 2013), 「중국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경험 및 기억의 전승」(2019), 「중국과 한반도에서의 ‘민족’개념의 ...
 

책 속으로

당시 학생시위에 대해 유혈사태를 피하고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는 다른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없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당시 나는 ‘민주와 법제의 틀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안했는데 바로 이와 같은 결말을 얻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당시 대부분의 학생들은 부패 근절과 정치개혁을 요구했지 공산당 타도와 공화국 전복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우리들이 학생들의 행동을 ‘반당·반사회주의’로 보지 않고, 그들의 합리적인 요구를 받아들이고 인내심을 가지고 협상하고 대화하며 소통했다면 사태는 진정되었을 것입니다.---p.145

루겅은 야오방에게 당신은 왜 덩 어르신이 있을 때 군사위를 장악해 군사위 주석이 되지 않느냐고도 말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다가 향후 군의 우두머리가 당신에게 반대한다면 그러한 국면을 통제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당시 야오방은 그런 문제는 고려해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과 자오쯔양 둘은 지금 경제와 당 문제로 바쁘며, 군대 안에서는 서열을 굉장히 중시하고 또 지금은 전쟁 때도 아니니 덩샤오핑에게 이 직무를 맡겨야 자신과 자오쯔양이 경제와 당 업무에 힘을 모을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인터뷰 중 루겅은 이름을 하나하나 거론하며 천윈, 왕전, 후차오무, 덩리췬에 대해 나쁜 말을 했다. 이러한 얘기가 덩을 불편하게 만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군사위 주석을 거론한 부분에서 덩은 매우 언짢아했다.---p.266

스탈린과 마오쩌둥 말년의 심각한 교훈, 그리고 덩 자신이 문혁 중에 겪었던 처지를 감안한다면 덩이 사회주의국가 정치제도의 폐단을 깨닫지 못한 것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그 역시 당 내부와 사회에서의 민주를 확대하고 가부장제를 폐지하며 소련의 영향이 미친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고 종종 언급했다. 만약 이러한 문제를 정말로 해결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권력이 고도로 집중된 정치를 건드려야만 한다. 허나 덩의 신조는 공산당의 집정 지위에 도전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고도로 집중된 권력 정치와 독재제도는 그가 특히나 마음에 들어 하고 좋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민주, 즉 지도자의 특권을 폐지하고 봉건주의 사상의 영향을 제거하는 것 모두 실현할 수 없는 것으로 빈말에 불과하다.
---p.382
 

출판사 리뷰

중국 정부의 눈을 피해 미국에서 출간, 중국에서 금서로 지정,
2009년 홍콩에서 20주년 기념에 맞춰 출간되자마자 매진,
타이완, 홍콩에서 현재 베스트셀러 행진!
‘자오쯔양 중국공산당 총서기 최후의 비밀 회고록’ 어떤 내용이기에……

중국 역사의 빈자리, 6 ㆍ 4 톈안먼 민주화 운동을 돌아보다

올해는 1989년 6월 4일 중국 톈안먼 광장에서 유혈 사태가 발발한 지 21년이 되는 해이다. 아울러 개혁가이자 민주주의를 꿈꾸다 6ㆍ4 운동의 희생양이 된 자오쯔양(趙紫陽, 1919~2005)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서거한 지 6년째 되는 해이기도 하다. 중국 역사에서 6ㆍ4는 우리의 5ㆍ18 광주 학생운동을 떠올릴 만큼 중국이 민주화ㆍ현대화로 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여전히 민주화 항쟁이 아닌 ‘6ㆍ4 톈안먼 반란과 학생과 시민들의 폭동’으로 부르고 있어 민주화를 위한 희생자들의 숭고한 정신을 매장하고 있다. 21년 전 이날 무력 진압에 의해 죽어간 학생과 인민의 수가 얼마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쫓겨나 영원히 복직되지 못했는지, 가해자와 책임자는 누구인지 공개된 자료도 없다. 당시를 기억하는 지식인, 학생들은 끊임없이 ‘6ㆍ4 재평가’를 요구하고 있지만 1989년 6ㆍ4 민주화 운동은 여전히 중국 역사에서 빈자리로 남아 있다.

《국가의 죄수》는 톈안먼 운동 때 광장에 모인 학생들을 독려하고 무력 진압에 반대하다 덩샤오핑에게 숙정된 당 총서기 자오쯔양이 가택 연금 중에 과거를 돌아본 회고록이다. 자오쯔양은 누구보다 오랫동안 덩샤오핑을 보필하며 중국 경제의 선진화를 이끌었으나 1989년 계엄이 선포된 톈안먼 광장에서 총성이 울려 퍼진 후 무려 16년간 가택 연금된 상태에서 2005년 85세로 사망했다. 중국 총서기를 지내며 인민의 사랑을 받았던 그는 지금 중국 서적과 잡지, 신문, 심지어 역사에서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6ㆍ4 이후 그는 죽어서도 국가의 죄수로 남아 제대로 평가받을 날을 기다리고 있다.

당시 자오쯔양에게 붙여진 죄목은 ‘동란을 지지하고 당을 분열시켰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6ㆍ4 민주화 운동의 산증인으로서 그는 가택 연금 중 차분히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의 억울한 처지를 솔직담백하게 회고한다. 그리고 자신이 신념으로 삼았던 개혁개방과 이에 반대하던 세력과의 당내 갈등, 덩샤오핑에 대한 서운함 등을 2000년 무렵 30시간 분량의 육성 테이프 30개에 남겼다. 이 책은 당의 감시를 피해 일부러 손자들 장난감 옆에 방치하듯 보관해오던 테이프를 그의 사후 바오푸(鮑樸, 자오쯔양 생전의 비서 바오퉁의 아들)가 미국으로 가져가 4년 만에 완성한 것이다. 이후 홍콩과 타이완에서 출간되자마자 매진되는 사태를 빚었고 중국은 금서로 지정했다.

이 책은 자오쯔양이 톈안먼 유혈 진압에 이르기까지 당내의 갈등부터 1980년대 주요 경제정책, 정치개혁에 대한 구상, 가택 연금에 대한 그의 심경 등을 상세하게 담고 있다. 자오쯔양이라는 한 정치가의 고백서라기보다 중국 개혁사를 평가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향후 중국이 어떤 길을 선택하든지 간에 그에 대한 평가는 톈안먼 사건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와 더불어 중국의 정치적 부담으로 남게 되었다.

후야오방의 죽음이 불러온 풍전등화의 6 · 4 전야

자오쯔양과 함께 양쪽에서 덩샤오핑을 보필하던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이 1989년 4월 15일 사망하자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톈안먼 광장에 모여 그를 애도했다. 이들은 당의 부패와 개혁개방의 후퇴에 대한 불만을 후야오방을 추도하는 형식을 빌려 나타냈다. 일부 과격한 학생들은 개혁개방을 진두지휘하다 1987년 불명예스럽게 퇴진한 후야오방의 명예 회복과 민주화를 요구하며 중국공산당사로 몰려가기도 했다.
공식적인 추도식이 끝났으나 학교로 돌아가달라는 당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평화적 시위 세력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당시 당서기 자오쯔양은 4월 23일~30일 북한을 방문 중이었는데 그의 부재 시 대리인이었던 리펑(李鵬, 1928~)과 야오이린(姚依林, 1917~1994) 등 보수파는 상황을 무력 통제하지 않으면 전국적인 동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덩샤오핑에게 보고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덩샤오핑은 시위대의 성격을 ‘반당ㆍ반사회주의 동란’으로 규정짓고 적의에 가득 찬 4ㆍ26 사설을 발표한다.

학생들은 그동안 ‘반당·반사회주의’라거나 ‘계획적’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따라서 사설 발표 이후 분위기가 일순간에 격해졌다. 원래 중도 입장이었던 사람들도 급진적인 쪽으로 변했다. 자신들의 요구가 묵살되자 시위대는 더욱 분개하여 가두시위와 연좌단식 농성에 돌입했고 이들의 가두행진을 지켜보던 도로변의 군중들은 박수로 환영하며 지지를 나타내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가두행진을 저지할 책임을 맡고 있던 경찰조차도 형식적으로 저지하면서 사실상 가두행진을 허용하는 태도를 취했다.

학생들에게 총을 겨눈 총서기가 될 수는 없다

북한에서 돌아와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된 자오쯔양은 4ㆍ26 사설을 정정하는 보도를 내보내 학생들의 분노를 가라앉히는 수밖에는 없겠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자신의 말을 번복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며 강하게 그를 나무란다. 그리고 ‘계급투쟁을 강령으로’ 하는 마오쩌둥 시절부터 내려온 내란 진압 정책을 밀어붙여 군대 동원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비극의 발생을 저지하고자 자오쯔양은 톈안먼 광장으로 달려가 단식을 중단하고 학교로 돌아가달라고 설득하는 연설(본문 "부록3"에 연설문 전재)을 하지만 사태의 심각성은 학생들에게 전해지지 못한다. "
이미 당내에 무력 진압하자는 세력이 대세를 이루었을 때, 자오쯔양은 1919년의 5·4 운동을 기념해 5월 4일 아시아개발은행에서 연설을 한다. 학생시위는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이고, 중국에서 내란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요지의 연설이었다. 그러나 정적들은 4ㆍ26 사설과는 방향이 다르고 ‘하나의 당에서 두 개의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그를 비난한다.

5·4 연설 내용과 달리 정부에서 어떤 움직임도 없자 실망한 학생들은 고르바초프가 방중한 기간(1989년 5월 15일~18일)을 이용해 대규모 가두시위와 단식을 감행한다. 학생들은 정부에 압력을 행사할 절호의 기회이며 국빈을 접대하기 위해 정부가 양보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과감한 요구
는 오히려 무력 진압의 구실이 되었다.

4·26 사설의 정정 발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5·4 연설마저 분열을 조장했다는 당의 비난을 받기에 이르러 자오쯔양은 더 이상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덩샤오핑의 집에서 열린 계엄 결정 회의에서 덩샤오핑은 반대의사를 밝히는 자오쯔양에게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그를 밀어내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러자 자오쯔양은 스스로 역사적 사명을 다했음을 감지한다. 이날 상무위원의 표가 3 대 2로 계엄 쪽으로 기울었다고 외부에 알려진 것과 달리 사실은 공식적인 투표조차 없이 계엄이 결정된다.

인민에게 총을 겨눌 수 없었던 자오쯔양 중국공산당 총서기. 그는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맘먹고 집에 머물며 덩샤오핑에게 계엄 결정을 번복해줄 것을 편지로 청원한다. 그러나 결국 집 안에서 6월 4일 총성을 듣는다.

‘식량을 구하려면 쯔양을 찾아라’

자오쯔양은 이 책에서 6·4의 배경이 되었던 당내 정치 갈등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전개해간다. 즉 개혁개방을 주장하며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고자 했던 자신과 보수 세력 간의 갈등에서 사태의 원인을 찾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실각하지 않았다면 중국 경제는 지금보다 훨씬 빨리 개방의 문을 열게 되었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나타낸다.

중국에서 경제 발전의 원칙은 오랫동안 ‘자급자족’이었다. ‘쌀 없이 밥을 짓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모든 것은 원자재부터 시작했다. 철강의 경우 우선 광산을 찾아 콜타르를 만들고 다시 철로를 놓고 그런 다음 제철, 제강, 강철을 압연하고 다시 각종 기기설비를 만들었다.

그러나 1978년 쓰촨성위의 제1서기 자오쯔양의 주재 아래 자율권을 확대한다는 내용의 개혁 실험이 진행된다. 자오쯔양은 이때 프랑스를 방문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프랑스 남부 지중해는 기후가 건조해 여름에도 비가 내리지 않는데 중국의 사고방식대로라면 이러한 상황에서 곡식을 심기 위해 자연환경을 바꾸고 대대적인 수리 공사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포도와 가뭄에 잘 버티는 각종 작물을 심었고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는 프랑스 포도주를 만들어냈으며 농민들은 상당히 부유했다. 폐쇄적이지 않고 대외무역에 의존해 자신들의 물건을 수출하고 필요한 물건은 수입했던 것이다.

이후 자오쯔양은 산둥 지역 특성에 맞는 면화를 심는 등 개혁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 결과 불과 1~2년 사이에 면화가 대폭 증산되었다. 1985년에는 면화가 많아지자 ‘재앙’이 되어 팔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개방정책을 실시하여 부족한 식량은 외국에서 수입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자급자족은 힘이 많이 들고 성과는 적을 뿐’임을 몸소 겪게 된 자오쯔양이 개혁가로서 진일보하는 계기가 된다. 개혁에 성공하자 ‘식량을 구하려면 쯔양을 찾아라’는 민간 노래가 성을 넘어 베이징으로 전해지기에 이른다.

“쯔양 이자는 외국의 것을 너무 많이 배웠어. 이렇게 하다가는 안 되지.”

그러나 원로들, 경제학자들은 개혁개방에 심하게 반대했다. 이들은 원료를 들여온 다음에 수출할 수 있을지, 이렇게 크고 사람도 많은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생산한 물건을 모두 팔 수 있을지, 대국으로서의 품위를 버릴 수 있는지, 즉 사회주의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어찌 노동집약형 제품의 수출을 강조할 수 있을지를 걱정하며 전통적인 폐쇄 정책을 고수했다.

영향력 있는 원로 중 리셴녠(李先念, 1909~1992)의 말에 당시의 분위기가 잘 나타난다. “쯔양 이자는 외국의 것을 너무 많이 배웠어. 이렇게 하다가는 안 되지.”
그러나 모두의 반대에서 불구하고 덩샤오핑의 적극적인 지지 하에 자오쯔양은 뜻을 펼칠 수 있었다. 덩샤오핑은 1978년 쓰촨성위 제1서기로서 자오쯔양이 보여준 개혁개방의 성과를 인정하고 무슨 일을 하든 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중국 지역은 매우 크고 각 지역의 상황이 다른데도 오랫동안 계획경제를 실시해오면서 전국적으로 기회 균등을 강조해왔다. 개혁가로서 자오쯔양의 사명은 당과 국가가 농민과 기업에게 양보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1987년 가을부터 1988년 1월 초까지 푸젠, 광둥, 저장, 장쑤 등의 지역을 장기간 시찰하고 중앙 관련 부서와 충분히 의견 교환을 한 뒤에 연해 지역을 전략적으로 대외형 경제 발전 특구로 발전시키기로 결정한다. 해안에 가깝고 교통이 편리하며 기초시설 역시 내륙보다 좋고 노동력도 풍부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처럼 경제개혁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다방면에서 접근을 시도하던 자오쯔양은 경제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정치개혁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뜻밖의 주장을 펼친다. 상품경제 발전의 과정에서 생겨난 금권거래와 권력으로 사리를 꾀하는 일이 사회적 감시가 없어 부정부패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던 것이다. 이는 크게 보아 시스템보다는 사람에게 권력이 고도로 집중되는 독재 정치제도에 반대의사를 내비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자 당의 원로들은 후야오방도 차마 하지 못한 일을 자오쯔양이 하려 한다며 심하게 비판하기에 이른다.

덩-자오 체제가 막을 내리다

그 와중에 6·4 사태가 발발했다. 이때부터 자오쯔양은 반대 세력과는 물론, 덩샤오핑과도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길을 걷게 된다. 특히 고르바초프와 회견 당시 당내에서 덩샤오핑이 차지하는 지위와 관련한 자오쯔양의 발언이 문제가 되었다. 덩샤오핑은 당시 원로 중의 원로로 정치국 상무위원에서 물러나 있었다. 하지만 당내의 주요 정책 결정자로서 그의 지위는 ‘상무위의 시어머니’로서 결코 변함이 없었다.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왜 상무위원이 아닌 덩샤오핑에게 보고를 하는가ㆍ’ 같은 말을 외부로부터 적지 않게 들어야 했으며 이른바 ‘수렴청정’ 같은 비난의 말이 퍼지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이것을 분명히 밝히고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 자오쯔양은 그의 이미지를 보호하려는 좋은 마음에서 덩샤오핑의 특수 상황에 대해 일부러 이야기했다. 지금까지 덩에게 통보하고 자문을 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의 집에서 직접 회의를 하며 중대한 문제는 그가 결정할 수 있게 하자는 것도 논의하여 따라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자오쯔양은 의도적으로 덩샤오핑을 음해하려 했다는 커다란 오해를 사게 된다. 덩샤오핑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자오쯔양이 학생시위의 책임을 회피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덩샤오핑을 매도했다는 커다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네가 이러한 오해를 가지고 세상을 떠나는 것을 나는 진실로 원치 않았다.


자오쯔양은 보수파와의 갈등에서 언제나 자신 편에 서주었던 덩샤오핑에게 한시도 고마움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가택 연금되어서도 오해를 풀기 위해 수차례 덩샤오핑에게 편지로 자신의 진심을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한 차례도 답장을 보내지 않았고, 그는 오해를 안은 채 1997년 2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자오쯔양, 최후의 증언

이 책을 들여다보면 6ㆍ4 민주화 운동과 관련하여 정부와 학생들 간의 이념 갈등이라는 표면적 이유 이면에 통치 엘리트 내의 정견 불일치와 이데올로기적 논쟁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음을 눈치채게 된다. 자오쯔양 스스로 인정한 물가개혁의 실패, 1988년 예금 대량 인출 사태와 사재기 현상 등 총서기로서 잘하고 잘못한 일도 흥미롭게 읽힌다. 개혁개방의 선두주자였던 만큼 총서기가 되지 않고 국무원 총리로 남아 계속해서 연해 발전을 이끌었더라면 훨씬 빨리 개방의 물결에 합류하게 됐을 거라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한다.

책에서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중국식 사회주의’는 결코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는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한 사람의 독재가 심해 법치가 이뤄지지 않는 것을 이유로 든다. 오히려 서구식 민주주의가 인민이 주인 되는 진일보한 제도였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1989년 자리에서 물러난 뒤 국내외 정세의 변화에 따라 나는 중국정치체제개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생겼다. 과거에는 서구 선진국들이 실시하는 의회민주제에 대해 인민이 주인 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련쒽의, 사회주의국가가 실행한 대표대회제도라야 인민이 주인 됨을 실현할 수 있고 이는 서구의 의회제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한층 더 민주를 실현할 수 있는 형식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우리 사회주의국가에서 실행한 민주제도는 완전히 형식에 치우쳐 있고 인민이 주인 되지 못하며 소수, 심지어 개인이 통치하는 것이다.” -본문 4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