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기억여행 (2010~) (여행)/4.역사공원묘지 30

망우역사문화공원 (2022.12.1) 민주평통 평화통일 아카데미 2회 답사

개요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로 91길 2(망우동)에 위치한 종합장사시설이다. 산으로서의 명칭은 '망우산'이며, 정상구간의 높이는 282m. '공동묘지'라는 이름이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망우리공원으로 개칭된 후 다시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개칭되었다. 한마디로 추모공원이다. 서울시설공단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장례식장은 물론 공동묘지가 한 곳에 위치해있다. 다만 다른 추모공원들과 다르게 화장장, 봉안당은 없다. 역사 전통적으로 서울의 공동묘지 역할을 톡톡히 해 왔다. 1933년 2월 2일에 미아리 공동묘지가 조만간 매장 종료될 것에 대비해 경기도 양주 망우리 임야 700,000평을 경성부의 공동묘지로 결정했고, 1933년 5월 27일에 망우리 묘지가 개원했다. 1973년 3월 25일에 망우리 공동묘지에..

운산 장덕수의 묘

장덕수 (張德秀, 1894~1947) 한국의 친일파, 정치인, 교육자, 학자, 언론인이다. 일본 유학 후 귀국 상하이로 건너가 신한 청년당과 상하이 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가 귀국 후 체포되어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 유재 당하였다. 그 뒤 임정 외무부 차장 여운형의 통역으로 일본에 다녀오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미국에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도한 미국에서는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보좌하였고, 구미 위원부 폐지령으로 궁지에 몰린 이승만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중일전쟁 이전까지 합법적인 공간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사회계몽운동 등에서 활동하였으나 흥업구락부 사건을 계기로 친일파로 변절했고, 일제 강점기 전시 체제 시기에 친일 사회주의 활동에 참여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에 ..

도산안창호의 묘

도산 안창호의 묘 - 애국지사. 임시정부 내무총장 평남 강서출생, 평생을 나라의 근대화와 독립운동에 헌신한 위대한 지도자로 건국훈장 최고의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다. 1895년 구세학당 (경신고)에 들어가 기독교인이 되고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 평양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약관의 명 연설가로 이름을 떨쳤다. 1902년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교포들의 권익보호와 생활향상에 전력하다. 을사조약 후에 귀국하여 1907년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를 조직하고 "105인 서건'으로 신민회가 해체되자 1913년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3.1 운동 직후 상해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내무총장. 국무총리서리를 지내며 1919년 9월 통합 임시정부 출범에 크게 공헌했다. 1924년 도미하여 흥사단 조직을 강화한 후 192..

근대화단의 귀재 이인성

화가 이인성 (1912~1950) 대구 출생, 보통학교 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을 드러낸 그는 16세 때 방정환 등의 색동회가 주최한 세계 아동 전람회에서 [촌락의 풍경]으로 특선을 하며 비로소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일본 유학 시절에는 제국 미술전람회에 불과 19세의 나이에 수채화 [여름의 어느 날]로 입선해 천재화가로서 크게 명성을 떨치고, 24세 때는 조선 미술전람회에서 [경주의 산곡에서] 최고상인 창덕궁상(1935년)을 수상했으며 1937년 제16회 선전에서는 최연소 추천작가가 되었다. 해방 후에는 이화여중과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가르치며 1949년 가을 국전 창설의 주역으로 활동했으나 1950년에 불과 38세의 나이로 화려한 일생을 마감했다, ,1988년 2월호>은 고인을 근대 유화가 1위로 꼽..

망우리 역사전망대

역사의 전망대 풍수적으로 이곳 망우리가 배산임수의 명당임을 확인할 수 있는 장소이다. 역사적으로는 아차산에서 온돌장군이 전사했다는 전설과 아차산 능선에 산재한 고구려의 보루 유적이 말해 주듯 한강유역은 중국과의 교역로이며 땅은 비옥하고 전쟁에 유리한 지형으로 삼국시대의 지정학적 요충지였다. 백제와 고구려(475~553, 장수왕)에 이어 신라(진흥왕)가 이곳을 차지하여 한반도의 주인이 되었고 조선시대의 외사산 (外四山)의 좌청룡의 자리로 한양을 병풍처럼 크게 둘러싸며 조선500년을 지켜왔다. 그리고 일제가 만든 시립공동묘지(1933~1973)의 어둠을 벗어나 아름다운 경관 속에 선진 한국의 새벽을 여신 분들이 모여 있는 우리 근현대사의 성지가 되었으니 이곳에서는 맞는 해돋이는 그 어는 곳보다도 의미가 깊다.

통일의 선구자 문익환 목사

문익환 (文益煥) 문익환 (文益煥)(1918년 6월 1일~1994년 1월 18일) 은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이다. 통일운동가. 사회운동가이며 참여시인이었다. 본관은 南平이고 호는 "늦봄"이다. 문익환 목사는 통일이 되지 않으면 민주화가 되지 않은다는 진보적 기독교인들의 신념에 따라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기독교 사상에 근거한 사회운동을 한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성서학자로도 활동하였다. 그 실례로 문익환 목사는 감리교 목사인 이현주 목사와 함께 공동번역 성서 번역에 개신교 측 번역자로 참여했으며, 구약성서를 다윗, 사무엘 등의 영웅들에게 가려진 민중의 관점에서 알기 쉽게 설명한 , 를 저술하였다. 1994년 1월18일 20시 20분 향년 77세 일기로 심장마비에 의해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