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한국근대사 연구 (책소개)/1.한국근대사

한반도의 깊은잠 - 아편전쟁에서 일본의 개국까지

동방박사님 2023. 1. 21. 11:50
728x90

책소개

가장 냉철하고 객관적인 한국 근현대사

우리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 조선후기부터 개항과 망국까지, 세계사의 판 위에 우리 역사를 포개놓고 우리가 누구인가를 찾아가는 최초의 이성적인 작업! 『세계사와 포개 읽는 한국 100년 동안의 역사』는 한국 근현대사의 실체와 그 멘탈리티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시기 세계는 패권 세력 영국과 G2로 부상하는 도전 세력 러시아의 각축장. 청나라는 이미 제국주의의 먹잇감으로 전락했고, 일본은 변화의 몸부림을 친다. 조선, 아~ 조선은 여전히 성리학자들의 무지한 세계인식-소중화주의가 국가정체성을 이루고 쇄국의 노선을 택한다.

저자 김용삼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롭고, 엄정하고, 깊이있는 눈으로 한국근현대사를 그야말로 가슴으로 쓰고 있다. 방대한 자료 수집, 냉철한 세계 인식, 진정성 -이 모두를 두루 갖춘 한 탁월한 역사 저술가의 탄생에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목차

제1권 서문

서론_ 잠자는 한반도
제1장_ 천자의 중국, 천황의 일본
제2장_ 해금(海禁)에서 개방으로
제3장_ 은(銀)의 세계사
제4장_ 조선, 멎어버린 역사 시계
제5장_ 모피와 도자기의 세계사
제6장_ 영국의 동아시아 야욕
제7장_ 제1차 아편 전쟁
제8장_ 제2차 아편 전쟁
제9장_ 러시아의 동아시아 진출
제10장_ 동아시아 3국의 근대 수용 태도
제11장_ 일본의 개항과 개국
제12장_ ‘부국강병’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

제1권 연표
참고문헌
 

저자 소개

저 : 김용삼
 
대전고, 중앙대 문예창작과, 경남대 북한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조선일보 기자, 시사월간지 [월간조선] 편집장, 경기도 대변인, 경기콘텐츠진흥원 감사를 역임했다. [월간조선] 기자로 활동하며 50여 개국 현지 취재를 통해 전·현직 국가원수 4명을 특종 인터뷰했다. 또한 황장엽 망명사건 특종보도로 제1회 대한민국 언론상 수상, 2008년 해양사상 보급에 공헌한 공로로 장보고대상을 수상했다. 2013년 『이승만과 기업가...
 

책 속으로

조선 후기, 한반도를 강타한 서세동점(西勢東漸)은 말 그대로 질풍노도였다. 그 격렬한 사조가 이 땅을 강타한 이래 한반도에는 두 가지 사고 체계가 대립 격돌했다. 하나는 주자 성리학의 고수를 선명한 기치로 내걸고 기존 체제(조선 왕조·대한제국)의 유지를 외친 위정척사, 즉 폐쇄·고립·쇄국의 길이었다. 다른 하나는 개국, 즉 개혁·개방을 통한 근대화의 길이었다.

이 두 상반된 가치관은 1876년 일본에 의한 개항 이래 지금 이 순간까지 한국인들을 두 패로 갈라 죽기 아니면 살기, 서로 마주보고 달리는 기관차 식의 충돌과 대립을 야기하고 있다. 남한과 북한, 좌익과 우익, 자유시장경제와 사회주의 계획경제, 진보와 보수, 자유통상 대 자력갱생, 개인의 자유와 파쇼적 전체주의, 해양 문명과 대륙 문명,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친미·친일과 친중·친북……. 이 모든 대립 구도의 핵심 본질에는 ‘쇄국 대 근대화’라는 가치관 충돌이 자리 잡고 있다
--- p.5~6

우리에게 과연 근대는 있었는가? 있었다면 그 시작은 어디서부터인가? 세계사가 격동할 때 이 나라 지도층은 어떤 대응을 했기에 이 나라가 폐망의 낭떠러지로 추락했을까? 대한제국은 을사오적이 나라를 팔아먹어 망한 것이 사실일까? 지금까지 우리는 망국의 원인을 단 한 번도 이성적이고 지성적으로, 심지어 역사적 사실이 무엇이었는지를 객관적으로 성찰한 적이 없다.

잘 지는 것이 지저분하게 이기는 것보다 낫다. 잘 망해야 교훈이라도 얻기 때문이다. 그러한 교훈을 얻기 위해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의 회오리가 몰아치는 아편 전쟁 시기부터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의 순간까지를 추적하여 기록으로 남겨보고자 이 책의 집필에 도전했다.

세계사의 판 위에 우리 역사를 포개놓고 우리의 진짜 모습을 조망하는 작업. 그것은 우리 근대사의 있는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가슴 아픈 일인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그 노력의 결실을 열 권의 책에 담기 위한 대장정을 시작한다.
--- p.15~16

효종 시대를 풍미했던 북벌론은 청나라 정벌이 진짜 목적이 아니라 병자호란 패배에 대한 책임 면피용이었다. 호란 이후 닥칠지 모르는 정치· 경제적 위기를 퉁치고, 자신들의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한 고도의 프로파간다(선전)였다. 때문에 북벌론은 애초부터 현실성이 완전 결여된 ‘환각의 전투’였다. (……)

약발이 떨어진 북벌 담론이 정치적 파괴력을 상실하자 조선의 양반 지배층은 새로운 어젠다 세팅에 돌입했다. 현실과 이상의 참담한 괴리를 겪은 조선 지배층은 정서적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상상의 날개를 활짝 펼친다. 급기야 이들의 무력감은 정신적 질병으로 발전했다.

그들은 만주족이 세운 청을 ‘중화의 중심이자 천자의 나라 명을 멸망시킨 강도’ ‘문명의 공적(公敵), 더러운 원수의 나라’로 설정했다. 그리고 이미 멸망하여 사라진 명나라에 의리를 지킨다는 배청복명·존명사대 등 비이성적이고 비현실적인 판타지의 세계로 도피했다.
--- p.142~143

동도서기론은 서양과 일본 세력의 척결(척양척왜斥洋斥倭)을 주장한 위정척사론과 맥락을 같이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국가의 자강을 도모하기 위해 서양의 과학 기술 문명을 일정 부분 수용하자는 입장이다. 동도에 위배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서기를 수용한다는 방법론은 중국에서 추진했던 중체서용론과 흡사한 인식 체계였다. 그 결과 중체서용과 마찬가지로 심각하고 뚜렷한 한계를 안고 있었다. (……)

그들이 사력을 다해 지켜야 할 ‘그 무엇’은 우리 고유의 전통적 가치관이나 철학이 아니라, 외부에서 수입해온 성리학이었다. 중국의 중체(中體)나 일본의 화혼(和魂)처럼 독자적인 ‘동도’가 존재하지 않았으니, ‘서기’를 수용하여 개선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었던 것이 조선 후기 정신세계의 비극이었다.
--- p.311

국가의 붕괴는 자체의 힘으로 도저히 지탱할 수 없는 상태로 쇠잔해졌을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조선 왕조는 개항으로 외부 세력이 침투해오기 전에 이미 내부로부터 붕괴하기 시작했다.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상태에서 해체의 길로 질주하는 과정에서 외부 대응에 실패하여 나라가 망한 것이다.
--- p.369
 

출판사 리뷰

조선은 왜, 어떻게 멸망했는가

1910년 대한제국(조선)은 왜 멸망했을까? 일본이 악랄해서? 그건 답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적이란 언제나 악랄하기 때문이다. 그때 일본이 병탄하지 않았다고 해서 조선이 몸 성히 자생적 근대화의 길로 착실히 나아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나라와 나라 간에 먹고 먹히는 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강약의 문제다. 물음은 마땅히 이렇게 바뀌어야 할 것이다.

첫째, 조선은 왜 약했는가?
둘째, 일본은 왜 강했는가?
셋째, 조선은 왜 하필 일본에 의해 멸망했는가?

이 물음들에 대답하려면 자폐적 역사에 매몰돼서는 안 된다. 자기를 알려면 거울만 봐서는 안 되는 법이다. 창문을 열고 남도 보고 나와 비교해 봐야 한다. 폐망에 이르기까지 100년 동안의 조선 역사를 동아시아사와 세계사라는 더 큰 판 위에 포개놓고 읽어야 폐망 후 이제까지 100년도 비로소 보인다. 『세계사와 포개 읽는 한국 100년 동안의 역사』 시리즈가 길잡이가 돼줄 것이다.

『세계사와 포개 읽는 한국 100년 동안의 역사』 시리즈는 개항과 망국까지의 우리 역사를 세계사와 포개 읽으면서, 올바른 미래를 위해 과거를 바로 보려는 기획이다. 그 첫째 권, 『한반도의 깊은 잠: 아편 전쟁에서 일본의 개국까지』는 서구 열강이 동아시아로 밀려들어 올 때 한·중·일 삼국이 제각기 반응한 모습을 살핀다. 일본은 문을 열고 눈(目)을 열어 서구 문물을 재빠르게 수용하여 제 것으로 삼았다. 중국은 문을 열었으되 눈(目)을 뜨지 않아 열강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조선만 300년 긴 잠에 빠져 있었다.

여느냐 닫느냐

서세동점의 시대, 아시아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다 - 여느냐, 닫느냐. 책은 “지난 100년 이 땅의 사람들을 두 패로 갈라서게 한 모든 대립과 반목의 밑바탕에는 ‘쇄국 대 개국(개화)’이라는 가치관의 충돌이 있다”고 지적한다. 북한과 남한, 좌익과 우익, 사회주의 계획경제와 자유시장경제, 진보와 보수, 자력갱생 대 자유통상, 파쇼적 전체주의와 개인의 자유, 대륙 문명과 해양 문명,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친중·친북과 친미·친일…….

임진·병자의 난 이후 조선은 더 큰 세계를 향해 눈을 뜰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다. ‘왜놈’이라 깔보던 일본이 조선을 넘보고, ‘오랑캐’라 경멸하던 만주족(여진족)이 조선을 신하로 굴복시킨 데 이어 한족의 명나라를 멸망시킨 사건부터가 개안(開眼)의 기회였다. 자체 개발한 첨단 은(銀) 제련법과 인삼·비단·도자기·담배 무역의 이익으로 상공업을 진흥할 수 있었다. 표착한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와 하멜을 통해 서구 문명의 일단(一端)을 접했다. 서학(西學, 천주교)을 서구 문물 수용의 마중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역사 시계는 멎어 있었다.

중·일보다 300년 늦은 개항

1543년, 일본 최남단 가고시마(鹿兒島)에 딸린 작은 섬 나네가시마(種子島)에 포르투갈인을 실은 배가 도착했다. 섬의 15살 소년 영주는 포르투갈인으로부터 철포(화승총) 두 자루를 구입했다. 반세기 후 철포는 조총(鳥銃)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을 유린한다. 소년 영주가 철포를 구입한 해는 조선 중종 37년, 그해 조선은 장차 망국적 온상이 될 서원을 만들었다.

중국은 1554년 마카오를 열었다. 일본은 1582년 유럽에 소년사절단을 파견했고, 1613년에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넜다. 일본은 쇄국으로 들어간 동안에도 세계를 향해 ‘숨구멍’을 열어두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천하의 중심이라고 착각한 중국은 제대로 문호를 열지 못했고, 서구 열강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일본도 조선도 아편 전쟁(1840)으로 중국이 무너지는 것을 거의 실시간으로 알고 있었으나, 대응은 정반대였다.

중국·일본보다 300년 늦은 1876년에 강제 개항을 당하기까지 300년 동안 조선만 쇄국을 고수하도록 한 사람들은 주자 성리학으로 무장한 양반 지배 계층이었다.

부국강병을 포기한 조선

왜란과 호란의 드러난 결과는 참담했으나, 조선이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조선을 지배한 주자 성리학자들은 왜란과 호란의 굴욕으로부터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다. 국왕이 굴욕을 당하고 백성이 고초를 겪었으니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지만, 인조반정(1623)으로 집권한 집권 서인(西人) 세력은 나라와 백성의 안위보다 당파의 안녕에 혈안이 돼있었다. 북벌(北伐)은 애당초 실현 불가능한 ‘환각의 전투’였고, 내부 단속용 명분뿐이었다.

성리학은 요·순(堯舜)과 공자라는 석기시대·청동기시대를 이상향으로 삼는 퇴행적 이데올로기였다. 중화(中華)인 명나라가 멸망하자 조선의 왕과 성리학자들은 멸망한 명나라의 죽은 황제들을 제사지내는 대보단(大報壇)과 만동묘(萬東廟)를 세웠다. 스스로 소중화(小中華)라, 나중에는 “조선이 중화”라며 정신 승리와 자기기만에 빠져 나라 문을 닫아걸었다.

주자 성리학으로 무장한 나라의 수혜자는 극소수 양반뿐이었다. 동족을 노예로 대대손손 착취하고, 상업과 공업을 천시하고, 부국강병을 패도(覇道)라며 배척하는 나라가 자생적 근대화로 나아갈 길은 없었다. 조선은 안으로부터 먼저 무너졌다.

『세계사와 포개 읽는 한국 100년 동안의 역사』는 이 기간 한·중·일 각국의 내부 사정과 상호작용에 더하여, 세계사라는 더 큰 틀에 포개어 서세동점과 동아시아의 대응을 살펴본다. 제1권의 세계사적 무대는, 서쪽과 남쪽에서 바다로 나갈 길을 저지당한 러시아가 동쪽으로 부동항(不凍港)을 찾아 나서는 영·러 ‘그레이트 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