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한국정치의 이해 (책소개)/1.한국정치사상

마리 앙투아네트의 진실과 거짓 (이윤섭) - 박근혜를 위한 변명

동방박사님 2022. 11. 25. 11:24
728x90

책소개

‘프랑스 혁명’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이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누적된 문제점이 있었지만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평판이 극도로 나빴던 것도 큰 몫을 차지했다. 프랑스와 오랜 적수였던 오스트리아 출신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처음부터 프랑스 민중에게 미움을 받기 쉬운 존재였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동맹을 굳건히 하려는 목적으로 프랑스에 시집온 마리 앙투아네트는 처음에는 환영받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증오와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정적을 몰락시키는 방법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비방, 중상모략이다. 그런데, 혁명 이전 프랑스 왕비가 된 마리 앙투아네트와 관련된 음란 팸플릿이 무수히 쏟아졌다. 책자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희대의 색광으로 시동생들을 비롯한 수많은 남자와 간통했으며, 궁전을 출입하는 여러 귀족 부인들과도 동성애 관계를 갖고 있다고 묘사했다.

왕정 타도를 갈망하는 부류들은 이런 방식으로 프랑스 왕실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훼손시켰다. 왕비에 대한 수많은 추문은 대부분 중상모략이거나 과장된 것이었지만 민중은 모두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런 추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었지만 지하 언론의 거짓 선전으로 누명을 쓰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왕실의 존엄은 땅에 떨어지고 왕정에 대한 증오가 거세졌다.

한국 현대사도 각종 정치 스캔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최근의 정국이 특히 그러하다. 이를 프랑스를 무너뜨린 들불과 비교 해보면 이면이 보일 것이다.

목차

프롤로그 / 프랑스 대혁명과 대한민국의 스캔들 _ 08

1장 / 프랑스 왕국과 합스부르크 가문 _ 17

프랑크 왕국의 성립과 분열 _ 19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광 _ 28
스페인의 왕위 계승 전쟁 _ 69
폴란드와 오스트리아의 왕위 계승 전쟁 _ 75
7년 전쟁 _ 88

2장 / 마리 앙투아네트와 프랑스 혁명 _ 101

오스트리아 출신 왕비 _ 103
늘어나는 재정 적자 _ 142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_ 146
사형수 구출 사건 _ 173
바스티유 습격 _ 177
민중에 의한 국왕의 강제 천도 _ 203
입헌왕정 _ 224
튈르리 궁 습격 _ 251

3장 / 피로 물든 혁명과 모략의 피해자 _ 295

루이 16세 처형 _ 297
방데 전쟁과 마라 암살 _ 342
단두대에 오른 마리 앙투아네트 _ 368
방데 학살 _ 390
공포 정치의 몰락 _ 409
부르봉 왕조의 부활 _ 439

에필로그 / 칼리굴라와 네로 황제, 그리고 2016년 대한민국 _ 446
 

저자 소개

저 : 이윤섭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 다. 졸업 후 국제관계사 속에서 한국사를 바라보는 작업 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어릴 때는 동네 아이들과 극성스럽게 놀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책 읽기’에 몰두했다. 한국 경제사를 공부하고 싶어 대학에 들어갈 때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선택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학문 연구할 뜻을 접었다. 대학시절에는 팸플릿, 소책자, 자료집을 작성하기도 했는데, 이때의 경험...
 

출판사 리뷰

프랑스 대혁명과 대한민국의 스캔들의 진실과 거짓!

군중은 진실을 갈망한 적이 없다. 구미에 맞지 않으면 증거를 외면하고 자신들을 부추겨주면 오류라도 신처럼 떠받드는 것이 군중이다. 그들에게 환상을 주면 누구든지 지배자가 될 수 있고 누구든지 이들이 품은 환상을 깨려하면 희생의 제물이 된다.
_귀스타브 르봉

프랑스 대혁명의 희생자, 마리 앙투아네트!

1793년 10월 16일 새벽 5시, 파리 48개 구 전역에서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7시에는 장전된 대포가 다리와 교통의 요지에 배치되었다. 총검을 든 병사들이 시내를 순회했고, 기병이 연도에 울타리를 만들며 도열했다. 혁명 광장에 군중이 꽉 들어찼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루이 16세 처형 이후 늘 검은 상복을 입었으나 자신이 처형될 때는 흰 평상복을 입어야 했다. 상복이 군중의 동정을 부를까 우려한 조치였다. 그녀는 손이 묶인 채로 수레에 실려 12시 경 혁명 광장에 도착했다. 단두대의 계단을 올라가면서, 형을 집행하는 앙리 상송의 발을 밟았다. 상송이 아파하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과를 했다. “미안합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12시 15분,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졌다. 앙리 상송은 머리를 들어 군중에게 보여주었다. 일부 “공화국 만세!”를 외치는 자들이 있었으나 루이 16세 때처럼 군중 다수는 침묵했고, 서둘러 흩어졌다. 훗날 나폴레옹은 왕비 처형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그 불행한 왕비에게 가해진 이 범죄는 적어도 모든 프랑스 사람의 마음에 정말로 후회가 되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녀가 그러한 불행을 맞을 잘못이 없다는 것은 물론이다.”

“혁명이 남긴 것은 폭도의 독단뿐이다!”

‘프랑스 혁명’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이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누적된 문제점이 있었지만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평판이 극도로 나빴던 것도 큰 몫을 차지했다. 프랑스와 오랜 적수였던 오스트리아 출신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처음부터 프랑스 민중에게 미움을 받기 쉬운 존재였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동맹을 굳건히 하려는 목적으로 프랑스에 시집온 마리 앙투아네트는 처음에는 환영받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증오와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정적을 몰락시키는 방법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비방, 중상모략이다. 그런데, 혁명 이전 프랑스 왕비가 된 마리 앙투아네트와 관련된 음란 팸플릿이 무수히 쏟아졌다. 책자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희대의 색광으로 시동생들을 비롯한 수많은 남자와 간통했으며, 궁전을 출입하는 여러 귀족 부인들과도 동성애 관계를 갖고 있다고 묘사했다.

왕정 타도를 갈망하는 부류들은 이런 방식으로 프랑스 왕실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훼손시켰다. 왕비에 대한 수많은 추문은 대부분 중상모략이거나 과장된 것이었지만 민중은 모두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런 추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었지만 지하 언론의 거짓 선전으로 누명을 쓰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왕실의 존엄은 땅에 떨어지고 왕정에 대한 증오가 거세졌다. 한국 현대사도 각종 정치 스캔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최근의 정국이 특히 그러하다. 이를 프랑스를 무너뜨린 들불과 비교 해보면 이면이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