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중국.동아시아 이해 (책소개)/3.중국근현대사

문화대혁명과 극좌파 (마오쩌둥을 비판한 홍위병)

동방박사님 2022. 10. 5.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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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2020년 세종도서 학술부문

문혁관에 대한 통념을 깨고
새로운 시각에서 문혁을 재평가하다

중국근현대사학회 연구총서 시리즈 6권이다. 이 책의 부제인 ‘마오쩌둥(毛澤東)을 비판한 홍위병(紅衛兵)’의 문제의식은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70년 한 프랑스 연구자에 의해 제기되었다. 마오쩌둥의 절대적 권위 아래 일사분란하게 진행되었을 것만 같았던 문혁이 그의 충실한 추종자인 홍위병에 의해 비판받았다는 역사적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 책은 이렇듯 기존 통념의 문혁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된다. 극좌파를 중심으로 기존 문화대혁명 연구와 다른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소수자의 시각에서 문혁을 재평가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주류적 정통적 문혁관과는 구별되는 문혁상을 그린다.

책은 극좌파를 중심으로 기존 문화대혁명 연구와 다른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이는 향후 문혁 재평가에 기여할 바가 많을 것이며 소수자의 시각에서 문혁을 재평가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주류적 정통적 문혁관과는 구별되는 문혁상을 그릴 수 있다. 향후 이 연구를 발판으로 ‘주변에서 본 문혁’, ‘여성의 시각에서 본 문혁’, ‘소수민족의 시각에서 바라본 문혁’, ‘농장과 공장에서의 문혁’ 등 지금까지 다루지 않았던 많은 문혁 관련 연구를 촉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책머리에
서론

제 I 부 문혁의 급진화와 극좌사조의 기원
제1장 문혁과 ‘혈통론’
제2장 중앙문혁소조와 치번위(戚本禹)
제3장 ‘신사조’의 전개와 극좌 사상의 형성

제 II 부 문혁 극좌파 운동의 전개
제4장 후난(湖南) 문혁의 전개와 성무련(省無聯)
제5장 광둥(廣東) 문혁의 전개와 ‘팔오사조(八五思潮)’
제6장 문혁과 우한(武漢) 극좌파

제 III 부 극좌파 반대운동의 전개와 그 대응
제7장 성무련 반대운동
제8장 광둥 극좌파 반대운동
제9장 우한 극좌파 반대운동

제 IV 부 상산하향운동의 전개와 지식청년의 각성
제10장 1960년대 전반 상산하향운동의 전개와 그 성격
제11장 문혁과 지청(知靑)의 도시 귀환 투쟁

제 V 부 문혁의 ‘일탈’과 그에 대한 다른 시선
제12장 ‘혈통론’의 지속
제13장 ‘신좌파’의 문혁 인식

결론
참고문헌
 

저자 소개 

역 : 손승회 (孫承會)
 
1961년 출생.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학사·석사·박사 졸업. 공주대학교, 서울대학교, 청주교육대학교 등에서 시간강사, 성균관대학교에서 연구교수로 근무한 뒤 현재 영남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은 중국근현대사. 주요 논저로 「만보산사건과 중국공산당」(『동양사학연구』, 2003), 『근대중국의 토비세계』(창비, 2008), 『헤테로토피아와 만주』(공저, 경제·인문사회연구회, 2014) 등이 있고 역서...
 

책 속으로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이하 문혁으로 약칭한다)이란 무엇인가?” ‘10년의 동란(動亂)’이라는 중국 정부의 공식 평가가 분명하게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진부한 질문이 발발 5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문혁이 쉽게 정의될 수 없는 모순의 종합체이며 지금도 여전히 우리 주변을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사건으로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 p. 5

“문혁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질문에 적절하게 답변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문혁에 대한 역사학의 실증적 접근이 필요하다. “대담한 가설, 세심한 논증(大膽的假說, 小心的求證)”이라는 실사구시(實事求是)적 역사학의 기본 태도는 이때 더욱 절실해진다. 하지만 문혁 연구에 필요한 또 다른 자세는 분절되고 모순된 개별 문혁을 끊임없이 종합하려는 의지와 그것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문제의식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문제와 관련하여 연구자의 인생관·세계관이라는 주관적 측면은 역사학의 실증적·객관적 태도와 더불어 문혁 연구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아닌가? --- p. 6

극좌파는 마오쩌둥의 충실한 추종자이면서 동시에 그와 공산당 그리고 국가체제에 대한 ‘자발적’·‘주체적’ 비판 세력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들은 어쩌면 진정한 의미에서 문혁의 이상주의자였고 ‘아래로부터의 문혁’ 혹은 ‘인민문혁’을 가장 정확하게 대변하는 세력이며 우여곡절 끝에 상층 문혁과 관계를 맺어서 문혁을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추동시킨 중요한 요인이었다. 게다가 문혁의 이상을 통해 그 현실을 전면적으로 비판한 집단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들은 문혁 내 대중의 자율성을 이해하기 위해 적당한 집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p. 30

‘혈통론’은 출신 계급에 따른 정치적 기준으로 개인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존재 의의를 결정한다는 이론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이후 착취계급 가정 출신은 교육과 취업 등에서 차별받았다. 하지만 1962년 이후 마오쩌둥이 사회주의국가에서도 계급투쟁이 필요하며 자본주의 복벽의 위험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한 이후 혈통이 보다 중시되기 시작했다. --- p. 37

군의 개입과 혁명위원회의 설치로 나타나는 문혁의 현실적 전개 과정은 급진 조반파, 결국 극좌파의 실망을 야기하기에 충분했다. 따라서 그들은 대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일부 극좌적 조반파는 문혁 발발 이후 혁명 대중 조직만 존재할 뿐 혁명정당이 없음을 비판했고 마오쩌둥 역시 이미 파시스트정당으로 변모한 현실의 공산당 내에서 스스로 소수파에 불과하다고 지적한 바 있었다. 양시광은 이에 근거해 새로운 혁명정당 건설을 주장했다. --- p. 139

1967년 10월 11일 성립된 성무련은 문혁 시기 대표적 극좌 조반파 조직으로 알려져 있다. 문혁이 낳은 조직 가운데 가장 비판적이고 급진적이며 또한 가장 정교한 논리를 갖춘 조직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는 성무련은 마오쩌둥 이론인 ‘프롤레타리아 독재하에서의 계속혁명’을 옹호하고 저우언라이로 대표되는 ‘홍색자본가 계급’을 전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성무련은 기존의 국가기구를 파괴하고 파리 코뮌의 대중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중화인민공사를 건설하고자 했다. --- p. 147

광둥 극좌파는 당 중앙, 군 그리고 혁명위원회를 반대하는 급진 조반파 조직을 가리킨다. 구체적으로는 당 중앙의 지시를 공공연히 거부하고 ‘군 내의 한 줌 주자파’ 척결을 내세워 군을 분열시키고자 했으며 3결합을 바탕으로 한 혁명위원회를 실질적으로 거부하며 ‘특권계급론’에 따른 ‘철저혁명론’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는 파리코뮌을 모델로 기존 체제에 대한 전면적 ‘탈권’을 보장한 마오쩌둥과 문혁파의 지시가 주요한 사상적 배경으로 깔려 있었다. 하지만 극좌파는 이들 상층부 문혁파의 단순한 추종 세력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 p. 188

‘결파’는 좌파의 입장에서 중도파를 비판했지만 자신들을 극좌파와 구분했다. 그들은 극좌파 조반파를 소자산계급혁명가의 조급증과 보복 심리를 극복하지 못한 “형좌실우”파로 규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문혁파가 이러한 자의적 규정에 설득되어 극좌파 비판운동에서 그들을 제외시킨 것은 아니었다. --- p. 214

상산하향운동(上山下鄕運動)이란 국가가 중등학교를 졸업한 도시 학생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하여 농촌으로 보내 육체노동에 종사시키는 현대 중국의 대규모 운동을 가리킨다. 이는 문혁 시기 중국을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힘든 세계 역사상 유일무이한 동원이며 20세기 최대의 국가에 의한 사회 실험으로 기록될 것이다. 게다가 근대화가 곧 도시화를 의미하는 세계사의 일반적 발전 법칙에 역행하여 10여 년에 걸쳐 천 수백만 명에 이르는 청년이 도시에서 농촌으로 이주했다는 사실 또한 세계적으로 독특한 사회·정치·경제·교육·사상 현상으로 주목할 만하다. --- p. 257

‘홍오류’와 구분지어 ‘흑오류’를 차별하는 ‘혈통론’은 개인의 의지와 능력과 무관하게 계급적 출신 성분에 따라 운명을 결정짓는 단순론이자 감정적 극좌론이었다. 문혁 발발 이후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한 문혁파에 의해서도 부정될 극좌론이 이 시기의 지청을 대상으로 맹위를 떨쳤던 것이다. …… 부모에게 부여받은 선천적 계급 성분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하향 선택을 강요받았던 지청에게 농촌 생활은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1966년 문혁의 발발은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신호탄이었고 도시의 홍위병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 올 수 있었다. 즉, 문혁은 지청의 불만을 증폭시켜 폭력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기폭제가 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 p. 283

문혁의 정리와 수습은 혁명위원회의 건립과 1969년 제9차 당대회로 정치적 마무리 단계에 진입한다. 이 과정에서 급진적이고 자율적인 문혁의 흐름을 대표했던 극좌파를 마오쩌둥과 문혁파가 반대하고 탄압한 것은 필연적이었다. 동시에 이것은 문혁이 본래의 이상을 상실하고 현실에 타협한 보수화 과정이나 다름없었다. --- p. 321

문혁의 보수화는 곧 문혁 이상의 포기이며 문혁의 부정이었다. 이것은 마오쩌둥 사후 ‘사인방’의 붕괴로 보다 전면적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개혁·개방 30년을 거치면서 심화된 사회 모순을 배경으로 최근 문혁을 재평가하려는 경향이 등장했다. 현재 중국 내의 새로운 좌파 혹은 극좌파라 할 수 있는 ‘신좌파’의 움직임이 이를 대표한다. --- p. 335

문혁을 통한 ‘대안적 근대’의 모색이라는 주장은 추이즈위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서구의 근대성 자체에 ‘규율’과 ‘해방’이라는 심각한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고 지적하면서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 역시 서구 근대성의 모순이 집중적으로 체현된 것이지 모순의 해결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는 해방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역사적 필연’을 과도하게 사용함으로써 ‘인간의 해방’을 구속·방해했다. 이것은 곧 서구 자본주의 근대성을 해결하려는 마오쩌둥의 문혁 실험을 재평가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기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극복해야 하는 당위성을 시사하고 있다.
--- p. 350~351
 

출판사 리뷰

문화대혁명에 대한 새로운 시각
극좌파, 더 이상 문혁운동의 ‘소수자’나 ‘이단자’가 아니다

“둔황(敦煌)은 중국에 있지만 둔황학은 외국에서 이루어지고 문혁은 중국에서 발생했지만 문혁학은 서방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중국 문혁 연구의 실상을 웅변하는 것으로 중국의 대표적 자유주의 문혁 연구자인 쉬요우위가 문혁 30주년을 즈음해서 했던 말이다. 하지만 문혁 발발 50주년을 지나온 현재에는 이 말이 무색할 정도로 중국에서 다양한 입장의 문혁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비록 서구만큼은 아니며 게다가 여전히 공식적 문혁관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지만, 문혁은 더 이상 학술적 ‘금구’라 할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공식적인 언론을 통해 문혁이 공공연하게 논의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여전히 연구는 제한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 내외에서의 문혁 연구와 토론은 보다 활발하게 전개되어 새로운 의미에서의 ‘문혁(연구)열’이 심화·확산될 것이다. 1980년대 이후 문혁의 주류적 관점인 ‘십년문혁설’은 학계 내외에서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십년문혁설’로는 이 책의 본문에서 주로 다룬 1966년부터 1969년 사이에 전개된 문혁운동의 진정한 의의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물론 극좌파나 극좌사조는 통일적 강령이 없고 사상적으로도 충분히 성숙되지 않았으며 현실 정치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이들 극좌파의 사회·정치체제에 대한 급진적 비판이 1957년 사회평등·공정을 추구했던 우파운동과 유사하기 때문에 극좌파의 사상은 “형좌실우”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역사적·철학적·경제적 기초가 결핍된 채 관방의 신문·잡지에 등장하는 사론이나 마르크스나 마오쩌둥의 저작만을 참조하여 성립된 것에 불과했다. 자신들의 정치 강령 가운데 파리코뮌 모델이 가장 중시된 이유도 그것이 접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극좌파는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문혁 시기 사회·문화·정치의 소수자로서 주류문화로부터의 이탈적 탈주선을 끌어내고 내부로 침입해 그것을 파열·전복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최근 중국 내의 신좌파들이 새롭게 문혁의 이상과 마오쩌둥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들 극좌파를 더 이상 역사의 소수자 혹은 이단자로 무시하거나 기억에서 소외·망각시켜서는 안 된다는 반증으로 받아들여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