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인물사 연구 (독서)/3.동양인물평전

붓다평전

동방박사님 2022. 12. 1.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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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성인이라는 그 말 한마디로 가늠할 수 없는 고타마 붓다의 생애. 오랜 세월동안 일그러지고 변색될 수밖에 없었던 그를 찾아 수십 년 탁마 끝에 세우는 진정한 고타마 붓다의 참모습!

당신이 아는 붓다는 반쪽짜리 붓다이다. 우리의 선덕들은 그 반쪽짜리 붓다만을 가르쳐왔다. 붓다의 원음은 사라진지 오래고 이제 남은 것은 변색되고 날조되어 버린 붓다의 모습만 남았다.

붓다의 완전한 모습을 찾아 대승불교, 소승불교, 남방불교, 북방불교, 원전 및 모든 경을 분석한 뒤 비로소 일으켜 세운 붓다의 참모습. 고착된 관념과 편파를 버리고 그려낸 붓다의 진실상.

강가에서 독을 푸는 부모들 곁에서 웃고 있는 소년, 벼랑에서 형제를 밀어 죽인 사내, 그리하여 쇠산지옥에서 수천 년을 고통 받았던 사내, 자신의 업보로 멸망하는 조국을 눈 형형히 뜨고 지켜보았던 사내. 그렇게 모두를 죽이고 밤하늘의 별이 된 사내… 후대의 가공된 붓다가 아닌, 사실 그대로의 붓다가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목차

자서 - 007
들어가며 - 015
일야현자의 꿈 - 051

제1부 붓다로 오기까지
신들의 나라 - 083
룸비니동산의 이적 - 094
상처 받은 생 - 104
신화의 실체 - 115
그림자 몸 - 123
천륜의 여정 - 133
의혹의 그 그림자 - 143
바람의 꿈 - 154
존재의 함정 - 161
꽃무리 피고 지고 - 181
깊어지는 의혹 - 218

제2부 돌아오는 길
지혜의 사냥꾼 - 233
돌아오는 길 - 241
구경 방랑 - 247
생의 한가운데 - 263
조복 - 276

제3부 깨침 후에 오는 것들
파피야스의 계획 - 285
나는 붓다이다 - 293
해탈문의 비밀 - 299
대승불교를 향하여 - 304
상견외도 단견외도 - 318
즉설주왈 - 333
진리의 모습을 보이다 - 337
이 세상이 바로 화계인 것을 - 350
가야쉬르샤의 불의 법문 - 376
수행승의 묘① - 379
두 소년의 발심 - 382
사랑의 화신들 - 384
수행승의 묘② - 392
카필라여, 카필라여! - 398
독생자의 눈물 - 413

제4부 깨달음의 세월, 깨침의 세월
너를 죽인다면 어떡하겠느냐? - 423
공의 생사 - 430
하룻밤 사이에 현자가 되다 - 435
윤회설과 무아설 그 존재의 본 - 450
범부, 그 영혼의 모습 - 467
침묵의 항변 - 471
눈먼 자여, 그대의 피는 푸르다 - 475
화합의 신 - 480
흥진비래 - 488
아드님이여, 나를 제도하소서 - 493
외도의 시기 - 495
신통의 모습 - 505
위류다까의 증오 - 511
악마인가, 붓다인가? - 559
깨달음인가, 깨침인가? - 564

제5부 황금의 날들
황금 가사 - 571
무상의 칼 - 578

제6부 화엄의 세월
아난다가 아니면 안 된다 - 587
불성의 모습 - 591
두 세계를 전하다_현교 - 595
두 세계를 전하다_밀교 - 599
개와 전의 합일 - 629

제7부 저기가 피안이다
즐거운 윤회 - 643
열반을 향해 - 649
지나온 날을 생각하다 - 660
붓다만의 공양 - 662
적멸 속으로 - 666
최초의 결집 - 679
아난다의 득오 - 685
글을 닫으며 - 693
붓다 연대기 - 696

작가 노트
1. 시작 무렵 - 699
2. 금고기(金魚)의 희망 - 703
3. 다시 시작하다 - 705
4. 가상에 울고 진상에 울고 - 706
5. 그대로의 정극(正劇) - 730
6. 세상을 향해 헤엄쳐 가는 금고기를 보았다 - 732
 

저자 소개 

저 : 백금남
 
1985년 제15회 삼성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87년 KBS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이후 신비한 상징과 목가적 서정으로 백정 집안의 기묘한 운명을 다룬 장편소설 『십우도』와 『탄트라』가 잇따라 히트하면서 90년대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 작가 중 한 명이 되었다. 2003년에는 『사자의 서를 쓴 티베트의 영혼 파드마삼바바』로 민음사 제정 올해의 논픽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8년에는...
 

책 속으로

세월을 거쳐 굽이굽이 돌다가 들어온 것이고 보니 불설이면서도 불설이 아닌 ‘대승비불설경전’이라는 너울을 쓰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원음에서 많이 멀어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붓다의 본 모습을 찾기 위해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사실이 그렇다. 우리의 경전이 실제적으로 원음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느냐 하는 문제는 보통 문제가 아니다.
--- p.39.

불교는 엄밀히 극적인 가르침이 아니다. 중도적 자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랜 세월 수많은 대승들이 싸워왔다. 그때마다 시대와 역사적, 사회적 관점에 따라 재해석이 시도되었다. 어떻게 붓다 가르침의 진의에 도달할 것인가.
불교의 역사는 붓다의 깨침 그곳으로 다가가는 여정이다. 어떻게 붓다의 경지에 접근할 것인가.
--- p. 46

빠알리 율장 《쫄라박가(Cullavagga)- 율장소품》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두 비구(야멜루와 떼꿀라)가 어느 날 붓다를 찾아와 여쭈었다. 그들은 형제였다.
“붓다시여. 여기 세상의 인연을 끊고 출가한 비구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들은 붓다의 말씀을 자신의 언어(sak?ya niruttiy?)로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붓다의 말씀을 운율적 언어로 바꾸면 어떻겠습니까?”
그들이 운율적 언어라고 표현한 것은 빠알리어가 거칠고 난삽하므로 표준어로 바꾸면 어떻겠느냐 그 말이었다.
붓다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리석구나. 만약 그리한다면 내 법의 본의가 어그러지리라. 나의 언설을 운율적 언어로 바꾸지 말라. 바꾸면 악작죄(惡作罪 dukkata)가 되리라. 그 자신의 언어로 배우는 것을 허용한다.”

바로 이 말이 문제였다.
“그 자신의 언어로 배우는 것을 허용한다.”
이 때문에 붓다의 언어를 출신 지방의 언어로 쓸 수 있다는 무리들과 그 당시 붓다가 쓰던 언어로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무리들이 생겨났다.
어느 쪽이 옳은가? 전자인가? 후자인가? 그들은 자신의 언어로 배우는 것을 허용한다는 붓다의 말을 처지에 맞게 해석하고 있다.
자신의 언어로 배우는 것과 자신의 언어로 바꾼다는 것. 배우는 것과 바꾼다는 것은 다르다.
--- p.56

그러니까 그는, ‘그 전의 우리네 스님들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고승대덕들이 경전이 꾸며진 것도 모르고 그것이 붓다의 직설인 양 속아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그대로 가르쳤습니다. 우리 불교가 ‘비불설’을 ‘불설’로 알고 중생들에게 ‘이것이 붓다의 말씀이오’ 하고 지금까지 가르쳐 왔는데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부처님이 계시다면 물어라도 보겠는데 답답합니다’ 그렇게 토로하고 있는 것이었다. 도선 국사도 그랬고, 원효 대사도 그랬고, 서산 대사도 그랬고, 보조 국사도 그랬고, 조선불교의 중시조 경허 선사도 그랬고, 만공 스님도 그랬고. 하나같이 모든 대승들이 받들던 경전이 붓다의 직설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니 어떡하면 좋겠는가 그 말이었다.
하기야 아난다가 “나는 이렇게 들었나이다[如是我聞]” 하고 있으니 그가 거짓을 고할 리 없고 보면, 무엇보다 붓다의 직언이 경전마다 박혀 있으니. 그래서 대승의 불보살들이 그 당시 실재하는 것으로 믿고 중생을 속여 왔다는 그 말이었다.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던 문제를 이제라도 인정한다 그 말이었다. 《아함경》이나 대승경전 모두 붓다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기에 이제 실토한다 그 말이었다.
--- p.30


사실이 그렇다. 우리의 경전이 실제적으로 원음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느냐 하는 문제는 보통 문제가 아니다.
우리 불교가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 분명하고 보면 그때 중국의 구법승들이 빠알리어나 산스크리트어에 얼마나 능통했을까 싶다. 대부분이 구법승들이거나 유학생들이었을 터인데 불경 사업의 중요성을 깨닫고 건너갔다 하더라도 자국의 언어가 아니고 보면 오역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들에 의해 물을 담는 함지박이 물동이가 될 수도 있고 대야가 될 수도 있다. 함지박과 물동이, 대야는 분명히 다르다. 밥은 밥이되 보리밥과 조밥, 쌀밥이 같을 리 없다. 모르니 그저 밥으로 통할 수도 있다. 또 경전 문구를 빼먹을 수도 있고 집어넣을 수도 있다.
구마라집이 금강경을 번역할 때 한 줄을 빼먹고는 수모를 당했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남의 것이 아니다.
--- p.39

그렇지 않다. ‘진리를 보는 자’와 ‘진리를 보면’은 완전히 틀린 말이다. 그 사이에는 수행을 통한 체험의 강이 있고 실천의 과정이 있다. 그것이 ‘참으로 진리를 보면’의 세계다. 비로소 붓다를 볼 수 있는 세계다. 즉 붓다 그 자체다. 그것을 구마라집은 뭉뚱그려 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몰랐다. 나중 양나라 무제의 아들 소명태자 시대 보리 류지 본(509년)이 나왔다. 거기에 보니 다음 경구가 덧붙어져 있다.
彼如來妙體 卽法身諸佛 法體不可見 疲識不能知
해석은 빠알리 본문과 다를 것이 없지만 앞말의 의미가 확실해져 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p.40

문제는 그것이 지엽적이라 할지라도 그런 식이 계속되고 있다면 붓다의 본말이 얼마든지 뒤틀어질 수 있다.
더욱이 한역화 되기 이전의 경전들과 한역화 된 경전들을 비교해보면 선사의 한탄이 지나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원시 경전만이 친설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럴 만하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근본 경전들이 사실은 여러 부파의 왈가왈부하는 주장들이 모이고 모여 경전으로 편찬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순수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에 정통한 이들은 예전부터 소승경전 경전들의 순수성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교계는 사실상 침묵해 왔었는데 이유가 뻔했다.
--- p.41

하기야 그때의 불교가 어떻게 전해졌든 남방불교니 북방불교니 소승불교니 대승불교니 하는 말들이 성행하고 있는 것은 요즘 들어서다. 우리의 불교를 돌아보면 더욱 그렇다. 신앙이라는 굴레를 만들어 기복화 하려는 무리들에 의해 붓다의 모습이 어떻게 변질되고 있는가. 그저 성인화 작업에만 급급하다 보니 붓다의 본모습이 어떻게 왜곡되고 있는가. 오늘도 대승화란 수레를 끌고 중생을 속이는 불교도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든지 있다. 그들이 어떻게 불교가 생성되어 이곳까지 들어왔는지 관심이나 있겠는가.
그들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 붓다는 오로지 신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죄 없는 인간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본시 붓다가 될 선업의 화신으로 그려야 한다. 그가 우리 인간과 똑같은 인간이어서는 안 된다. 그의 조상들도 마찬가지다. 하나같이 선업의 화신들이요, 자비의 화신들이어야 한다. 그의 조상들이 과거에 어떤 죄업을 지었으며 붓다가 과거에 어떤 죄를 지었는지에 대해서 입도 뻥긋해서는 안 된다. 그저 선업의 화신이요, 자비의 화신들로 그리면 된다.
---p73.


‘부처님이 장가를 세 번이나 갔다고? 에이 그럴 리가. 그럼 신도들이 뭐라 그러겠어. 그 말이 그 말이지. 뭐 좋은 일이라고.’
그렇게 불교를 팔아 제 잇속 챙기는 사람들은 오늘도 붓다의 말씀을 기복적으로 해석해 버리는 천재성을 발휘한다. 뜻있는 자들의 개탄이 하늘을 찔러도 그들에 의해 불쌍한 중생은 진짜 경전이 가짜 경전이 되는 줄도 모른다.
--- p201

아직도 ‘밀(密)’ 그러면 눈살을 찌푸리는 이들이 있다. ‘현’ 그러면 고상하고 ‘밀’ 그러면 어딘가 사이비 냄새가 나고 저급하고 천박하다는 식이다.
이것은 관념의 차이다. 불교는 천상의 종교가 아니다. 가장 아래이면서 가장 위에 있다. 진흙 바닥의 종교다. 이 몸이 진흙 바닥임을 알기에 연꽃을 피우려고 출발한 것이 불법이다.
--- p.613

굴레를 만들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이다. 그러므로 그의 법을 알려면 그의 법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듯, 친구를 대하듯. 스승을 대하듯, 부모를 대하듯…. 그를 안아보고, 그를 밀쳐보고, 그를 살펴보고. 임을 사랑하듯 사랑해 보고, 친구를 대하듯 어깨동무도 해 보고 그렇게 가까워져야 하고 평가해 봐야 한다. 그래야 그의 본모습이 보일 것이다. 비로소 여래를 의심치 말라던 그의 경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그의 법을 알 수 있고 그의 경지를 내 것으로 할 수가 있는가.
--- p.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