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대한민국사 이해 (독서)/3.민주화운동

그들의 5.18 - 정치군인들은 어떻게 움직였나

동방박사님 2023. 1. 5.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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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신군부는 무엇을 노리고, 어떻게 움직였나
1980년 5월 광주의 진실, 새롭게 보기


올해는 5·18이 일어난 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뀔 만큼의 시간이 흘렀지만 5·18은 현재 진행형이다. 특별법 제정, 국회 청문회, 진상규명위원회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무엇보다 ‘북괴군 침투설’을 비롯해 계속되는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과 폄훼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그들의 5·18―정치군인들은 어떻게 움직였나』는 그동안의 5·18에 대한 접근이 주로 항쟁의 주역들을 중심으로 한 것과는 달리 군을 중심으로 5·18을 재구성하고 있다. 이를 위해 보안사령부 자료를 비롯한 방대한 군 자료를 비판적으로 분석, 검토하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이자 미덕이다.

 

목차

책머리에
서장| 5·18진상규명투쟁의 역사

1_유신의 그림자
박정희 정권의 유산
군의 정치 동원에 물꼬를 트다
새로운 정치군인들, 신군부
정치군인들, 학원소요를 ‘고대’하다
육군본부의 시위 진압지침

2_5·17쿠데타-비상계엄 전국 확대
신군부, 학생 시위에 군 투입을 벼르다
군사작전을 방불케 한 시위대책
대국민사기극, ‘북풍北風’
‘서울의 봄’을 앗아간 5·17쿠데타

3_항쟁의 시작
군대, 대학을 점거하다
군, 정치 개입에서 권력 장악으로
비상계엄의 실체

4_폭력과 야만의 시간
가자, 도청 앞으로!
5월 18일, 그날의 시작
학생 시위에서 시민항쟁으로
군의 최초 발포는 언제인가?
도시게릴라식 난동을 진압하라!
공수부대의 소요 진압을 넘어선 ‘폭동 진압’
왜, 광주였는가

5_항쟁과 발포 사이
차량 시위와 집단발포의 시작
두 구의 시신, 항쟁의 전환
누가 실탄을 지급했고, 발포를 명령했나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는 희생자 규모
시민들, 언제 총을 들었는가
군의 작전 변경, 광주 외곽을 봉쇄하라
민간인 학살과 오인 사격의 조작
광주의 소식을 전하다
두 개의 지휘권

6_일어서는 광주
시민들, 공동체를 지켜내다
시민군의 수습안 대 무장해제
항쟁파가 주도권을 쥐다
‘폭도’와 양민 분리와 배제의 의미
군, 상무충정작전을 준비하다
상무충정작전 실행 전야
아! 5월 27일 새벽
시민을 상대로 한 전투의 후과

5·18항쟁이 남긴 과제
주석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 : 노영기
 
전남 영광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초·중·고·대학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대학원에서 한국현대사를 공부했다. 조선대, 성균관대, 충남대, 서울대에서 강의했으며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을 지냈다.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에 교수 재직하고 있다. ‘왜 국민의 군대가 국민들에게 총을 쏘았을까?’라는 질문을 안고서 한국현대사 공부를 시작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 2007년까지 조사관으로 활동하며...
 

책 속으로

1980년 2월 18일 육군본부에서는 1·2·3군사령관과 특전사령관, 수경사령관에게 특별지시를 내렸다. 후방의 충정부대에 특별지시를 내린 것이다. 1/4분기의 폭동진압교육훈련(충정훈련)을 2월 중 조기 실시해서 완료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공수부대도 정규 교육훈련을 거의 포기한 채 오로지 충정훈련에 매진했다. 주간에는 CS탄, 500-MD 헬기와 장갑차까지 동원됐고, 매일 밤 출동 준비 군장을 꾸렸다가 해체하는 혹독한 훈련이 기계처럼 반복됐다.
--- p.66

이 무렵(80년) 육군본부는 「충정작전 대비지침」이라는 문건을 작성했다. …… 이 중 1980년 5월 광주에서 지켜진 방침은 “군 투입 시 강력한 응징”뿐이었다. 군은 1980년 5월 18일 이후 광주 시내에서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경찰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다. 5월 18일 오전 금남로 시위에서 시위대의 기세가 경찰을 압도한 것도 아니었는데 정부와 군은 이날 오후 4시부터 공수부대를 투입시켜 시민들을 “강력”하게 “응징”했다. 이전에 작성한 육군본부의 시위 진압지침조차 지켜지지 않았다.
--- p.73

육군본부 작전교육참모부는 4월 19일 이전부터 시위 진압에 대비한 공중지원 방안을 연구하여 「소요진압 공중지원 방안 연구」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공지空地 협동작전으로 조기에 소요 군중을 무력화하여 병력 및 장비의 피해를 방지하고 신속한 작전 종결을 보장”하려는 목적에서 작성됐다. 육군본부는 1항공여단에 중앙기동부대인 5개의 항공조를 편성, 대기하도록 지시했고, 특전사령부에는 공중 지원에 소요되는 화학탄과 화염방사기 및 병력을 1항공여단에 지원하며, 각급 부대는 500MD 운용계획을 수립하고 필요한 훈련을 실시토록 지시했다.
--- p.90

5월 21일 전남도청 앞을 비롯해 광주 시내에서 계엄군이 집단발포하고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다음 날인 5월 22일에도 남북회담 실무진이 판문각에서 접촉했다. 이후로도 두 차례나 더 만났으나 남북 실무 접촉에서 어떠한 합의에도 이르지 못한 채 마무리된다. 국민들에게는 북한의 남침 위협 때문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면서 그 위협의 배후이자 당사자인 북한과 실무 접촉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와 국무회의가 열리기 전부터 전두환은‘ 결정적 시기’를 운운하며 군 동원을 계획하고 있었으며, 정부의 발표가 있기 전부터 군에서는 병력 투입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12·12군사반란으로 군 지휘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이미 정권 장악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 p.112

정부와 신군부의 주장처럼 북한의 남침 위협 때문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국가 보안시설의 경계를 강화하고 계엄군 병력도 그곳에 집중 배치되어야 하는 게 상식에 맞다. 그런데 이날 전국 국가 보안시설에 배치된 계엄군의 비율은 채 1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 …… 계엄군 병력의 90퍼센트 이상이 휴교령이 내려진 대학에 배치된 것은 이 무렵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 그중에서도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을 이끌던 대학생들의 시위에 군대를 투입하여 물리력으로 억누르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 p.127

5월 19일 12시 38분에 금남로 인근의 계림2동에서 동구청에 올린 보고에는 “오늘 정오에 전 시민 금남로에 집결. 전두환 일가가 물러갈 때까지 계속 투쟁한다. 시민을 총칼로 선량한 학생, 부녀자의 옷을 벗기고 구타한 사실 알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 오후 2시 45분경에 시위 대열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군경과 대치했는데, 광주은행 아치를 깨고 군중 7,000~8,000여 명이 드럼통에 기름을 부어 불을 지르며 공수부대에 대항했다. 시민들은 각목이나 돌을 들고 공수부대에 적극 맞섰다. 5월 19일 오후 학동에서 2명의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을 구타하다가 오히려 시민들에게 구타당해 중상을 입었고, 또 오후 4시 5분경 부동교 옆에서 공수부대원이 학생을 쫓다 시민들에게 붙잡혀 구타당한 뒤 부상을 입어 적십자병원에 입원했다.
--- p.193

5월 19일의 최초 발포인지, 다음 날 광주역 앞에서 자행된 3공수여단의 집단발포인지, 아니면 5월 21일의 집단발포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특전사령부의 「광주사태작전(‘전투’ 상보-인용자)」의 ‘분석 및 교훈’편 ‘작전 실시 면’에서 “사격 통제 및 군기 결여”를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군 스스로도 발포와 군기에서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 p.195

공수부대원들이 처음부터 광주 시민 모두를 (시위) 주모자로 분류하지는 않았다. 진압 초기에는 젊은 사람들 위주로 체포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진압과 체포 대상이 무한정 넓어졌다. 공수부대원들의 손에는 진압봉과 M-16소총이 들려 있었고, 때로는 M-16소총에 대검도 부착되어 있어 이들은 광주 시내 한복판에서 대상을 가리지 않고 진압봉과 개머리판, 대검을 꽂은 총검을 마구 휘둘러댔다. 길가에 서 있기만 해도 최루탄을 발사할 정도로 대상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 p.222

5월 18일 공수부대원들은 광주에서 가장 번화한 시가지였던 금남로에서 시민들을 진압봉과 개머리판으로 무자비하게 구타했으며, 때로는 총검까지 휘둘러 시민들에게 엄청난 상처와 피해를 입혔다. 5월 19일에는 무자비한 폭력에 더해 연행한 시민들의 겉옷을 벗기고 속옷만 입힌 채 금남로 한복판에서 기합을 줬다. 겉옷을 벗기는 행태는 연행자들에게는 수치심과 모욕을, 이 참혹한 광경을 목격한 시민들에게는 공포심과 분노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 p.225

세 사람은 모두 육사 11기 출신의 신군부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이 회의는 광주의 상황을 토의하는 군 최고 지휘부와 신군부의 연석회의이다. 그런데 광주의 상황을 보고받고 자위권 발동, 상무충정작전의 실시 등과 같은 가장 중요한 결정을 했을 군 최고 수뇌부 회의의 회의록과 같은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다. 회의록이 아닐지라도 각각의 중요 결정 사항에 대한 명령서조차도 사라졌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 회의와 관련된 자료들을 없앤 것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 p.266

광주 외곽의 봉쇄와 함께 전남 해안의 경계태세 강화를 명령한 것이다. 실제로 전교사와 향토사단인 31사단에서는 해안 경계를 강화했다. 즉 당시 계엄군은 광주 외곽뿐 아니라 전남의 해안선을 봉쇄했기 때문에 애초부터 북한군의 침투가 불가능했다.
--- p.314

주남마을 뒷산에 위치한 11공수여단 상황실에서 부상자들의 상태를 본 11공수여단 장교가 부상자들을 왜 데리고 왔느냐며 책망하자 상황실 주변에 있었던 11공수여단 62대대 병사들이 부상자들을 처리했다. 인근 야산 중턱으로 손수레를 몰고 간 한 병사는 누군가가 안락사시키자고 한 후 사살했다고 말했다. 시신을 묻고 났을 때는 해가 질 무렵이었다고 했다.
--- p.321

5월 24일 군 편의대원들조차 “전날 총성이 멎고 흉악범들의 강도 소행 등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 시민들은 다소 안심하고 있으며”, 학생들의 자율적인 질서 확립으로 인해 일반 관공서와 경찰의 정상 출근을 촉구하고 있고, 시위 학생들이 간첩 용의자의 체포를 협의했다고 보고할 정도로 광주 시내는 평화로웠다.
--- p.363

당시 계엄사령부에서조차 “항쟁이 장기화되면 이를 이용하여 불순분자나 북한의 무장공비의 침투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말했다는 점이다. 오늘날 5·18을 왜곡하는 세력들이 ‘북한 특수부대원들의 침투’를 5·18항쟁의 배경으로 내세우지만, 1980년 5월 당시에는 군에서조차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군에서조차 북한의 ‘침투가능성’이라고 할 뿐이었다.
--- p.395

김명숙은 계엄군의 검문을 두려워하여 도망치던 중 계엄군의 총격으로 사망하는데, 당시 나이 14세의 여중생이다. 16세의 염행렬은 계엄군의 총격에 배를 맞고 사망했다. 이날의 희생자들을 보면 당시 계엄군이 신분을 확인하지 않은 채 무차별 총격을 한 것이 증명된다. 상무충정작전의 지침 중에는 생포하라는 내용이 있었으나, 공수부대가 침투한 곳뿐 아니라 특공작전이 끝난 뒤의 광주 시내에서도 이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 p.416
 

출판사 리뷰

신군부는 정치 개입을 ‘예비’했다

지은이는 5·18의 역사적 맥락을 인과관계에 따라 추적하고 있다. 우선 군의 정치적 동원(계엄령과 위수령, 긴급조치 등), 공수부대의 시위 진압 투입, 정치하는 군인들(신군부) 등이 박정희 정권이 남긴 유산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1979년 10·26 이후, 12·12군사반란을 통해 군 지휘권을 장악한 이후 신군부가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를 검토하고 있다. 이어 보안사령부의 부마항쟁 평가와 육군본부의 보고서에 1980년 공수부대의 폭력이 배태되었으며, 이 같은 군의 강경 진압을 부추기는 지침이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공수부대에 의해 더욱 잔혹하게 적용되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신군부는 시위 진압용 ‘충정훈련’을 강화했으며, 5월 15일 대학생 시위대의 ‘서울역 회군’ 등 군 투입의 명분이 희석되는 와중에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등 정치 군인들의 ‘야욕’은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무리수의 시작, 공수부대 투입

5월 18일 오후 4시경부터 광주 시내에 공격형 특수부대인 공수부대의 투입이 결정되었다. 충분한 경찰 병력이 있었음에도 그랬다. 지은이는 공수부대의 시위진압 양상이 어떠했는지를 군과 민간의 자료를 통해 재구성하고 있다.

1980년 2월경부터 진행된 충정훈련(폭동진압훈련)과 공수부대원들의 인식, 상부의 명령이 공수부대원들에게 끼친 영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공수부대원들의 폭력적이며 야만적인 행위를 초래했다. 진압과정에서 나타난 공수부대원들의 폭력과 야만, 김대중 연행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중첩되어 5월 19일부터 학생 시위가 시민항쟁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5월 19일 군의 최초 발포가 있었으나 정식 명령계통(공수부대-31사단-전교사-2군사령부-계엄사령부)에 따른 보고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보고된 부대(공수부대-보안사령부와 계엄사령부)에서도 적절한 후속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것은 이후 발생한 군의 발포에서 공통된 현상이다.

북괴군 침투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1980년 5월에는 ‘남북 총리회담을 위한 실무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미국(한미연합사)과 육군본부에서도 ‘북괴 남침설’이 근거 없다고 판단했다. 실제로도 외곽 봉쇄 기간에 군은 광주를 드나드는 국민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총격을 가해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했을 정도로 군은 광주 외곽을 봉쇄했을 뿐더러 해안 경계를 강화했기 때문에 북한군의 광주 침투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신군부 스스로 이를 주장하는 것은 경계 실패를 드러내는 자기모순인 만큼 ‘북괴 남침설’은 ‘북풍北風’이자 대국민 기만행위에 불과하다.

공수부대는 시민을 ‘적’으로 간주했다

시민들의 저항은 5월 20일 오후 차량시위를 계기로 상승했다. 이날 밤 광주역 부근에서 공수부대의 집단발포와 광주역에서 전남대로의 철수가 있었는데, 이와 관련된 어떠한 명령도 내려지지 않았음에도 집단발포와 철수가 이루어졌다. 이후 5월 21일 집단발포로 인해 많은 시민들이 희생(최소 55명 이상 추정)되거나 다쳤다.

상무충정작전은 단순히 무력 진압이 아닌 ‘국민들을 상대로 한 전투’였음은 탱크 18대, 무장헬기 등 작전에 임하는 부대의 장비와 군인들의 의식과 작전 활동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1980년 5월 열흘간 광주에서 ‘작전’을 편 군부대가 51만여 발의 총탄을 소모했다는 군 자료가 이를 입증한다. 2차 대전 때 쓰인 카빈 소총과 최신 M-16의 대결은 흡사 격투기 선수와 어린 아이의 싸움으로 보아도 지나치지 않다.

군 내부 지휘권은 따로 놀았다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이후 계엄사령부는 실무적인 역할에 그치고 있으며 정치적 사항에 대해서는 보안사령부가 장악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지휘권의 이원화인데 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전교사 사령관 교체와 5월 24일 두 건의 오인사격이다. 전남북 계엄분소장으로 광주 전남의 계엄업무를 지휘하는 전교사 사령관은 뚜렷한 이유 없이 5월 21일 교체되었다. 보다 큰 문제는 5월 24일 오전과 오후에 발생한 오인사격이다. 군은 사전에 실탄통제, 수하誰何 등을 명령했음에도 하루에만 두 차례나 발생했다. 오인사격 중 오후에 발생한 송암동 오인사격은 이후 보복학살이 있었다. 게다가 이날 오인사격의 희생자들은 ‘폭도와의 교전’에 의한 전사로 왜곡되었다.

과제는 여전히 남았지만 의미 있는 진전

지은이는 이 책이 ‘미완’이라고 여운을 남긴다. ‘세척’되거나 묻힌 군 자료를 복원하고 발굴해 시민에 대한 사격 명령의 진상, 여성 피해자들 이야기 등 왜곡과 조작을 넘어 광주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풀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그들의 5·18』은 그동안 발굴되지 않았던 각종 자료를 통해 많은 사실을 밝히고 있다. 예컨대 안종훈 장군이 5월 17일 오전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군의 정치적 동원에 반대한 사실(104쪽), 박춘식 장군이 무력 진압(상무충정작전)에 반대한 사실(384쪽)이 그렇다. 지은이의 학문적 겸양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광주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의미 있는 진전’이라 평가받아야 할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