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한국정치의 이해 (책소개)/1.한국정치사상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2015 고상만) - 민주주의자 장준하 40주기 추모평전

동방박사님 2023. 1. 5.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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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중앙정보부 기록의 비밀
그리고 40년 만에 드러난 진실

광복군으로, 언론인으로, 정치인으로, 민주투사로
박정희 유신독재에 온몸으로 맞선 장준하의 외침을 새롭게 만나다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사후 40주기를 맞아 처음 공개하는 연설 전문

장준하 선생 서거 40주기를 맞아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는다. 바로 유신독재자 박정희에 의해 만들어진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 이하 중정)가 기록한 ‘장준하 동향 보고’이다.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중정은 왜 장준하를 불법으로 사찰하고 미행하고 도청했까? 이것은 그의 의문사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는 독재 권력(박정희와 중앙정보부)이 자신의 정치적 반대자 장준하를 어떻게 감시하고 탄압했는지를 낱낱이 ‘기록’한 책이다. 불의한 권력이 국민의 인권을 어떻게 유린했으며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똑똑히 증언하고 있다.

 

목차

* 프롤로그


* 서장
‘온순하나 날카로움’ 중정이 평가한 장준하
1967년 4월 22일 연설 전문 최초 공개


* 1장
광복군 장준하 1918~1962

1915년과 1918년, 두 개의 출생 연도
일제 향한 첫 항거, 1937년 동맹 시위
신안소학교 교원에서 일본 유학까지
김희숙과 장석인을 지켜낸 희생
장준하의 평생 벗 김준엽
임정을 향한 6000리 대장정과 《등불》
“임정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다”
한반도 잠입 위해 OSS 요원이 되다
백범의 죽음과 한국전쟁
1953년 《사상계》를 창간하다
한국인 최초로 받은 막사이사이상
장준하와 5·16 군사쿠데타
“장준하 선생이 대통령에 출마했다면”
‘혁명 공약’ 깬 박정희의 거짓말
장준하와 박정희, 숙명적인 충돌
* 2장
중앙정보부, 장준하를 기록하다 1963~1973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유세 발언
박정희의 굴욕적 한일조약
6·3 사태와 계엄령 선포
‘국가원수 모독죄’로 구속되다
“단 한 사람, 박정희만은 안 된다”
“부정선거, 도둑 맞지 마십시오”
중정의 《사상계》 부도공작
두 번째 구속, 옥중출마 선언하다
“국회의원 명함 한 장 있어요?”
본격적인 미행과 사찰, 도청
박정희 ‘3선 개헌’ 날치기 통과
두 번째 쿠데타 ‘10월 유신’
유신독재에 저항하다
김대중 납치, 정치인 암살 신호탄?
‘납치 주범은 누구인가’ 이철희의 증언
중정이 기록한 1973년 첫 시국 선언
유신독재 정조준 ‘100만인 서명운동’
다급해진 박정희의 최후통첩


* 3장
장준하, 박정희를 넘어서다 1974~1975. 7.

장준하의 입을 막아라
‘긴급조치’ 발동부터 연행까지
“개헌에 대한 소신은 변함없다”
차라리 감옥에서 죽겠다
“장준하를 석방하라” 박정희의 굴복
《돌베개》를 다시 쓰다
〈동아일보〉탄압과 장준하의 응원
유신헌법 찬반 투표에 반대하다
‘개헌안 단일화 촉구’ 기자회견
중정의 ‘위해분자 관찰계획 보고’
유신독재 타도 위해 전부를 걸다
김대중과의 화해, 그리고 결단
2차 100만인 서명운동을 도모하다
‘장준하의 거사’ 알고 있었던 중정


* 4장
장준하, 영원히 살다 1975. 8.~2013

고통과 희망, 그리고 비극의 8월
그날 중정은 무엇을 기록했나
사인 의혹 보도로 추방된 외신 기자
그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어둠과 싸운 사람만이 빛이 된다
국민 가슴속에 묻힌 큰 별, 장준하
죽어서도 계속된 중정의 감시
37년 만에 밝혀진 타살 증거
위대한 ‘대한민국 애국자’ 장준하

* 에필로그

* 연보

 

저자 소개

저 : 고상만
 
1970년 경기도 판교에서 태어났다. 1989년 대학에 입학하여 학생운동을 시작했고 지금까지 인권운동가의 길을 걸어왔다. 1992년 ‘유서대필 강기훈 무죄석방 공대위’를 시작으로 ‘전국민족민주 유가족협의회’, ‘전국연합 인권위’, ‘천주교 인권위’ 등에서 활동가로 일해 왔다. 2002년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와 2006년 ‘대통령소속 친일 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에서 조사관으로 일했다. 이후 서울...
 

책 속으로

장준하의 비판은 마침내 당시 독재자인 박정희를 정조준했다. 절대적 권력자인 대통령 박정희를 향한 장준하의 비판은 칼처럼 날카로웠고 도끼처럼 무서웠다. 특히 장준하는 박정희의 이념적 정체성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박정희 씨를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말로 시작하는 장준하의 사상적 공세는 정말 의외다. 대한민국에서 사상 문제로 박정희가 공격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장준하는 무슨 이유로 박정희를 사상 문제로 공격했을까.
--- p.30

먼저 1966년 10월 15일 야당인 민중당이 포문을 열었다. 민중당이 대구에서 개최한 ‘특정 재벌 밀수 진상 폭로 및 규탄 국민대회’에 초청 연사로 등단한 이는 장준하였다. 그는 박정희를 정조준하여 포문을 연다. 박정희를 향해 입 한 번 벙긋하기도 어려운 그때, 인파가 가득한 집회장 연단에서 장준하는 거침없는 명연설을 남긴다. 바로 ‘박정희 밀수 왕초’ 발언이었다.
--- p.144

장준하의 고단한 경제적 처지를 유추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형편은 국회의원 2년차가 되는 1968년에도 나아지지 않았다. 심지어 장준하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1975년까지도 그의 경제적 상황은 더 나빠지면 나빠졌지 좋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러한 경제적 곤란으로 인해 오히려 장준하의 대중적 인기가 올라가고 있다는 특이한 중정 동향 보고가 눈에 띈다. 장준하가 국회의원을 2년째 하고 있던 1968년 6월 22일 중정의 동향 보고이다.
--- p.170

김종필의 경고에 장준하 역시 화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월 28일 청원운동 본부장이었던 장준하는 김종필에게 반박한다. 다음은 중정의 동향 기록이다.
“73. 12. 28. 김종필 국무총리 담화에 대한 장준하 청원운동 본부장의 발표. -헌법 개정 청원은 국민의 권리임과 동시에 의무다 -청원운동을 혼란, 또는 선동으로 적대시하는 것은 민의의 소재를 알아보지 않겠다는 의도다 -대통령에 대한 청원운동은 계속할 것이다.”
--- p.207

장준하는 박정희가 보낸 연말의 최후통첩에 대해 늦은 답변을 내놓는다. 하지만 그건 박정희가 원하던 답이 아니었다.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1974년 1월 5일의 장준하 동향 기록이다.
“개헌청원운동에 대한 성명 발표 -오늘의 정치 정세 전망은 밝지 못하다 -말과 비판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비롯됐다. -따라서 대통령에게 이를 청원하려는 것이고 -당국은 이를 막지 말라.”
장준하의 성명은 간결했으나 명확했다. 박정희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입장이었다. 이 시기, 장준하에 대한 중정의 감시와 미행 역시 최고 수준이었다.
--- p.211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장준하는 여전히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박정희는 국민투표 결과를 통해 국민이 유신체제를 지지한다고 생각했겠으나 장준하는 부정선거로 얻은 불의한 결과라며 인정하지 않았다. 장준하는 그러한 뜻을 개인성명과 기자회견 등의 방식으로 계속해서 박정희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중정은 1975년 3월 31일 장준하에 대한 모종의 계획을 수립한다. 훗날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조사 과정에서 확인된 이때의 계획은 이른바 ‘위해분자 관찰계획’이었다. 당시 중정 6국 과장의 주도 아래 작성된 이 보고는 나중에 장준하의 의문사와 맞물려 엄청난 의혹을 사게 된다.
--- p. 255

중정 역시 장준하의 이 같은 거사 계획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가 바로 1975년 3월 31일 장준하를 상대로 중정이 작성한 ‘위해분자 관찰계획 보고’이다. 중정은 장준하를 감시하면서 많은 보고서를 만들어냈는데, 그중 유일하게 비밀로 분류된 문서가 이것이다.
이 보고서는 “장준하의 개헌운동 계획을 사전 탐지해 와해, 봉쇄함으로써 조직 확장과 세력 확산을 방지하고 공작 필요시 ‘보고 후 실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장준하가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재추진할 시 이를 저지하는 공작이 필요할 경우 ‘보고 후 실시’하라는 내용이었다. 장준하는 이 보고서가 만들어진 후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보고서가 만들어지고 나서 불과 5개월 뒤의 일이었다.
--- p.268

나는 장준하가 스스로 자신의 묘 뒤편 석축을 무너뜨려 사람들이 묘를 열어보지 않을 수 없도록 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장준하의 투쟁은 죽어서도 치열했고 멈추지 않았다. 그러한 투쟁은 바로 1967년 박정희의 재선을 막기 위해 장준하가 외쳤던 그 유명한 연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국민 여러분. 대한민국에서는 일정한 자격과 조건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통령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단 한 사람, 박정희 씨만은 절대 대통령을 할 수 없습니다. 박정희 씨는 이 민족을 배신한 친일파요, 사상을 알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 p.318
 

출판사 리뷰

중앙정보부 기록의 비밀
그리고 40년 만에 드러난 진실

광복군으로, 언론인으로, 정치인으로, 민주투사로
박정희 유신독재에 온몸으로 맞선 장준하의 외침을 새롭게 만나다


■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사후 40주기를 맞아 처음 공개하는 연설 전문
장준하 선생 서거 40주기를 맞아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는다. 바로 유신독재자 박정희에 의해 만들어진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 이하 중정)가 기록한 ‘장준하 동향 보고’이다.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중정은 왜 장준하를 불법으로 사찰하고 미행하고 도청했까? 이것은 그의 의문사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는 독재 권력(박정희와 중앙정보부)이 자신의 정치적 반대자 장준하를 어떻게 감시하고 탄압했는지를 낱낱이 ‘기록’한 책이다. 불의한 권력이 국민의 인권을 어떻게 유린했으며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똑똑히 증언하고 있다.

■ 중정 자료를 토대로 장준하 일대기를 엮은 이유
저자 고상만은 2년 전 우연한 기회로 중앙정보부의 ‘장준하 동향 보고’를 입수했다. 저자는 이것을 운명으로 여겼다.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장준하 선생 의문사를 담당했던 저자는 박정희 독재 권력하에서 숨진 장준하 선생이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을 세상에 대신 알려달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싸우다가 박정희 유신독재에 쓰러진 장준하를 오늘날 후세의 사람들이 새롭게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준하의 삶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고, 그가 무엇을 위해 누구와 싸웠으며 그 과정에서 어떤 탄압과 고통을 받았는지를 중정의 감시 기록을 바탕으로 낱낱이 공개했다.
한편 장준하 선생을 상대로 한 중정의 초법적인 사찰은 엄연히 명백한 범죄 증거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절대 일어나선 안 될 불법 행위를 그때 막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제대로 알려야 한다. 불행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중정이 장준하 선생을 상대로 한 사찰, 미행, 도청, 사설 정보원을 활용한 정보 수집 등 불의한 권력의 실태를 고발한다.

■ ‘민주주의를 밝힌 등불’ 장준하의 삶과 진실에 한 발 더 다가서다
이 책은 박정희 독재 권력하에서 누구도 기록할 수 없었던 장준하 선생의 살아 있는 말과 행동을 오늘에 다시 되살려낸다. 역설적이게도 장준하의 모든 것을 감시하고 기록한 중정 덕분이다. 장준하를 가두고 처벌할 목적으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 선생의 말과 글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장준하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중정이 녹취해 기록한 장준하 선생의 대중 연설 가운데 한 대목을 소개한다. 바로 1967년 4월 22일 남산야외음악당에서 있었던 야당 대통령 후보 지지를 위한 장준하 유세이다. 그는 이날 유세에서 박정희 정권의 실정과 탐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당시의 정치적 시대 상황과 장준하 선생의 거침없는 비판과 분노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박정희 씨를 나는 믿을 수가 없는 사람이요. 왜 박정희 씨를 믿을 수 없느냐? 사상이 없는 사람이요, 일본 군벌과 천왕에 충성을 다한 사람이요. 황도주의를 그렇게 좋아하더니 하룻밤 사이에 남북으로 조국이 갈라지고 공산당의 조직이 강해지니까 군대 내에 있어서 공산주의 조직과 빨갱이들과 완전히 결합되었었다고 소문이 자자하드군요. 그러든 박정희 씨가 군사쿠데타를 하고 나드니 행정적 민주주의를 들고 나왔어요. 그러드니 행정적 민주주의는 온데간데 없고 민족적 민주주의, 민족적 민주주의란 것은 우리 당의 정책위원장이신 부완혁 선생이 전번 선거 때 박정희 씨가 민족적 민주주의를 내세웠을 때 《사상계》에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이야기를 썼어. 바로 전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가 아직도 공산화되지 않은 비공산주의 국가에게 공산화시키기 위해서 새로 만든 용어가 민족적 민주주의라 했소.”

“그러면 그 민족적 민주주의는 온데간데없고 박정희 씨가 정권을 잡은 4년 동안 무엇을 했습니까. 가장 악질적인 군사독재주의로 모든 인권을 짓밟고, 모든 여론을 탄압하고, 모든 야당을 돈으로 매수하고. 오늘도 어떤 소식을 들으니까 군소 정당을 잔뜩 만들어가지고 여기다가 어떤 기관에서 돈을 준다고…… (중략)
여러분 우리도 정신 차릴 때가 온 것입니다.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아무런 사상을 가지지 못한 암흑 심야에 파도가 치는 일엽편주에 나침반을 잃고 선장도 없이 6년 동안을 끌어온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끝장이 온 것입니다. 박정희 정부를 합법적으로 타도하고, 새 나라를 건설하여줄 것을 당부하는 바입니다.”

민주주의자 장준하 선생이 독재자 박정희의 실체를 날카롭게 고발한 당시의 말은 이처럼 오늘날 생생하게 복원된다. 그 정의로운 외침이 40년의 세월을 지나서 이제야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다가오게 된 것이다.

“중정의 동향 기록과 중요 상황 보고를 토대로 이 책을 썼지만 해석만큼은 중정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장준하가 남긴 말과 글을 장준하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장준하의 유족과 동지들이 증언하는 수많은 글과 책을 함께 담아 장준하의 일대기를 온전히 드러내려 한다. 그리하여 40년을 넘는 긴 세월을 돌고 돌아 이제라도 장준하의 외침이 제대로 평가될 수 있기를 염원한다.” - [프롤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