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한일관계사 연구 (독서)/7.한일관계총서

외교문서로 본 조선과 일본의 의사소통 (2011)

동방박사님 2023. 4. 24.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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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조선과 일본이 주고받은 몇 천 면 만점에 이르는 문서의 숫자란 그만큼 잦은 간격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기회이자 흔적이었으며, 서로에 대한 오해의 소지를 줄일 수 있는 하나의 '장치'였다. 이 책은 임진왜란 이후 조일간의 강기간에 걸친 평화와 우호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생각해 보기 위한 시도이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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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제1부 조선ㆍ일본 중앙의 의사소통과 외교문서
서장 외교문서와 중앙정부의 의사소통

제1장 외교문서 서계의 존재형태

1. 머리말
2. 외교문서 서계(書契)와 여러 종류의 필사(筆寫) 서계
3. 서계의 외형상 특징
4. 맺음말

제2장 조ㆍ일관계의 안정과 서계 양식의 변화
1. 머리말
2. 통교 재개 직후의 서계 양식(書契式)
3. 1635년 ‘국서개작사건’ 이후 서계 양식의 변화
4. 명ㆍ청 교체 이후 서계 양식의 정착
5. 맺음말

제3장 조선 서계의 ‘위식’ 실태와 개찬
1. 머리말
2. 조선 서계의 위식(違式) 사례
3. 조선 서계의 위식 실태와 개찬(改撰)
4. 맺음말

제4장 일본 서계의 ‘위식’ 실태와 대조선인식
1. 머리말
2. 일본 서계의 서식
3. 일본 서계의 위식 사례와 개찬
4. 일본 서계의 위식 실태와 대조선인식
5. 맺음말

마무리 개찬을 통해서 본 조일간 의사소통의 의미

제2부 외교창구 동래부ㆍ왜관의 의사소통과 「실무문서」
서장 대일본 외교창구 동래부(東萊府)

제1장 동래부와 왜관의 公的 의사소통과 「전령」
1. 머리말
2. 동래부의 일본어 역관과 왜관에의 구두(口頭) 전달
3. 역관을 통한 「전령」(傳令)의 왜관 전달
4. 맺음말

제2장 동래부와 왜관의 私的 의사소통과 역관 명의 문서 「覺」
1. 머리말
2. 동래부 일본어 역관 명의의 문서「覺」과 왜관
3. 역관과 사적 의사소통 경로
4. 맺음말

제3장 동래부 역관 관련 「실무문서」의 수량과 성격
1. 머리말
2. 『분류기사대강』(分類紀事大綱) 소재 「실무문서」의 수량과 수록실태
3. 「실무문서」의 작성 배경
4. 맺음말

제4장 「실무문서」의 유통과 왜관ㆍ대마번
1. 머리말
2. 「실무문서」와 외교문서
3. 「실무문서」의 유통과 왜관ㆍ대마번
4. 맺음말

마무리 「실무문서」와 근세 조일외교의 특징

후 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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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자 : 이훈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츠쿠바(筑波) 대학 대학원 역사인류학 연구과 졸업(문학박사), 국사편찬위원회를 거쳐 현재 동북아역사재단 수석연구위원으로 재직했다. 한일관계사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전공인 조선시대 한일관계사로 ‘표류민’과 ‘외교문서’를 소재로 다수의 논저를 발표했다. 저서로는『조선후기 표류민과 한일관계』『대마도, 역사를 따라 걷다』『독도와 대마도』『조선과 琉球』 역서로는『대한제국의 ...
 

출판사 리뷰

어떤 주제가 학문 영역으로 자리잡았는가 아닌가라고 할 때 학회와 학술잡지의 유무를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이 기준으로 본다면, 개인적으로 한일관계를 공부하던 사람들이 모여 ‘한일관계사학회’라는 연구회를 발족시킨 1992년과 연구잡지인 『한일관계사연구』 창간호를 간행한 1993년이 우리나라 한일관계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라고 할 수 있다. 한일관계사학회는 매달 한 번씩 월례발표회 모임을 통해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일관계에 관한 지식과 인식을 공유하게 되었고, 『한일관계사연구』도 2011년 4월 현재 38집에 이르고 있다. 말하자면 한국사에서 ‘한일관계’ 또는 ‘한일교류’가 하나의 학문영역으로 안정되기까지 20년 가까이 걸린 셈이다.

그간의 한일관계사에 대한 연구 경향을 보면 일본과의 외교나 교류의 역사 속에서 획기적인 사건, 이를테면 갈등이나 전쟁, 약조 등을 소재로 양자관계를 검토하되 중앙의 정치사적인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 한일 양 지역의 국가간에 마찰이나 사건, 전쟁이 일어나게 된 배경, 또는 그 결과나 후속조치로서 약조가 맺어지게 되는 경우, 상대를 파악하고 교섭하는 주체, 결정 내용 등이 중앙의 정치ㆍ외교ㆍ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다루어진 경향을 말한다. 그러다 보니 인식과 결정의 주체는 시대를 불문하고 언제나 ‘중앙정부’ 내지는 ‘국가’로 한정되는 경향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건 내지는 현안 중심으로 한일관계를 파악하다 보니 양국관계도 일상적인 측면보다는 비일상적인 갈등, ‘과정’ 보다는 ‘결과’의 분석에 집중되기 쉬웠다.

연구의 관점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외교현장의 의견이 중앙의 의사로 집약되기까지 필요한 과정, 그리고 사건과 사건 사이에 존재하는 일상적인 관계가 어떤 식으로 관리ㆍ유지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조선후기의 한일관계에 대해서도 임진왜란을 전후한 갈등이나 마찰은 잘 설명할 수 있었지만, 왜란 이후 260년 가깝게 유지되어온 교린관계에 대해서는 그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웠다. 평화나 우호는 그저 우연히 재수가 좋아 유지되어 온 정도로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한일관계사 연구에 대한 역사 자체가 길지 않은 만큼, 중앙정부간 교섭 이외의 다른 교섭이나 ‘과정’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요인은 일상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끊임없이 작동되고 있었던 한일관계의 여러 장치와 제도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가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필자는 이 책에서 임진왜란 이후 한일관계가 사소한 마찰들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260년이 넘도록 선린우호가 유지되어 온 배경으로 ‘의사소통’이라는 문제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이는 ‘일상적인 장치’에 대한 관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필자의 연구경력과도 관련이 있다.

필자는 오랫동안 조선후기 일본의 조선외교를 대행했던 대마번(對馬藩)이 남긴 ‘대마도종가문서(對馬島宗家文書)’를 정리한 바 있다. 3만점 가까이 되는 ‘대마도종가문서’ 안에는 조선외교문서인 서계(書契)가 9천통 이상 포함되어 있다. 서계는 조선과 일본간에 발생한 현안 하나하나에 대하여 조선의 중앙정부가 최종 결정한 사항이나 입장을 일본(대마번)에 알리는 정식 외교문서로 예조 명의로 작성되었다. 9천통이라면 조선은 1년에 30통이 넘는 문서를 발급한 셈이다. 이 숫자는 달리 표현하자면 중앙정부 수준에서 조선이 대마도와 의사소통을 한 횟수가 30회가 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필자는 최근에 대마도종가문서 가운데 『분류기사대강』(分類紀事大綱)이라는 기록을 자료집으로 펴내면서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분류기사대강』은 조일간의 모든 현안을 검색의 편의를 위해 주제별로 엮은 책이다. 여기에는 조선과 주고받은 서장(書狀)도 수록되어 있는데, 중앙정부에서 발급한 외교문서는 아니지만 외교현안 하나에 여러 형태의 문서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분류기사대강』에는 동일사안이지만 발신자와 수신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문서 형태나 문체, 언어, 효력을 달리하는 문서들이 필사의 형태로 수록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동래부(東萊府)라는 최일선의 외교현장에 파견된 실무자에게 중앙에서 내려 보낸 지침을 비롯하여, 조선측 실무자와 부산의 왜관에 파견된 일본측 실무자가 거의 매일 접촉하는 과정에서 주고받은 문서, 때로는 아주 개인적인 서한도 들어 있었다. 이들 문서들은 현존하는 조선측 기록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현장의 「실무문서」로 그 수량은 외교문서를 능가한다. 어떤 현안에 대해서는 중앙의 예조에서 외교문서 1통을 작성하기 까지 20통 이상의 관련 문서가 남아 있는 경우도 훀었다.

말하자면 이들 문서는 최일선의 외교현장에서 조선과 일본의 말단 실무자들이 최초의 발신자 또는 수신자가 되어 주고받은 공문서로, 바로 교섭현장에서 이루어졌던 ‘의사소통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실무자들 상호간의 원활한 의사소통,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실무선에서 알아낸 상대방의 의사나 정보를 중앙 정부에 얼마나 정확하고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는가는 상대방에 대한 외교전략을 수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분류기사대강』을 통해서는 「실무문서」의 존재 뿐 아니라 상대방의 의사 내지는 정보가 전달되는 경로까지도 파악할 수 있었다. 요컨대 아무리 사소한 현안이라 하더라도 중앙에서 하나의 외교적 결정 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이미 최일선의 교섭 현장에서 실무자들 상호간에 수많은 의사소통이 이루어졌음은 물론, 외교창구에서 중앙정부로 이어지는 의사의 집약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문서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외교창구의 실무선에서 오고 간 문서는 외교문서 자체는 아니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외교문서의 범주로 파악해도 될 것들이었다. 이렇게 실무자 명의의 문서와 외교문서의 관계가 분명해지면서, 외교문서로서 예조 명의 서계란 창구 실무자들의 일상적인 의사소통이 실마리가 되어 조선정부의 의사로서 집약된 결과로 이해되었다. 한마디로 필자는 이들 문서를 정리하면서 각 문서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몇 천 몇 만점에 이르는 문서의 숫자란 그만큼 잦은 간격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기회이자 흔적이었으며, 서로에 대한 오해의 소지를 줄일 수 있는 하나의 ‘장치’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책은 필자가 그간 발표했던 조선후기의 외교문서와 「실무문서」에 관한 논문들을 ‘의사소통’이라는 관점에서 엮어 본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 한일관계는 조선과 일본의 중앙정부인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가 직접 통교하지 않고 대마번을 통해 간접적으로 통교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 책에서는 간접통교 하 최초의 의사소통이 바로 동래부와 대마번사가 파견된 왜관이라는 창구 교섭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 유의하여 다음의 네 가지를 밝혀보고자 하였다. 우선 첫째는, 외교문서와 「실무문서」와의 관계에 대해서이다. 이는 외교창구 교섭에서 생산된 「실무문서」를 외교문서에 포함시킬 수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실무문서」는 외교문서 자체는 아니지만 외교 전략을 수립하는데 중요한 정보로서 영향을 미쳤으므로 외교문서의 범주에 넣어서 검토하였다.

두 번째는, 조일 간접통교체제 하 의사소통의 주체로 중앙정부와 더불어 조선측 외교창구인 ‘동래부’ 파견 역관의 역할에 주목하였다. 일본측 외교창구인 왜관과 동래부를 오가며 구두 또는 문서로 의사소통을 하였던 말단 실무자로서 동래부 역관의 역할 및 그들 명의로 작성된 「실무문서」의 존재와 기능을 살펴 보았다. 세 번째는, 최일선 외교창구에서 중앙정부로 의사가 전달ㆍ집약되는 과정이다. 조선에는 동래부를 통한 공적인 보고 라인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사소통 경로가 있었다. 동래부의 실무자인 역관 중에는 중앙의 고관들과 사적으로 인맥을 형성하는 경우가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 사적 라인을 통해 동래부를 통한 공식 보고보다 더 빨리 중앙에 대마번의 의사를 전달함으로써 신속하게 현안이 처리된 사례가 있었다. 즉 역관의 역할 가운데 외교 현안을 중앙으로 전달하는 사적인 경로를 밝혀보고자 하였다

네 번째는, 외교교섭에서 의사소통에 사용되는 문자와 언어의 문제이다. 외교문서의 경우 조선과 일본의 중앙정부간 교섭에서는 기본적으로 한문으로 작성된 문서를 서로 주고받았다. 그러나 실무자간의 교섭에서는 달랐다. 왜관에는 ‘이두’가 섞인 조선의 공문서가 전달되기도 했다. 이러한 문서는 외견상 한문이라고는 하더라도 조선의 독특한 문체로 작성되었다. 이에 대마번에서는 조선식 한문을 이해하기 위한 훈독법의 공부와 훈련을 필요로 하였다. 또 때로는 한글로 작성된 문서도 왜관측에 전달되었다. 총체적으로 근대 이전의 조일관계에서는 ‘조선어’가 통용어였다고 할 수 있는데, 외교언어의 문제를 이 시기 한일관계의 실태를 밝힐 수 있는 계기의 하나로 보았다.

구체적인 목차는 다음과 같다.

제 1부에서는 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이 정부차원에서 의사소통 수단으로 주고받았던 외교문서 서계(書契)에 대해 검토하기로 한다.
제 1장에서는 외교문서로서 서계의 존재 형태
제 2장에서는 임진왜란 직후 조일관계의 안정에 따른 서계 양식의 변화
제 3장에서는 서계 양식에 벗어나는 조선측 서계의 ‘위식’(違式) 사례와 개찬(改撰)
제 4장에서는 일본측 서계의 위식 사례와 개찬
에 대해서 검토하기로 한다.

제 2부에서는 왜란 이후 최쿀선의 대일본 외교창구가 된 동래부가 왜관과 의사소통할 때 전달하였던 「실무문서」에 대해서 다루기로 한다.
제 1장에서는 동래부의 왜관 교섭 실무자였던 일본어 역관과 「傳令」의 전달을 통해서 본 왜관과의 공적인 의사소통
제 2장에서는 동래부 역관 명의의 문서 「覺」을 통해서 본 왜관과의 사적인 의사소통
제 3장에서는 외교 창구 실무자들끼리 주고받은 「실무문서」의 수량과 수록실태
제 4장에서는 이러한 「실무문서」가 왜관ㆍ대마번을 거쳐 정보로서 어떻게 취급되는지, 문서의 유통 문제에 대해서 검토하기로 한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간에는 통신사라는 외교사행을 일본으로 파견할 때나 대마번의 사자가 조선에 파견되어 올 때, 또 외교창구 교섭에서 수시로 발생하는 사소한 트러블로 긴장이 항상 존재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조선과 도쿠가와 막부의 선린 우호 관계를 전면 부정하는 전쟁으로까지 치닫지는 않았다. 일본과는 1868년 메이지(明治) 신정부의 수립으로 전통적인 외교관계가 무너질 때까지 의외로 오랫동안 평화관계가 유지되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외교문서를 지참한 사자와 창구 실무자들을 통해서 끊임없는 의사소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교섭을 통해 오해의 소지를 줄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 책은 한마디로 임진왜란 이후 조일간의 장기간에 걸친 평화와 우호가 왜 가능했는지를 생각해 보기 위한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 앞으로 한일관계의 실태를 밝혀가는데 하나의 실마리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