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전쟁교훈여행 (2010~) (여행)/2.한국전쟁기념관 49

경기도양평군 지평의병. 지평리 전투기념관 (전시관)

지평의병 민족의 암흑기에 횃불처럼 타올랐던 항일의병의 효시 일제에 의한 1895년 10월 명성황후 시해와 그해 11월 단발렬 공포 후 지평출신의 이춘영과 포수 400여명이 국가의 위기를 인식하고 전국 최초로 의병을 창의하였다. 지평의병은 최초의 을미 의병으로 인근 강원지방과 충북지방의 의병병기의 도화선이 된 척사의병이다 지평리전투 중공군 참전후 유엔군의 첫 승전보 미 제 2사단 23연대 (프랑스 대대 배속)가 1951년 2월13일부터 16일까지 지평면 일대에 중공군 3~5개 사단 규모의 집중공격을 막아낸 방어전투, 유엔군이 중공군과 싸워 얻은 작전적. 전술적 승리이다. 지평리 전투이후 사기가 충만하여 38도선 희복을 위한 반격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한국 최초 조립전차 M48A3K M48A3K 전차는 ..

육군박물관 (조선시대 군사)

갑옷 갑옷은 전쟁에서 사람과 군마를 적의 창검이나 화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입었던 옷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갑옷은 청동기시대부터 가죽과 뼈. 나무조각으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존하는 유물은 없다. 삼국시대의 갑옷은 크게 찰갑과 판갑으로 나뉜다. 작은 갑찰들을 이어 만든 찰갑은 유동성이 있어 기마전투에 적당하였고, 철판을 연결하여 만든 판갑은 보병전투에 유리했다.현존하는 고려시대의 갑옷은 정지군인의 경번갑이 있다. 이를 통해 결번갑이 고려시대에 사용되었음을 알수 있다. 또한 를 통해 갑찰을 연결하여 만든 두루마기형 갑옷을 사용했음을 알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금속제 혹은 가죽제 마늘을 가죽 끈으로 연결한 찰갑이 일반적이었으며, 쇄자갑, 경번갑, 두정갑 등이 사용되었다. 그 밖에도 목면으로 만든 면갑과..

육군박물관 (베트남파병)

국군의 베트남전쟁 파병 대한민국의 베트남전쟁 파병은 1964년 5월9일 미국의 존슨대통령이 대한민국을 포함한 자유 우방 25개국에 남베트남을 지원해달라는 요청에 의해 시작되었다. 1964년 9월 제1이동외과의원 및 태권도교관단이 최초로 파병되었으며, 1965년 3월에는 비전투부대인 2천여 명 규모의 건설지원단(비둘기부대)이 추가 파병되었다. 이후 베트남전쟁의 상황이 격화되자 미국의 추가 파병요청을 하였다 이에 대한민국은 1965년 9울 주월한국군사령부를 창설하고, 10월 제2해병여단(청룡부대)과 수도사단(맹호부대)을 파병하였다. 이어서 1966년 9월에는 제9사단9백마부대)을 추가 파병하였다. 또한 전장에서의 원할한 군수조달을 위하여 제100군수사령부(십자성부대)를 창설하였으며, 해군 수송전대(백구부대)..

육군박물관 (6.25 유엔군의 참전)

유엔군의 참전과 활약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침략이 확인되자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신속하게 대응조치를 취하였다. 6월26일 안정보장회의에서 북한군의 대한민국 침략 중지 내용을 담은 제1차 결의안이 채택하였다. 하지만 북한의 반응이 없자 6월27일 다시 안정보장회의에서 '북한 침략을 격퇴하는데 필요한 군사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한다.'는 제2차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하지만 북한의 반응이 없자 6월27일 다시 안전보장회의에서 '북한의 침략을 격퇴하는데 필요한 군사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한다.' 는 제2창의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에 유엔회원국 군사적 참여가 즉시 이루어졌고, 6월 27일 미국의 군사지원을 시작으로 연합군의 참전이 시작되었고, 여러회원국들은 군대 및 식량, 의약품 제공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육군박물관 (6.25전쟁)

6.25 전쟁의 발발과 전개 북한의 김일성은 1949년부터 소련의 스탈린에게 대한민국 침략을 승인해달라고 요청하였고, 결국1950년 3월 스탈린, 5월 중공의 마오쩌뚱에게 남침에 대한 동의와 지원약속을 얻게 되었다. 1950년 6월25일 새벽4시 북한은 38도선 전역에서 전면적인 남침을 개시하였다. 북한의 전력은 전차 242대, 각종 포 3천여문, 전투기 84대, 병력 약 19만명에 달했지만 대한민국 국군은 단 한대의 전차나 전투기도 갖고 있지 못하였고, 병력도 10만명에 불과하였다. 게다가 국군의 농번기를 맞아 6월24일 비상 경계령을 해제하여 많은 장병이 휴가,외출,외박을 나간 상황이었다. 이렇게 전력의 역부족과 기습적인 침략으로 대한민국 국군은 3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는 등 개전 1개월여 만에 낙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