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역사문화기행 (2006~) (여행)/12.인천개항지 9

인천 영종역사관

조선 초기 자연도(현재: 영종도)의 삶 자연도는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는 중국과의 무역 거점이자 조운수로 (漕運水路)의 역할을 수행하여 송의 사신과 상인들을 접대하던 객관 '경원정'이 있었다. 다라서 자연도에 주둔하던 수군과 말 목장 관리인, 소금을 생산하여 수익을 얻던 주민까지 적지 않은 수의 주민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도한 고려시대 무신정권 이후 조선초기까지 유배지로 쓰였다. 당시 섬 주민들은 주로 막집(幕室)이나 초가집에 거주했다. 그러나 조선초, 고려말부터 이어진 왜구의 침략으로 섬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켜 섬을 비우고, 국영 말 목장을 설치하는 정책에 다라 적은 수의 주민들만이 살게 되었다. 수군(水軍) 목자(牧子) 염부(鹽夫)등의 집이 30여 호였다는 기록이 세종실리지에 전한다. 병인양요..

월미도 --> 영종도 유람선 (구읍뱃터)

영종진 화포 영종진(永宗鎭)은 국가 보장처였던 강화도의 방비를 목적으로 1653년 남양도호부의 영종진에서 자연도(紫燕島)로 이전 설치 되었다. 그리고 그 명칭을 그대로 사용해야 한다는 요청에 따라 자연도가 영종진이 되었고, 현재의 구읍뱃터 일대에 포대가 배치되었다. 영종진 포대에는 자연도로 이설 할 당시의 화포와 1869년 훈련도감에서 보내준 지자총통, 대포, 불랑기 그리고 1874년 운현궁에서 별도 제작하여 강화, 김ㅁ포, 영종에 나눠 준 대포,중포, 소포 등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 되었다. 그러나 1875년 일본의 포격에 의해 영종진이 파괴되고 화포 36문을 약탈 당하면서 현재는 그 실물이 전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영종진의 역사성을 재조명하기위해 이 곳에 목원하여 전시된 화포는 김포 덕포진 대포를 ..

인천 자유공원 (제물포 구락부)

제물포 구락부 1891년 조직된 제믈포 구락부는 각국조계를 미롯한 개항장 일대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친교를 위한 공간이었다. 구락부는 클럽의 일본식 음역어이다. 1890년대만 하더라도 인천에 거주하는 구미인은 해관이나 세창양행의 근무자들과 소수의 미국인 선교사에 불과 했는데, 1900년대 이후 인천항의 대외무역이 1900년대 이후 인천항의 대외무역이 활기를 띠면서 일본인을 포함한 외국인 수가 급증했다. 1900년 지금의 자리에 2층 조적조 건물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6월에 회관준공식을 거행했다. 회원은 60명까지 증가 했으며 매월 두 차례 친목 모임과 댄스파티를 열었다. 1914년 조계제도가 폐지되면서 구락부 회관은 여러차례 용도가 바귀었는데, 해방후에는 인천 사립 박물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2007년..

인천 자유공원 (시민애 집) : 고노주택 터, 구)인천시장 공관

(현) 시민애 집 : (구)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제물포구락부 맞은편에 있는 인천역사관 자리에는 잡화상과 석유상을 운영하여 부를 쌓았던 일본인 고노다케노스케의 주택이 있었다. 청일전쟁 직후인 1895년 평양에서 잡화상을 열었던 고노는 1896년 인천으로 이주했다. 그는 조선에서 행상하는 일본인을 보호하고 연락을 도모한다는 명분으로 계림장업단을 조직하고 평양에 지점을 두었다. 그가 조직한 계림장업단은 사실상 일본 정부의 지원금을 받으며 활동한 무장행상단이었다. 이후 고노는 석유판매조합 조합장, 수입상 조합장 인천미두취인소 이사, 아사히 양조 이가, 월미도유원회사 사장 등을 두루 역임하며 경제 침탈의 선두에서 활동 했다. 고노주택은 풍광이 좋아 해방이후 송학장 이라는 사교홀로 사용되다가 1966년 인천시가 ..

인천 개항장 (아트 플랫폼)

조형물의 공간개입이 의미하는 볼거리와 공공성 : '개항장 역사 시계탑' '시계탑'은 개항장의 역사를 담아내는 그릇이다. 시계의 탑은 그 형식에서 애꿎게도 이 자리에 와 있을 뿐이다. 아니다 굳이 시계탑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여기가 바로 개항장의 역사를 몸서리게 간직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계탑이 필요했다. 그래서 시계와 탑이 필요했다. 개항장의 역사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역사에 대한 무지를 깨우는 장소다. 역사에 대한왜곡을 반성케 하는 장소다. 역사를 역사로 바라보게 하는 장소다. 시계는 역사의 단면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개항장의 에피소드를 애니메이션으로 담았다. 비 연속적인 내용들을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함으로 정보전달의 의미를 강조하고 싶었다. 정보를 모아 감상자들이 '역사'와 한데뭉처..

인천 개항장 (일본 조계지)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 이 지역은 1883년 일본 조계를 시작으로 1884년 청국조계가 설정되는 경계지역으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으로 연결되어 계단과 조경이 마련된 공산이다. 약 130년의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이 조계지 경계게단은 중앙에 석조계단이 형성되어 있고양단을 중심으로 급한 경사인 점을 감안 하여 계단참을 두고 있다. 이곳에 조경 식재 공간을 마련하여 인천항 경관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자유공원 서남쪽 가파른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이 계단을 중심으로 청국과 일본의 검물들이 확연하게 서로 다른 양식들로 변화하게 들어서 있다. 청 일조계지 경계 계단은계단 자체의 가치보다 역사성 및 장소의 측면적 가치가 높다. 구) 일천 일본제1은행지점 인천광..

인천 차이나타운

선린동 1- 5주택 청일조계 계단이 시작되는 곳에서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한눈에 모아도 오랜 세월를 머금고 있는 2층 벽돌집이 있다 . 일명 '전서경 주택' 으로 불리는 이 주택은 현재 차이나 타운 내에서 중국 전통양식의 원형을 거의 유일하게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 이처럼 본래 모습을 현재까지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구의 저장성 출신의 점금근, 전신인, 그리고 전 서경에 이르기 까지 한 집안이 삼대째 거주하며 생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전금근은 1903년부터 "순태"라는 양복점을 경영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내벽을 맞댄 형태로 3세대가 거주하도록 지은 연립 주택으로 1.2층 모두 생활공간으로 사용한다. 건물 1층 전면에는 거실이 있고 중앙에는 부엌과 2층으로 연결되는 게단. 후면에는 방..

인천 답동성당

인천 답동 성당 (仁川 沓洞聖堂) 답동성당은 인천지역 천주교회의 역사와 그 시작을 같이했다. 1899년 프랑스 외방전교회 빌렘 (J Wihelm)신부가 초대 본당신부로 부임하면서 답동언덕에 성당의 초석을 놓는 정초식을 가졌다. 이후 (E Coste)신부의 설게로 1897년 뾰족한 첨탑이 특징인 고딕 양식의 건물을 세웠다. 현재의 건물은 1937년 기존 건물의 외곽을 벽돌로 쌓아 올리는 개축 공사를 완공하면서 아치형태가 많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변형한 것이다. 성당의 평면은 십자형으로 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하고 중요한 곳에는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정면의 중앙과 양 옆으로 출입구가 있, 가운데 출입구 위로 장미곷 모양의 창을 설치했다. 건물 중앙에는 큰 탑을 두고 경사진 지붕을 날개로 단 다음 끝 부분에 장..

인천 배다리 역사문화마을 & 영화학교.싸리재.애관극장.신포시장

영화초등학교 본관동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문을 연 서구식 초등교육기관 신식 교육 실시와 선교의 목적으로 1892년에 설립된 영화초등학교의 본관동 건물은 1910년에 착공하여 1911년에 완공하였다. 반지하 1층과 지상 3층으로 구성된 맞배지붕 구조의 건물로 재래식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현관 부분은 돌출되어 '십(十)'자 형태를 띠고 있었으나 1954년 건물 입구쪽의 돌출 부분을 증축하여 현재는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증축된 부분들을 제외하고는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