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한국역사의 이해 (책소개)/3.고려시대사

고려의 부곡인, < 경계인>으로 살다 - 부곡 집단의 기원과 전개

동방박사님 2022. 12. 20.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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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역사가 더 이상 대중들에게 외면당하지 않도록 대중과 역사의 거리를 좁히고 시대 변화를 직시하는 한국사학계의 성찰적 고민을 담아낼 한국사 시리즈북 〈한국역사연구회 역사책장〉의 첫 번째 책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부곡部曲’에 대해 “통일 신라ㆍ고려 시대의 천민 집단 부락. 특히 고려 시대에는 이를 특수 지방 행정 단위로 조직화하여 목축ㆍ농경ㆍ수공업 따위에 종사하게 하였으며, 양민들과는 한곳에서 살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정의내리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부곡인을 신분, 거주지, 조세 부담이라는 측면에서 양민良民과 천민賤民의 두 경계를 넘나드는,〈경계인〉의 속성을 지닌 역사적 존재로 파악하고 『고려의 부곡인,〈경계인〉으로 살다』를 통해 부곡인의 역사적 존재 양상을 그리려 한다. 부곡인이 이분법과 배타적인 영역에 갇힌 존재가 아님을 밝히며 아울러 이러한 〈경계인〉을 수용할 수 있었던 고려왕조 사회의 탄력성에 대해서도 검토한다. ‘경계’ 속에 갇힌 부곡인과 부곡 집단의 존재 형태를 밝히면서, 그들이 ‘경계’를 뛰어넘어 자기의 영역을 확장시킴으로써 역사 발전에 기여한 모습을 살필 것이다.

 

목차

들어가며
역사 변동과 발전의 동력, 경계인|〈경계인〉의 속성을 지닌 부곡인|이 책을 내면서

1장 부곡제의 개념과 존재 형태
연구노트 1_부곡 연구의 시작
부곡제의 개념
부곡제의 존재시기
부곡 집단의 존재 형태

2장 부곡 집단의 기원과 전개
연구노트 2_부곡 연구의 다른 길, 신분론과 기원론
노인과 노인촌
노인과 노인촌의 개념|노인과 노인촌의 발생|부곡 집단의 선행 형태, 노인과 노인촌
삼국 통일신라기의 향과 부곡
향과 부곡 형성의 사회경제적 배경|부곡 제도의 성립과 주민의 존재 형태
고려시기 부곡 집단의 형성과 제도 정비
신생 촌락에 대한 편제|역명자 집단에 대한 편제|부곡 집단에 대한 제도 정비

3장 부곡인의 삶과 존재 형태
연구노트 3_부곡 연구의 또 다른 돌파구, 〈식화지〉 연구
군현 지배구조와 재정 운영
군현 지배구조와 부곡 집단|재정 운영 원칙과 수취 방식
향과 부곡 주민이 부담한 역
소 주민의 역과 소 생산체제
장과 처 주민이 부담한 역

4장 부곡인의 신분과 양천제 이론
연구노트 4_1980년대 국내의 부곡 연구
신분 규제 기록에 대한 재검토
소생자녀의 귀속 규정|승려가 될 수 없는 규정|간행奸行 규정|과거 응시와 국학 입학 금지 규정
연구노트 5_관념의 벽을 넘게 한, 잊을 수 없는 스승
양인설의 근거, 양천제 이론
양천제의 원리|세금을 부담하고 관리가 될 수 있는 부곡인

5장 부곡 집단의 변동과 해체, 소멸
연구노트 6_임건상의 복사본과 학문의 자유
부곡 집단의 변동과 계층 분화
부곡 집단 해체와 소멸의 원인
부곡 개편 정책과 부곡 집단의 해체와 소멸

나오며_부곡 집단의 역사적 의의

보론_ 부곡 연구의 개척자, 임건상 연구
임건상, 그는 누구인가
임건상과의 첫 만남|해방 전후의 임건상|한국전쟁기의 임건상|전후 북한에서의 임건상
임건상의 부곡 연구
1950년대 임건상의 부곡 연구론|1960년대 임건상의 부곡 연구론

참고문헌
부곡 집단에 관한 기초 자료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 : 박종기 (朴宗基)
 
30년 넘게 고려사 연구라는 한길을 걸어온 역사학자. 전통과 현대의 접목, 역사와 현실의 일체화를 통한 새로운 역사상을 수립하는 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고려사 연구를 하고 있으며, ‘고려 다원사회론’을 통해 잊혔던 고려왕조의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역사를 되살리는 작업을 해왔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에서 고려시대 부곡인과 부곡 집단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학교 교수, 한국역사...
 

출판사 리뷰

〈한국역사연구회 역사책장〉, 역사 대중화를 위해

오늘을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역사는 암기라는 스트레스를 제공하는, 그래서 입시에서조차 굳이 선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기피 대상이다. 성인이라고 다를까? 그렇지 않다. 학교를 졸업하면 역사는 삶에서 멀어진다. 학창 시절 인명과 지명과 연도를 암기하느라 지친 이들에게 역사는 일부러 찾아 다시 공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골칫덩어리일 뿐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제도 교육에서는 기대할 것이 거의 없다. 초중고에서는 역사를 암기만 하는 과목으로 만들어버린다. 대학이라고 다른가? 역사 관련 교양 과목 역시 암기 위주다. 역사 전공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는 상아탑 속에 갇혀 그들만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나마도 돈이 되지 않는다며 정원을 줄이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게 역사는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잊히는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역사는 ‘나’를 알게 해준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앎은 역사에서 시작된다. 아울러 역사는 ‘그때 거기’에 대한 진중한 탐구, ‘지금 여기’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바탕으로 ‘내일의 어딘가’를 위한 진심어린 조언을 한다. 그런 만큼 말해지지 않았던 역사적 인간들, 이야기되지 못했던 역사적 사건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여 대중의 품에 안겨주어야 한다. 불투명한 그래서 불안한 미래를 개척하고 사회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앎이 반드시 필요하다. 역사는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한국사 연구 성과의 대중화와 시대적 과제의 효율적 수행을 위해 과학적 역사학을 수립하고 끊임없는 실천을 통해 우리 사회의 진정한 민주화와 자주화에 적극 동참한다’는 취지로 1988년 설립된 한국 역사학계 최대 연구모임인 한국역사연구회에서 이러한 인식 하에 작은 발걸음을 내딛는다. 회원들의 연구 성과를 대중화하고 시대 변화를 직시하는 한국사학계의 성찰적 고민을 담아낼 문고본 형태의 새로운 한국사 시리즈북 〈한국역사연구회 역사책장〉이 그것이다.〈한국역사연구회 역사책장〉에서는 역사가 더 이상 대중들에게 외면당하지 않도록 대중과 역사의 거리를 좁히려 한다. 이를 위해 해당 분야의 권위 있는 연구자들이 세세하고 꼼꼼하게 주제에 접근한다. 그래서 제도 교육에서는 제대로 말하지 않는, 살아 있는 구체적인 역사 이야기를 대중과 나누려 한다. 좀 더 풍부하고 다양한 역사의 풍경을 대중들에게 펼쳐 보이고자 한다. 단순 암기가 아닌 참 역사를 알고 싶어 하는 이들이 서로 쟁론할 수 있는 장이 되고자 한다. 고민하지 않는 사회, 사유하지 않는 사회에 미래는 없다. 대학 입학에만 목매는 중고등학생, 스펙 쌓기에만 열을 올리는 대학생, 연봉 올리기에만 매달리는 직장인들에게 고민의 힘, 사유의 힘을 알려 주어야 한다. 자신의 삶을, 주변 사람들의 생을 돌아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 있도록 안내해야 한다. 〈한국역사연구회 역사책장〉은 그러한 길을 함께 찾아보려는 작은 움직임이다.

부곡인, 〈경계인〉의 속성을 지닌 존재

경계인, 역사 변동과 발전의 동력

재독 철학자 송두율 교수는 여러 권의 저서에서 자신의 위치를 〈경계인〉이라 표현했다. 우선 송두율 교수는 삶의 터전은 유럽이지만, 그곳에서 채울 수 없는 무언가를 항상 느끼며 살아야 하는 한국인인 자신을 〈경계인〉이라 했다. 또한 유럽의 정신세계에 관심을 두지만, 한국의 역사, 정치, 사회, 경제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버릴 수 없는, 즉 유럽과 한국의 정신세계를 오가는 자신을 〈경계인〉이라 칭했다. 그리고 철학자이면서 사회과학을 넘나드는 경계선 위에 있는 자신을 또 다른 의미에서 〈경계인〉이라 했다. 마지막으로 한반도라는 동일 지역 내에서 특정 진영에 속하지 않은 자신을 〈경계인〉으로 표현했다. 한편 고길희 박사는 마산에서 태어난 일본인 조선 사학자 하타다 다카시旗田巍(1908∼94)의 삶의 궤적을 조명하면서 그를 〈경계인〉이라 칭한다. 그가 억압자 일본인이라는 다수자 편에 살면서 내면에 조선을 품고 살았던 소수자였다는 점에서 〈경계인〉이라는 것이다. 고길희 박사의 연구에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경계인〉이 나타나게 된 역사적 조건과 소수자로서의 한계를 극복할 해법을 모색한 점이다. 고길희 박사는 경계를 오가는 삶 속에서 배운 인간적인 활력과 통찰로 주위 사람들의 삶을 녹이는 〈경계인〉의 긍정적인 측면을 지적했다. 그러나 〈경계인〉은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할 수 없는 존재는 안정하지 않는 배타적이고 이분법적인 카테고리 때문에 나타난다. 따라서 폐쇄성을 극복하고 다양성, 이질성, 개별성을 존중하는 개방적인 사회만이 소수자로서의 〈경계인〉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해법이라 했다.

〈경계인〉 부곡인의 삶으로 가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부곡部曲’에 대해 “통일 신라ㆍ고려 시대의 천민 집단 부락. 특히 고려 시대에는 이를 특수 지방 행정 단위로 조직화하여 목축ㆍ농경ㆍ수공업 따위에 종사하게 하였으며, 양민들과는 한곳에서 살지 못하도록 하였다”(강조는 인용자)고 정의내리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부곡인을 신분, 거주지, 조세 부담이라는 측면에서 양민良民과 천민賤民의 두 경계를 넘나드는,〈경계인〉의 속성을 지닌 역사적 존재로 파악한다. 천민은 아니었던 존재, 양민이었지만 양민으로서의 대접은 받지 못한 존재. 그것이 부곡 집단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2002), 『새로 쓴 500년 고려사』(2008) 등을 통해 고려왕조의 전통과 문화를 오늘날 우리들이 어떻게 해석하고 읽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천착해온 저자 박종기 교수는〈한국역사연구회 역사책장〉의 첫 번째 책 『고려의 부곡인,〈경계인〉으로 살다』에서 부곡인의 역사적 존재 양상을 그리려 한다. 부곡인이 이분법과 배타적인 영역에 갇힌 존재가 아님을 밝히려 한다. 아울러 이러한 〈경계인〉을 수용할 수 있었던 고려왕조 사회의 탄력성도 검토하려 한다. 부곡인은 주어진 ‘경계’의 사이에서 이도 저도 아닌, 불안정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들은 끊임없이 그 경계를 뛰어넘으려는 자기 변신을 통해 역사의 발전에 일정한 공헌을 한 존재였다. 이 책은 ‘경계’ 속에 갇힌 부곡인과 부곡 집단의 존재 형태를 밝히면서, 그들이 ‘경계’를 뛰어넘어 자기의 영역을 확장시킴으로써 역사 발전에 기여한 모습을 살필 것이다.

부곡인과 부곡 집단, 어떻게 만들어졌나

부곡의 기원, 노인奴人과 노인촌奴人村

한국사에서 부곡인과 부곡 집단은 5세기 후반 신라가 주변국과의 정복전쟁 과정에서 확보한 지역의 주민과 거주지를 노인奴人과 노인촌奴人村으로 편제하는 데서 기원했다. 노인과 노인촌은 부곡인과 부곡 집단의 선행 형태로서, 타국과의 전쟁뿐만 아니라 신라국가가 자국 내에 전략적 경제적 요충지에 축성을 하고, 그 주민들을 새롭게 편적編籍하는 과정에서도 발생했다. 노인과 노인촌은 소속된 주읍主邑의 행정 지배를 받기 때문에 주읍에 예속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향과 부곡, 통일신라시기에 만들어지다
노인과 노인촌은 5세기 후반 형성되었지만, 향鄕과 부곡은 7세기 후반 통일신라시기에 만들어졌다. 통일신라는 전국에 대한 군현 개편을 통해 인구와 토지 규모가 군이나 현이 되지 못한 영세한 지역을 향과 부곡으로 편성했다. 이러한 지역의 대부분은 6세기 이후 농업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개간지가 확장되면서 형성된 새로운 촌락인 신촌新村으로서, 이러한 곳을 국가의 지배 질서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향과 부곡이 형성되었다.
향과 부곡은 군이나 현이 되지 못할 정도로 영세했기 때문에, 이곳의 행정을 관장한 주읍의 간섭과 차별을 받는 예속적인 속성을 지닌 점에서 노인촌과 다르지 않다. 또한 향과 부곡은 노인촌의 발생 과정과 유사한 경로를 밟고 있었다. 노인촌과 부곡 집단은 비록 2세기의 시차를 두고 신라 사회에 존재했지만, 그 본질적인 속성은 예속적인 촌락 집단이라는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향과 부곡 집단의 선행 형태는 노인촌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노인촌과 부곡 집단은 국가 발생 초기 정복전쟁 과정에서 편제된 집단적 형태의 종족 내지 공납 노예적 속성은 찾을 수 없지만, 지방 행정조직의 일부로서 주읍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주읍에 비해 소외되고 차별을 받았다. 이같이 노인촌은 물론 향과 부곡 집단의 주민은 발생 초기부터 〈경계인〉의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완전한 형태의 부곡제, 고려시기에 역사 무대에 등장하다
고려시기에도 예속적인 촌락 집단의 발생은 계속되었다. 고려는 반세기간의 전란으로 황폐화된 농지를 개간하여 국가의 재정을 확대하는 일이 시급했다. 이에 따라 대대적인 농지 개간 정책을 실시했고, 그로 인해 새로운 촌락이 많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촌락 역시 향과 부곡으로 편제되었다. 또한 전란 중에 왕조정부에 반기를 든 세력을 부곡 집단에 편제시키거나 해당 지역을 부곡 집단으로 편성하여, 그들에게 새로운 역을 부담시켰다. 그리고 국가 운영에 긴요한 각종 수공업, 광공업, 농수산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현지 생산이 가능한 지역을 소所 지역으로 편성했다. 왕실과 사원의 토지를 경작하는 장莊과 처處라는 특수 행정구역을 신설했다. 고려국가는 통일신라기의 군현 편제를 토대로 했기 때문에, 향과 부곡은 고려시기에도 특수 행정구역으로 존속했다. 고려왕조기에 들어와 비로소 향, 부곡, 소, 장, 처로 구성된 부곡제가 완전한 형태로 역사 속에 등장한다.

부곡인과 부곡 집단, 어떠한 삶을 살았나

부곡인, 천민도 공민도 아닌 존재

부곡제 영역에 거주한 주민은 국가에 조세와 역역을 부담한 점에서 노비와 같은 천민과는 구별되는 공민이었다. 그러나 그 주민은 일반 군현의 백정白丁농민층과 같이 3세三稅를 부담하면서 특정의 역을 추가로 부담했다. 조세와 역역 부담에서 군현의 주민에 비해 상대적으로 차별을 받았다. 즉 그들은 군현의 주민에 비해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존재였다. 계층적으로도 군현의 백정농민층과 구별되는 잡척층으로 묶여 있었다. 같은 공민인 군현의 주민과 동류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했다. 요컨대 그들은 부곡제 영역에서 각종 규제를 받았지만, 본관과 성씨를 갖고 독자의 가계를 가지고 공민으로 생활한 점에서 노비와는 신분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고려시기 부곡제 영역의 주민 역시 같은 양인 신분인 군현의 백정농민층과 구별되면서 노비와는 신분적으로 다른 존재였다. 부곡인은 하층 양인층인 잡척층으로 분류되어 부곡제 영역이라는 독자의 영역 속에 거주했다. 부곡인은 천인이 아닌 양인이면서, 일반 양인과는 달리 계층적으로 잡척층으로 묶여 있으면서, 지역적으로 군현과 다르게 부곡 영역에 묶여 있었다. 이같이 부곡인은 〈경계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의 다원사회적 특성, 〈경계인〉 부곡인을 수용할 수 있었던 토대
그렇다면 이러한 〈경계인〉이 사회 구조적으로 수용되고, 그들의 역할이 용인될 수 있었던 고려 사회의 역사적 조건은 무엇일까? 고려왕조가 이질적이고 다양한 문화와 계층을 아우르는 다원사회의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고려 사회는 왜 이 〈경계인〉을 수용하여 제도화하는 정책을 취했을까? 크게는 다원사회라는 사회적 특성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고려 사회의 사회경제적 수준과 조건도 〈경계인〉을 수용한 원인이 되었다. 고려국가는 전체 민호民戶를 균일적으로 지배할 수 없을 정도로 지역별 발전 수준에서 차이가 심했다. 그에 따라 개별 민호 사이에도 사회경제적인 격차가 있었다. 그러한 지역과 계층 간 발전 수준과 사회경제적인 격차를 현실적으로 수용하여 지역과 사회의 통합을 이루기 위해 고려정부는 초기부터 본관제本貫制 지배 방식을 채택했다. 사회경제적으로 우세한 유력세력의 거주지를 본관으로 삼고 그들에게 성씨를 부여하는 한편으로 해당 지역의 정치 경제 군사의 중요성에 따라 주, 부, 군, 현의 단위로 편제하여 군현제 영역을 편성한 것이다. 또한 상대적으로 개발의 필요성과 가능성이 큰 지역과 국가 유지에 필요한 중요한 물품이 생산되는 지역을 부곡제 영역으로 묶어 개발과 생산을 촉진하여 국가의 재정능력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전국의 민民을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하여 양인에게 공역 부담의 의무를 부여하는 한편으로, 사로仕路 진출권 등 국가 질서에 참여할 수 있는 공민으로서의 권리를 부여했다. 반면에 천인은 국가에 대해 공역 부담의 의무가 없는 대신 공민으로서의 일체의 권리를 향유할 수 없었다. 고려시대 양인은 조선시기와 같이 단일한 계층이 아니라 군현의 백정농민층, 부곡의 잡척층 그리고 군인, 향리, 양반층 등 지배 질서에 참여한 정호丁戶층 등 다양한 층위를 이루고 있었다. 이같이 고려 사회 내부에 생산력의 지역적 불균등 현상과 사회경제적으로 개별 민호의 불균등성이 다양한 계층을 낳게 했던 것이다.

부곡 집단, 고려의 지배질서 수립에 큰 역할을 수행하다
부곡 집단은 한반도에서 실질적인 통합국가로 출발한 고려국가가 안고 있던 문제의 하나인 지역 간 발전 격차를 메꾸어 나간 매개체이자, 일종의 사회적 국가적 분업체제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수행했다. 〈경계인〉으로서 부곡인은 미개발 지역을 개발 지역으로 확장시키면서, 〈경계인〉의 테두리를 점차 넓혀가는 가운데 정치, 사회, 경제의 격차를 메꾸고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등 고려국가의 지배질서를 수립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부곡 집단이 가진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측면은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부곡, 해체되다

지배 집단의 수탈과 생산력 발달로 해체의 길에 접어드는 부곡 집단

부곡 집단은 주현과 달리 중앙정부의 직접 지배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어 향리 등 재지在地세력의 집중적인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소 지역에서 생산된 물품은 중앙의 기관에 직적 수납되었기 때문에 각 기관의 침탈을 많이 받았다. 각종 수공업제품을 생산한 소 지역을 비롯한 부곡과 속현 지역은 12세기 전반 주민이 대거 유망했으며, 12세기 후반 농민항쟁의 중심지가 되었다. 부곡제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점차 해체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부곡 지역의 해체는 수탈도 하나의 원인이지만, 생산력 발달이 해체의 또 다른 원인이 되기도 했다. 12세기에 접어들면 대부분의 토지가 개간되어 지역적인 발전 격차가 거의 해소되었다. 이로써 지역 간 발전 격차를 해소하는 매개체로서의 부곡제는 사실상 그 의의를 상실했다. 고려 중기 이후 부곡제는 재지 유력층이나 권세가 등 지배세력의 사적인 경제 기반을 확보하는 대상으로 변질되어, 사실상 본래의 기능은 상실되었다. 부곡제 지역이 농민봉기의 중심지가 된 것은 생산력의 발달과 주민의식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부곡인, 〈경계인〉의 한계를 벗어나다
원 간섭기 이후 고려와 원 나라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형성되면서, 부곡인은 자기 거주지를 벗어나 군인, 역관, 환관이 되어, 원나라에서 공을 세워 출세를 하거나 자신의 출신지를 군현으로 승격시키기도 했다. 부곡인의 계층 분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현실적으로 고려 사회에서 부곡 집단의 기능이 상실되었음을 뜻한다. 이 같은 변화는 부곡인이 〈경계인〉의 한계를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경제적 기능을 상실한 부곡 집단의 존속은 남아 있는 주민의 부담을 가중시켜 다시 유망의 악순환을 낳게 했다. 그것은 중앙정부의 군현제 운영에 커다란 짐이 되었다. 14세기 후반 고려정부는 속현과 부곡을 정리하는 군현 병합책을 통해 민폐를 줄이고 새로운 지방 질서를 수립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부곡 집단은 군현으로 승격되는 경우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영세한 대부분의 부곡은 주현에 병합되거나, 속현과 묶여 새로운 군현으로 편제되었다. 그렇지 못한 부곡 집단은 군현의 직할 촌락이 되었다. 조선 초기에 이르면 부곡 집단은 거의 해체와 소멸에 이르게 된다. 이같이 부곡 집단은 우리 역사에서 사회경제의 발전에 따라 지역과 계층 간 발전 격차가 점차 해소되면서, 그 본래의 의의를 상실하게 된다.

부곡 집단의 해체, 한국 중세 사회 변화의 분기점
조선왕조는 양천 신분의 제일화齊一化(고착화)를 통해 엄격한 신분질서를 유지하려 한 사회다. 또한 성리학 중심의 엄격한 가치 질서를 유지하려 한 사회다. 이러한 사회체제 아래에서 양천의 신분과 다양한 사상과 문화 속을 넘나드는 〈경계인〉은 존립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더욱이 성리학적 질서와 교화를 바탕으로 수령 중심의 대민 지배를 강조한 집권체제의 강화는 〈경계인〉의 입지를 더욱 축소시킨다. 이에 따라 전근대 부곡인과 같은 〈경계인〉은 조선왕조 이후 더 이상 존속할 수 없게 된다. 부곡 집단의 해체와 소멸은 한국의 중세 사회가 또 다른 단계로 발전하는 분기점이 된다.

부곡인, 경계 속에 갇힌 존재 그러나 경계를 넘어 역사 발전에 공헌한 존재

생계의 위협을 받았음에도 역사 발전에 기여한 부곡인

요약해 보자. 저자는 부곡인과 부곡 집단이〈경계인〉의 속성을 지닌 역사적 존재이며, 그렇게 봐야 이 집단과 그 주민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부곡인은 천인이 아닌 양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양인으로서의 대접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부곡 영역에 거주하여, 군현 영역에 거주한 일반 양인과 다른 취급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인인 노비와 달리 성씨와 가족을 갖는 등 독자의 가계를 꾸리고 국가에 세금을 내는 공민公民이었다. 그러나 공민인 일반 양인층보다 더 무거운 부담을 떠안아 항상 생계의 위협을 받는 불안정한 존재였다. 이처럼 경계 속에 갇힌 존재였지만 부곡인은 그러한 경계를 넘어 역사 발전에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개발되지 못한 지역에 거주해야 하는 처지였지만 적극적인 노력으로 자신의 주거지를 개발 지역화하면서 지역 간 발전 격차 해소에 일정부분 기여한 것이다. 이 같은 부곡인의 노력은 고려왕조가 정치, 사회, 경제의 격차를 해소하고 사회적 통합을 이루는 데, 다시 말해 지배질서를 수립하는 데 커다란 보탬이 되었다.

부곡 연구, 역사의 여백을 메우는 자양분
교육 현장에서 이야기되는 역사는 보통 지배자의 역사다. 전해지는 역사 자료들의 대부분이 지배자의 언행 기록물이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역사를 살다 간 수많은 사람들은 지배자가 아닌 평범한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삶이 그저 역사의 여백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삶에 눈을 돌릴 때 역사의 속살까지 오롯이 우리에게 펼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양인도 천인도 아니었던, 경계 속에 갇혀 있던, 그럼에도 경계를 넘어 역사 발전에 한 몫을 담당했던 존재 부곡인의 삶을 세세하기 조망하는 이 책은 역사를 읽는 우리의 눈을 넓히는 자양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