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한국근대사 연구 (책소개)/1.한국근대사

강화도조약 임오군란의 뒤안길

동방박사님 2023. 1. 21.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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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세계사와 포개 읽는 한국 100년 동안의 역사’ 세 번째 책으로 이 책에서 다루는 기간은 1873년부터 1884년까지의 10여 년이다. 사건을 중심으로 보면 1876년의 강화도조약 직전부터 1882년의 임오군란과 그 후유증까지다. 이 시기 조선은 쇄국을 내세운 대원군이 실각하고 아무런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개국을 강요당했으며, 고종과 민씨 세력의 샛별인 민영익을 매개로 개화파가 활동을 개시했다. 이 책은 서세동점의 전제인 동양의 산업혁명 부재 문제와 주자성리학에 매몰돼 있던 조선의 현실을 지적하고 고종 친정 초기의 개국 과정을 검토한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개국은 당사자인 조선이나 그 종주국을 자처한 청은 물론이고 조선과 먼저 수교한 일본이나 미국 등이 모두 러시아와 전 세계에 걸쳐 대결을 벌이던 영국의 기획에 놀아난 것임이 드러난다.

 

목차

제1장 동양에서는 왜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제2장 강화도조약 체결하다
제3장 근대 문물 수용에 나선 조선
제4장 주자성리학 유토피아, 조선
제5장 서양 열강 끌어들여 러시아를 막아라
제6장 1880년대 조선의 참모습
제7장 개화당의 등장
제8장 고종, 개화의 길로 방향 전환
제9장 서양 열강과 수교하다
제10장 생계형 폭동, 국제문제로 비화시킨 대원군
제11장 나라를 결딴낸 제물포조약·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제12장 수신사 박영효, 일본에 간 까닭은
제3권 연표
참고문헌
 

저자 소개 

저 : 김용삼
 
대전고, 중앙대 문예창작과, 경남대 북한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조선일보 기자, 시사월간지 [월간조선] 편집장, 경기도 대변인, 경기콘텐츠진흥원 감사를 역임했다. [월간조선] 기자로 활동하며 50여 개국 현지 취재를 통해 전·현직 국가원수 4명을 특종 인터뷰했다. 또한 황장엽 망명사건 특종보도로 제1회 대한민국 언론상 수상, 2008년 해양사상 보급에 공헌한 공로로 장보고대상을 수상했다. 2013년 『이승만과 기업가...
 

책 속으로

첫째, 강화도조약은 동아시아에서 전개된 영-러 대결이라는 국제 정세를 일본이 교묘하게 이용한 결과였다. 둘째, 러시아의 한반도 병합을 저지하기 위한 영국의 음모가 작용했다는 사실이다. 즉, 강화도조약은 일본이 주도했지만 배후 조종자는 영국이며, 조선과 일본의 관계 정립보다 훨씬 거대한 영-러 그레이트게임 차원에서 벌어진 고차원적 국제 외교 게임이었다는 뜻이다.
--- p.6

일본 지도부는 영국의 책략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았다. 일본은 러시아가 한반도로 남진하는 것을 봉쇄하려는 영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편승해 실리를 챙겼고, 다른 쪽에선 러시아와 비밀 거래를 서슴지 않았다. 일본은 영-러 ‘그레이트게임’을 적절하게 이용해 실리를 챙겼다. 조선만 세상 물정 모르고 어물거리다 조약을 강제당한 것이 강화도조약 체결의 본질이다.
--- p.7

과학기술의 빛나는 성과물인 측우기와 해시계를 발명한 나라가 농업 생산성에서 동아시아 꼴찌 수준을 면치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인류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문명국에서 서양처럼 출판을 통한 지식혁명은 왜 일어나지 않았을까?
--- p.30

운요호 사건의 파장으로 일본이 강화도로 와서 조약 체결을 요구하자 오경석은 이 기회에 일본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조선을 강제 개국시켜 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같은 날 오경석은 모리야마에게 “개화인을 만나 개화 이야기를 나누니 몹시 유쾌하다”라는 말도 남겼다. 그리고 이날부터 오경석이 조선의 개국을 위해 일본에 적극 협조하는 관계가 형성된다.
--- p.49

2월 13일 제3차 회담은 겉으로는 평온했지만, 날선 공방전이 벌어졌다. 구로다 전권은 “조선 정부가 조약을 체결하면 일본 대표단은 곧바로 귀국할 것이지만, 체결이 안 되면 일본군이 귀국을 침략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 p.52

여기서 중대한 하자가 발생했다. 만국공법 체제에 무지했던 조선은 제4, 제5조를 부산의 왜관처럼 원산·제물포에도 왜관을 추가 설치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부산 왜관에는 세관도 없고 대일 무역에 대해 관세도 부과하지 않았다. 이러한 왜관 무역 정신에 입각해 조선은 세 곳의 개항장에 세관을 설치하지 않았고, 수출입품에 대한 관세도 부과하지 않았다.
--- p.62~63

이동인의 친영 정책은 세계의 패권국 영국과 손잡고 청·러시아·일본으로부터 조선이 독립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다. 하지만 그의 실종으로 인해 세계 패권국과의 연계가 끊어지면서 조선의 운명은 ‘고난의 행군’의 길로 향하게 된다.
--- p.200

윌리스 제독이 주장한 둘째 항목은 세계 어느 나라도 그런 내용을 포함시켜 조약을 체결한 사례가 없었다.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윌리스는 안면몰수하고 “서양 공법에 이러저러한 내용이 있으니 이를 허가하라”라고 조선 정부를 압박했다. 만국공법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캄캄절벽이었던 조선의 대신들은 영국이 압박을 가하자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 p.224

미국이 조선에서 획득한 이권은 서양 열강이 중국에서 얻은 것처럼 무력을 동원한 강제 탈취가 아니라 조선 정부의 호의에 의해 정당하게 부여받은 것이다. 조선 정부가 미국인에게 다양한 이권을 부여한 것은 조선이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아 국가 존립이 위태롭게 될 경우 미국이 개입과 거중조정을 통해 구제해 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 p.228

민겸호는 대원군에게 뛰어들어 머리를 도포 소맷자락 속으로 들이민 채 “대감! 날 좀 살려주시오” 하고 울부짖었다. 대원군이 “내가 어찌 대감을 살릴 수 있겠소?” 하고 차갑게 웃으며 거절했다. 대원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난병들이 민겸호를 발로 걷어차 층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는 화승총 개머리판에 얼굴이 짓이겨지고 총검으로 난자당한 후 시체가 토막토막 잘렸다.
--- p.247

문제의 조항에 근거해 영국은 1885년 조선이 러시아와 밀약을 체결하자 군함을 파견해 거문도를 점령했다. 조선 입장에서 보면 이 사건은 영국의 조선 영토 침략 및 무단 점거였지만, 영국은 “조-영 신조약에 의거한 정당한 입항”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 p.326

조-영 신조약(파크스조약)은 조선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최악의 조약이었다. 이 조약이 모태가 되어 미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러시아 등 서양 각국에 동일한 이권과 혜택을 제공해야 했다. 조선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아니라 조-영 신조약을 통해 완전 무장해제당했다. 변변한 방호 장구도 없이 벌거숭이 상태로 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이권을 뜯어먹히는 ‘국제적 호구’로 전락한 것이다.
--- p.330~331

영국을 끌어들여 청의 압력을 물리치고 자주독립을 이루겠다는 개화당의 의도는 순수했는지 몰라도, 영국에게 실컷 이용만 당한 끝에 무지막지한 피해를 당했다. 서양 열강과 대등한 조약을 체결해 국제사회에서 독립을 공인받으면 국제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개화당의 순진무구한 생각은 무지갯빛 환상이었음을 영국이 적나라하게 깨닫게 해준 것이다.
--- p.331
 

출판사 리뷰

1840년 중-영 아편전쟁과 1854년 미국 페리 함대에 의한 일본의 개항은 19세기 서세동점을 상징하는 사건들이다. 중국과 일본에 몰려온 이 서세동점의 파고는 서양 세력에게는 보잘 것 없는 ‘계륵’에 불과했던 조선도 피할 수 없었다. 이 책에서는 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몰려들어 침탈을 개시한 원인부터 살핀다. 먼 거리를 손쉽게 이동해 동양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한 배와 동양의 무력을 압도한 총포 등은 모두 산업혁명을 뒷받침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게다가 서양 세력은 이를 기반으로 이미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식민지를 건설해 자본을 축적하고 있었다. 이른바 제국주의다.

우리의 상황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서도 더 열악했다. 이 시기에는 이미 인구 규모부터 우리를 압도하는 상황이었다. 두 나라가 속절없이 서양 세력에 무너진 가운데 우리는 이런 정세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개항 이전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주자성리학 이데올로기다. 국제 정세의 엄청난 변화에 눈감게 만든 것도 자기중심적 주자성리학 이데올로기였고, 그것이 불러일으킨 망상이 중국의 정통성을 우리가 이었다는 ‘소중화’ 의식이었다. 서양 산업혁명의 토대가 됐던 개인의 창의성을 말살한 것은 주자성리학의 신분 질서였다. 그런 조건에서 대원군의 쇄국은 필연적인 결론이었고, 중국이나 일본보다 더 심한 쇄국 상황에서 강요당한 개국은 엄청난 혼란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개국이 일본 개국의 판박이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은 페리의 미국 함대가 자기네에게 강요했던 것을 그대로 복사해 무력시위를 하며 조약을 강요했다. 대비가 전혀 없었던 조선은 과거 왜관을 통한 교역 정도를 생각하며, 완전히 새로운 국제법 질서에 대한 인식 없이 조약에 도장을 찍었다. 한번 열린 개방의 물결은 되돌릴 수 없었다. 조선은 일본에 이어 미국과 수교했다. 미국은 중국으로 가는 중간 기착지의 필요성 때문에 일본의 개국을 강요하기는 했지만, 이미 일본의 항구를 연 이상 조선과의 수교가 절실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에 챙겨야 할 대단한 이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배후에 있는 것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유럽, 중앙아시아, 동아시아로 장소를 옮기며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무대로 러시아와 ‘그레이트게임’으로 불리는 세력 대결을 벌이고 있었는데, 동아시아에서 러시아 남하를 차단하기 위한 길목으로 조선을 점찍고 미국을 앞세워 자국의 진출 발판을 마련하려 한 것이다. 일본의 진출 역시 영국의 교사 내지 방조에 의한 것이었으며, 영국과 미-일의 협조 관계는 훗날 영일동맹과 미-일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외교전의 중요한 한 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뒤늦은 개화’에 뛰어들었다. 이미 선택지는 없었을 것이다. 쇄국을 추진했던 대원군이 실각해 반작용도 있었을 것이고, 개항으로 인해 이미 대세는 결정된 것이었다. 고종과 민 왕후의 측근인 약관의 민영익은 단숨에 정국의 중심에 섰고, 그는 역시 연소한 김옥균·박영효 등과 어울리며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고자 했다. 개화파가 태동하고, 고종은 밀려오기 시작한 외세를 다른 외세를 이용해 제어한다는 허망한 노력에 매달린다.

이 책은 그런 10여 년 동안 조선에서 펼쳐지는 ‘참상’을 하나하나 살핀다. 대외 문제에 ‘폭탄’이 떨어진 상황에서 정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새로운 집권자인 민 왕후 세력은 권력 누리기에만 혈안이 되어 민생은 더욱 도탄에 빠진다. 새로운 국제 질서에 익숙하지 못한 국가의 헛발질들은 그 자체로도 안쓰럽지만, 그것은 고스란히 국민의 부담으로 넘어간다. 그 틈을 노린 일본은 줄기차게 침략의 야욕을 드러낸다. 한 세기 반 전, 그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했어야 하는가? 고종과 민 왕후와 대원군은, 정부 고관들은, 지식인들은, 그리고 민초들은? 먼저 필요한 것은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이다. 이 책은 기초 사실들과 함께 그런 상황에서 실제로 그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