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한일관계사 연구 (책소개)/6.한일관계신간

근세 조일관계와 울릉도 (2016)

동방박사님 2023. 4. 8.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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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조선시대 한일관계의 역사 속에서 울릉도를 바라보다

현재 한일관계의 큰 쟁점인 독도문제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울릉도’를 둘러싼 대립의 역사가 나오고 안용복과 박어둔의 이름이 언급된다. 그러나 울릉도를 둘러싼 한일 간의 관계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대단히 얕다. 오랫동안 한일관계 속에서 울릉도(독도) 역사를 연구해 온 동북아역사재단의 윤유숙 박사가 울릉도(독도) 문제에 대한 우리의 역사인식을 한 단계 높이고 환기시켜줄 책을 출간하였다.

‘역사 속의 울릉도’를 들여다보면 그것이 조일관계라는 커다란 틀 속의 일부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깨닫게 된다. 다만 역사 속의 울릉도에 대한 우리의 본격적인 연구와 지식이 대단히 부족할 뿐이다. 동해안과 산인지방을 연결하는 경로에 관한 연구는 쓰시마를 매개로 한 경로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 현실이라서, 표류민 연구를 통해 조일 양국인의 상대국 표착과 송환이 사례로써 언급되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 경로 역시 조선후기를 통해 조선과 일본 양쪽에서 울릉도로의 도항이 쌍 방향으로 이루어지며 사람(人)과 물건(物)의 이동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양국인이 도항하던 중 17세기 말에 충돌이 야기되었고, 외교적인 교섭에 이어 양국에서 제각기 정책적인 조치가 취해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근세 환동해권(環東海圈)에서의 조일교류라는 틀 속에서 울릉도를 조망해보았다. 일국사의 관점에서 벗어나 환동해권으로 시각을 확대시킬 때 조선-울릉도-일본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실들을 입체적으로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목차

책머리에

제1장 17세기 환동해권에서의 울릉도
1. 머리말
2. 조선의 울릉도 정책
3. 일본과 울릉도의 관련성

제2장 돗토리 번(鳥取藩) 조닌(町人)의 울릉도 도항
1. 머리말
2. 오야·무라카와 가문의 내력과 울릉도 출어
3. 일본사회 내 울릉도 산물의 활용
4. ‘죽도도해금지’(1696년) 이후 두 가문의 행보
5. 맺음말

|보론|울릉도도항금지령 이후 松嶋(독도) 도항 문제 재고(再考)
1. 머리말
2. 왜 가와카미 겐조인가
3. 松嶋(독도)도해면허
4. 17세기 말에도 막부는 독도 도항을 금지하지 않았다?
5. 1696년 이후에도 독도를 오키 령으로 인식했다?

제3장 1693년 돗토리 번 어민의 조선인 연행 사건
1. 머리말
2. 울릉도쟁계 이전의 쓰시마와 울릉도
3. 쓰시마 번의 정황 조사와 조선인 송환
4. 쓰시마 번의 대조선 교섭
5. 맺음말

제4장 1696년 조선인들의 오키(隱岐) 도항과 그들의 송환과정
1. 머리말
2. 울릉도에서 오키(隱岐)로 도항한 조선인들
3. 조선인 송환문제를 둘러싼 쓰시마 번의 움직임
4. 조선정부와 쓰시마 번의 최종교섭
5. 맺음말

제5장 18세기 이후의 울릉도
1. 머리말
2. 18세기 이후 조선의 울릉도 관리
3. 하마다 번 주민 하치에몬(八右衛門)의 울릉도 밀항 사건
4. 막부의 ‘제2차 죽도(울릉도)도해금지령’이 의미하는 것
5. 맺음말

제6장 사료 소개_ 하치에몬(八右衛門) 사건을 기록한 일본 사료
1. 『천보잡기(天保雜記)』
2. 『죽도도해일건기 전(竹島渡海一件記 全)』


저자 소개
저자 : 윤유숙
1967년생. 1990년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졸업, 2002년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일본사 전공) 문학박사학위 취득. 일본사학회·한일관계사학회 회원, 현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으로 재직. 일본근세사, 근세한일관계사 전공. 2014년 우호(于湖) 동양사학 논문상 수상했다. 『近世日朝通交と倭館』(岩田書院, 2011)과 [근세초 西日本 지역 ‘조선인집단거주지’](2009), [年中行事...
출판사 리뷰
조선시대 한일관계의 역사 속에서 울릉도를 바라보다

현재 한일관계의 큰 쟁점인 독도문제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울릉도’를 둘러싼 대립의 역사가 나오고 안용복과 박어둔의 이름이 언급된다. 그러나 울릉도를 둘러싼 한일 간의 관계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대단히 얕다. 오랫동안 한일관계 속에서 울릉도(독도) 역사를 연구해 온 동북아역사재단의 윤유숙 박사가 울릉도(독도) 문제에 대한 우리의 역사인식을 한 단계 높이고 환기시켜줄 책을 출간하였다.
저자에 따르면, 과거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는 크게 세 가지 정도의 교류 경로가 존재했다. 쓰시마(對馬島)와 경상도 지역을 연결하는 경로, 규슈(九州)의 고토(五島)와 전라도를 연결하는 통로, 그리고 동해(東海)를 접한 일본의 산인(山陰)지방에서 오키(隱岐)를 거쳐 한반도 동해안으로 오는 경로가 그것이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조일(朝日) 간의 공식적인 통교에서 인정되었던 것은 오직 쓰시마와 경상도(부산왜관)를 연결하는 경로였지만, 조선후기에도 동해안과 산인지방을 연결하는 경로는 비공식적인 형태로 여전히 가동되고 있었다. 그 경로 상에 주요 포인트로 기능하고 있던 곳이 바로 울릉도였다.
우리의 사서(史書)에서 울릉도에 관한 문헌상의 기록은 고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의 울릉도 기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智證麻立干) 13년(512) 기사를 비롯해서, 『삼국유사』, 『고려사』 등에도 나타난다. 삼국시대의 울릉도는 ‘우산국’이라는 명칭으로 우리의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울릉도는 ‘우산국이 신라에 귀복(歸復)하여 공물을 바쳤다’는 기사가 대부분이고, 『고려사』의 경우도 ‘우릉도인(芋陵島人)이 고려정부에 내조(來朝)하다’, ‘우릉성주(羽陵城主)가 토산물을 보내오다’는 기사와 함께, ‘울릉도의 목재 벌목’에 관한 기사가 주를 이룬다.
이러한 일련의 기사들을 종합해볼 때 고대로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울릉도에는 어떠한 정치집단이 존재했고, 그 집단의 수장이 신라 혹은 고려에 복속하는 형태의 관계가 지속된 듯하다. 그러나 고대, 중세를 통해 울릉도에는 중앙정부의 관리가 파견되지는 않았다. 조선시대에 관리가 파견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주민을 육지로 쇄환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울릉도에 본격적으로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1883년 조선정부가 울릉도에 두 차례에 걸쳐 50여 명을 이주시키면서부터이다. 조선정부는 태종 치세기였던 1403년, 울릉도에 주민의 거주를 금지하는 ‘쇄환(刷還)’ 내지는 ‘쇄출(刷出)’정책을 취했다. 조선정부가 울릉도에 이와 같은 조치를 취한 이유는 백성들이 과역(課役)을 회피하여 울릉도로 도주하는 현상을 방지하고, 왜구의 침탈로부터 도서 주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정부가 이러한 방침을 버리고 이주 및 개척을 허용하는 쪽으로 정책을 전환한 데에는 1876년 개항 이후 울릉도에 거주하는 조선인과 벌목하는 일본인들의 증가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울릉도는 15세기부터 19세기 말까지 무려 5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공식적’인 무인도로 존재한 셈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장기간 주민의 거주가 금지되었던 울릉도가 동해안-산인지역 간 경로 상에 주요 포인트로 기능했다고 본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울릉도는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데다 상주하는 관리조차 없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몰래 도항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양질의 목재와 대나무, 산삼, 해안가에 즐비한 전복 등, 울릉도는 해륙의 산물이 풍부한 곳이어서 사실상 수익성이 보장된 보물섬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다보니 17세기 말 울릉도에는 한반도의 동해안과 남해안 지역의 주민들이 집단으로 도항하고 있었다.
그런데 울릉도의 풍부한 산물을 손에 넣고자 했던 것은 조선인뿐만 아니라 일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산인지방, 즉 돗토리현(鳥取縣), 시마네현(島根縣), 야마구치현(山口縣) 지역 사람들은 무인도나 다름없던 울릉도에 일찍부터 출입하고 있었다. 산인지방의 어민들에게 울릉도는 활용가치가 높은 섬으로 알려져 있어, 조건만 갖추어지면 독자적으로 도항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윽고 17세기 초에는 울릉도의 경제적 가치를 독점하고자 공권력으로부터 도항을 공식적으로 보장받으려는 사람들이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돗토리번(鳥取藩) 요나고(米子)의 초닌(町人) 오야(大谷)씨와 무라카와(村川)씨였다. 에도막부로부터 ‘울릉도 도항을 허가한다’는 내용의 공식문서(老中封書)를 받아내는 데 성공한 오야ㆍ무라카와 두 가문은 이후 그 공문서를 근거로 삼아 매년 교대로 울릉도에 도항했다. 두 가문은 막부의 인가를 받은 ‘울릉도 도항’이라는 권한을 매개로 하여 다이묘령의 일개 초닌으로서는 다양한 특권을 누렸으며, 울릉도에서 채획된 해륙의 산물은 그 수량이 적지 않았거니와 근세 일본사회 내에서 다양한 형태로 소비되었다. 그들의 울릉도 도항은 17세기 동안 무려 70여 년 동안 이어졌다. 1693년 어획을 하기 위해 울릉도에 갔던 안용복(安龍福)과 박어둔(朴於屯), 두 사람을 돗토리 번으로 연행해 간 것이 바로 오야 가문의 선원들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과 일본 양국 간에 새삼 울릉도의 영속(領屬) 여부가 외교문제로 부상하게 되어, 쓰시마 번(對馬藩)을 매개로 한 외교교섭이 시작되었다. 과거 조선에서 ‘울릉도쟁계(鬱陵島爭界)’라고 불렀던 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울릉도쟁계’를 계기로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사실을 확인한 에도막부는 오야ㆍ무라카와 가문의 도항을 금지했다. 한편 조선은 그 후 울릉도 관리를 강화하기는 했지만 주민의 거주는 여전히 금지하다가 1876년 개항을 맞았다.

이처럼 ‘역사 속의 울릉도’를 들여다보면 그것이 조일관계라는 커다란 틀 속의 일부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깨닫게 된다. 다만 역사 속의 울릉도에 대한 우리의 본격적인 연구와 지식이 대단히 부족할 뿐이다. 동해안과 산인지방을 연결하는 경로에 관한 연구는 쓰시마를 매개로 한 경로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 현실이라서, 표류민 연구를 통해 조일 양국인의 상대국 표착과 송환이 사례로써 언급되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 경로 역시 조선후기를 통해 조선과 일본 양쪽에서 울릉도로의 도항이 쌍 방향으로 이루어지며 사람(人)과 물건(物)의 이동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양국인이 도항하던 중 17세기 말에 충돌이 야기되었고, 외교적인 교섭에 이어 양국에서 제각기 정책적인 조치가 취해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근세 환동해권(環東海圈)에서의 조일교류라는 틀 속에서 울릉도를 조망해보았다. 일국사의 관점에서 벗어나 환동해권으로 시각을 확대시킬 때 조선-울릉도-일본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실들을 입체적으로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