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정치의 이해 (독서)/3.프랑스혁명

새로 쓴 프랑스 혁명사 - 대서양 혁명에서 나폴레옹 집권까지 (2023)

동방박사님 2023. 12. 23.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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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영어권의 최근 자료까지 광범위하게 반영한 프랑스 혁명사의 완결판
『새로 쓴 프랑스 혁명사』는 잠재력이 가득한 탐정소설 같다.
결국 독자는 여러 가지 해결책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프랑스 혁명사 연보Annales historiques de la Revolution francaise』


장 클레망 마르탱은 영어권의 연구 성과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문헌을 바탕으로 쓴 이 책에서 1770년부터 1802년까지 시기를 네 가지 기념비적인 순간으로 나눠서 재해석하자고 제안한다. 먼저 ‘위에서 시작된 혁명’은 루이 15세가 시작하고 루이 16세가 어설프게 이어받았으나 1789년의 ‘바스티유 정복’으로 알려진 대담한 정변으로 실패했다. 그때 프랑스인 거의 전체가 기다리던 혁명적 재생이 시작되었다. 그다음으로 1792년에 자코뱅파가 주도한 ‘진정한 혁명’이 시작되었다. 자코뱅파는 열정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추구했지만 통제할 수 없는 폭력을 자행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로베스피에르를 제거한 후 다양한 정치 세력들의 경쟁이 제도적 안정을 방해했고, 결국 카리스마 넘치는 장군이 국가를 장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수많은 사건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프랑스는 근대 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장 클레망 마르탱은 이 시기에 일어난 프랑스 국내외의 복잡다단한 사건들을 마치 장편 역사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솜씨 좋게 다루었다.

목차

일러두기 | 머리말

1부 위에서 시작된 혁명이 실패한 이유

1장 잇단 혁명의 시대
2장 절대군주정, 옭매인 걸리버인가?
3장 국가의 결점
4장 다양한 의견
5장 부르봉 가문의 몰락

2부 마지막 혁명: 재생인가, 혁명인가

1장 절대군주정의 혁명에서 국민국가 혁명까지
2장 혁명을 주도하기
3장 통일성의 추구
4장 국민, 국가, 종교
5장 모순의 정치화
6장 헛된 승리
7장 분열된 국민

3부 제2의 혁명: 사회혁명, 공동체의 이상향인가 또는 전쟁국가인가

1장 인민과 혁명가들
2장 분열한 국가, 1792년 9월~1793년 7월
3장 전쟁을 지배하다: 1793년 7월~1793년 12월
4장 혁명국가: 1793년 12월~1794년 4월
5장 테르미도르 또는 혼란

4부 몰수당한 혁명: 궁중혁명과 정변

1장 혁명과 반동 사이
2장 새로운 체제
3장 몰수당한 공화국
4장 모습을 갖춘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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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948년생으로 1987년에 국가박사 학위를 받은 후 1988년부터 파리 13대학(소르본 파리 노르), 파리 10대학(낭테르)을 거쳐 2000년 파리 1대학(팡테옹 소르본)에서 프랑스 혁명사 교수로 재직하면서 ‘프랑스혁명사연구소’를 이끌다가 2008년부터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혁명과 반혁명, 폭력에 관한 저작을 많이 발간했으며 대표 저서는 다음과 같다. 『1793년 1월 21일, 왕의 처형L’Exec...

역 : 주명철

 
한국전쟁기라는 엄혹한 시절에 태어나 학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사학을 전공했다. 역사공부의 참맛을 제대로 느껴보고자 무모하게 프랑스로 떠나 파리 1대학에서 알베르 소불 교수에게 입학허가를 받았으나 그분이 갑자기 세상을 뜨는 바람에 다니엘 로슈 교수의 지도 아래 박사학위를 받았다. 소불 교수에게 프랑스 혁명사를 배우지 못한 것은 큰 한이겠으나, 로슈 교수에게 앙시앵레짐의 사회와 문화를 배운 것이 오히려 ...

책 속으로

1789년 7월의 바스티유 정복이 프랑스인들이 성공한 혁명의 상징이 된 것을 보면서 ‘혁명가들’이 성공했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 당시에는 그들은 보기 드문 존재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당시 사람들이 믿기지 않는 사건을 목격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이해하는 증거로 파악해야 한다. 그 사건은 그 시대에 가장 중요한 도시에서 일련의 실패를 수없이 거듭한 뒤에 성공한 혁명이었다. 단숨에 ‘혁명’이라는 말은 완전히 다른 뜻으로 바뀌었다.
--- p.24~25

우리는 1789년의 ‘바스티유 정복’이 200년 뒤 ‘베를린 장벽’을 허문 사건과 맞먹는 일임을 이해한다.
--- p.69

프랑스 군주정의 절대주의 계획은 사실상 1780년 이전에 실패했고, 루이 14세가 꿈꾸던 건물의 외관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드리운 그림자만으로도 허수아비와 핑계로 삼기에 충분하리라. 이 모든 점에서 루이 16세는 자기보다 훨씬 큰 옷을 입고 있었다. 결국 그는 물려받은 모순의 총체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머리를 바칠 것이다.
--- p.88

역사를 쓸 때 우리는 모든 범주를 세심하게 다루어야 한다. 예를 들어 전체사hitoire globale는 개인들이 무리를 지어 역학관계?계산?야망에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을 잊고, 그들을 집단 속의 행위자로 취급하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다. 우리는 신중한 태도로 수세기에 걸친 [중장기적] 관점을 피해야 한다. (중략) 경제가 발전하면서 사회가 더욱 심하게 분열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갈등의 복잡한 양상도 기억해야 한다. (중략) 1750년부터 1770년까지 신분사회에서 계급사회로 넘어갔다는 생각이 얼핏 그럴듯하게 보인다고 해서 아무런 토론도 거치지 않고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 p.116~117

모든 계열의 특권과 제도적 제한에 저항하려는 의도를 가진 중?상류 계급에서 독창적인 정치?사회 분위기가 탄생했다. 다른 나라의 정치는 사회의 모든 범주나 일상생활의 모든 측면을 다루지 않았지만, 그들과 달리 프랑스는 문화적 규범을 모두 문제 삼았다.
--- p.144

종교와 권력, 종교인과 군주의 관계는 단 한 번도 간단하거나 평화로웠던 때가 없었다. (중략) 왕국을 장악한 두 세력은 조금씩 멀어져 일단 혁명이 일어난 뒤에는 돌이킬 수 없이 중대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러나 아주 은밀하게 얀센주의나 교황권 지상주의 때문에 종교적 분열이 일어나면서 기독교 군주정을 위태롭게 만드는 풍토를 조성했다.
--- p.145~146

혁명가들에게 우호적인 역사 서술은 이러한 유형의 결론을 퍼뜨린다. 그것은 7월 14일의 ‘혁명 군중’에 합류한 ‘혁명가들’의 결심을 강조하는 한편, 제3공화국의 정통성을 정당화해주는 에피날의 그림에서 확증하지 않는 것을 모두 무시했다. / 반대편의 역사 서술도 똑같은 도식을 유지했지만, 혁명가들이 나라를 ‘공포정’으로 이끌어갔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면서 그들의 비현실주의를 고발했다. 시에예스의 고립, 절대주의를 거부하는 반혁명가들의 계산, 왕과 궁중의 지속적인 실수, 반란의 전통, 이 모든 것 때문에 전환점이 발생하고, 몇 달 동안에 ‘혁명’과 진정한 의미의 ‘헌법제정’으로 가는 길로 들어서게 된다.
--- p.242~243

프랑스는 어떻게 혁명을 시작했는가? 정치지형이 근본적으로 재편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종교적 관용이 가톨릭교의 우월한 지위를 흔들었다. 아직 완성하지 못한 헌법에서 정의하듯이, 왕이 사실상 신성하고 ‘불가침’의 존재로 남아 있었다 해도, 왕국은 더는 왕의 물리적 존재를 중심으로 조직되지 않았다. (중략) 1789년 7월 이후, 왕도 개입했던 왕국의 재생은 이렇게 공동주권을 창조했다.
--- p.273

프랑스는 전통적인 의미로 이해할 때 다수의 ‘국민’과 다수의 ‘민족’이 서로 느슨한 관계를 맺고 하나가 된 나라였다. (중략) ‘국민’이라는 강박관념은 왕의 통치권이 약해진 뒤의 체제를 세울 확고한 기초를 찾으려는 희망, 그리고 반란을 일으킨 ‘인민’의 요구를 두려워한 마음 때문에 생겼다.
--- p.286~287

혁명/반혁명의 양극화는 재산, 사회적 구별, 피부색, 종교와 관련한 적대감의 표현이었고, 일련의 사건과 수많은 신화가 접합시킨 덩어리들을 만들어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프랑스나 인류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그리기 위해 이처럼 이분법적 방식을 적용한다면, 모든 이의 기대, 투쟁, 추억을 결코 담아내지 못한 채 놓쳐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 p.378~379

역사를 쓸 때 본질적으로 모든 성인전聖人傳을 비판해야 하며,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는 선언을 진실로 쉽게 믿거나, 인간이란 원래 윤리적인 요소보다는 잔인한 존재라는 관점을 발명해서도 안 된다.
--- p.469

재정을 회복하지 못하는 것이 언제나 체제의 약점이었다. 세금이 안 걷히고, 돈이 귀했으며, 국유재산 매각사업을 벨기에까지 확장했지만 늘 적자를 면하지 못했다. 매수자들이 재산을 지킬 확실한 수단이 점점 줄어들었음에도 그들에 대한 비판은 늘기만 했다. 국가는 채권자들에게 현금상환권을 지급했지만, 그마저도 투기 대상이 되었다. 상업어음이 유통되면서 정화의 부족을 극복했지만 투기꾼과 부자들만 혜택을 보았다. 빈부 격차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금리생활자와 봉급생활자는 물가 폭등에 직접 영향을 받았고, 도시에 돈이 돌지 않으면서 수많은 극빈자가 도움을 받지 못했다. 공화국은 과두제를 옹호하고, 프랑스 인구 절반이 실현한 이익을 보장하며, 군대를 체제의 중심에 두기 위해 독재국가로 변했다.
--- p.772~773

국가의 주요 예산을 보면 군대가 분명히 필요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군대가 항상 비어 있던 국고에 자금을 채워주고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중략) 일부는 그의 약탈을 싫어했지만 군대가 권력에 관한 인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반혁명적 외국인 관찰자들이 보기에 군대는 ‘두려운 혁명’의 모습이었고, 보나파르트는 그것의 화신이었다.
--- p.803~804
 

출판사 리뷰

『새로 쓴 프랑스 혁명사』는 잠재력이 가득한 탐정소설 같다.
결국 독자는 여러 가지 해결책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프랑스 혁명사 연보Annales historiques de la Revolution francaise』

◆ 새로운 역사 서술 방법론으로 집대성한 프랑스 혁명의 시작과 끝

저자 장 클레망 마르탱은 20세기 후반의 대표적 혁명사가인 알베르 소불의 계급사관을 거부한다. 저자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 계층이 일으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계층이 혁명의 산물이라는 견해도 여전히 논증해야 할 일로 남아 있다고 말한다. 물론 소불을 위시한 앞 세대 역사가들의 탁월한 연구 성과는 충분히 인정하고 계승하지만, 지나치게 중장기적 관점으로 혁명기를 재단하거나 특히 정치사상을 우위에 두는 방법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한마디로 저자는 아날학파의 세례를 받은 ‘역사 수정주의’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번역한 주명철 명예교수는 ‘프랑스 혁명사 시리즈 10부작’을 비롯해 관련 도서를 다수 집필, 번역해온 최고의 전문가로서 저자의 학문적 배경에 대해 이렇게 짚어준다.

“아날학파는 ‘역사의 본질은 무엇인가, 새로운 역사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새로운 대상은 무엇인가’(1974, Faire de l’histoire)라는 질문을 던져 역사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 그들은 이미 활용하던 자료를 새로운 문제의식과 방법론을 적용해서 다시 읽었고, 특히 유언장이나 장서를 포함한 재산목록 따위의 공증인 자료를 발굴해서 사회 집단의 교육 수준과 정신자세라는 문화적 요소가 경제적 요소만큼 중요하다는 사실도 증명했다. 그 후 50년 동안 그들은 경제 중심에서 문화 중심으로 사회사의 지평을 넓혔고, 특정 사회 집단에 속한 개인이 저마다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거나 소비한다는 가설을 증명하는 미시사 영역의 길을 텄다. 프랑스 혁명사 연구도 직접 또는 간접으로 이러한 여정에 얽혔고 그 혜택을 톡톡히 누렸다. 장 클레망 마르탱은 혁명과 반동에 관한 풍부한 지식과 방대한 사료를 마음껏 활용해서 이 책을 썼으며,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와 인포그래픽으로 보는 프랑스 혁명』은 이 방대한 역사적 사실과 흐름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지난 30여 년간 숱한 ‘사건’을 중심으로 프랑스 혁명기를 왕성하게 연구해온 저자는 영어권의 최근 연구 성과까지를 포괄하는 이 책에서 무엇보다 올바른 역사관의 정립과 서술 태도가 중요함을 역설한다.

“아무런 정치관념도 없던 사람들이 위대한 정치와 민중 정치를, 합리적 분석과 예언을, 영웅주의와 추잡한 짓을 혼동하면서 복잡한 관념을 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다. (중략) 존재와 사물의 불합리성을 합리적으로 고려하는 역사방법론이 특히 모든 반발과 분열에 적용된다는 사실을 존중하고, 어떠한 신성성을 추구하지 않으면서도 과거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략) 혁명의 ‘순간들’을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다. (중략) 이 책의 목적은 혁명의 전체 ‘기간’(메스트르가 말한 ‘시대epoque’) 속에 이 ‘순간들’을 등록하고, 개인과 집단의 관계를 지배하는 미세한 장치들까지 고려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절대군주정이 개혁을 실시하면서 시작하고, 귀족과 고등법원 인사들의 반대 운동으로 연장되고, 결국 ‘민중’의 봉기로 완성하는 혁명의 실험 과정과 함께 군사국가가 탄생했다가 자유주의 국가로 바뀌고, 마침내 마력(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 중심의 국가를 조직하는 과정을 다루었다. (중략) 프랑스의 가장 결정적인 시기의 역사를 쓰려면 종합적 분석과 미리 나눈 범주에 맞춰 설명하는 방식을 비판하고, 평범한 개인들이 집단이 될 때 맡는 역할과 함께 주도적 행위를 고려해야 한다. 이 경우 사실의 미로를 헤쳐 나가고 언제나 공백이 있게 마련인 문서를 끊임없이 뒤지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_ 「머리말」 중에서

◆ 프랑스 혁명은 ‘구체제의 위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18세기에 ‘혁명’은 프랑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명예혁명으로 유명한 영국을 비롯해 제네바, 폴란드, 스웨덴, 특히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일어난 일련의 ‘대서양 혁명’이 있었다. 그러나 절대주의 체제인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 왕과 왕비가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것은 역사의 엄청난 분기점이자 충격이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1789~1799년을 휩쓴 프랑스의 사회변화만을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도록 만든 것은 대서양 혁명이 ‘부드러운’ 혁명이자 계몽주의 시대에 잇달아 일어나 국내 문제와 신분이나 시민 공동체의 긴장을 해결하는 ‘혁명들’에 속하고 대부분 실패한 데 비해 프랑스 혁명은 1789년까지 일어난 이런 방식의 혁명들과 전혀 다를 뿐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일어난 ‘혁명’이었으며, 민중 세력이 사회지도층 세력만큼 중요했고 명사들의 지도체제를 설립하는 것과 다른 정치적 해법을 요구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많은 사람이 흔히 오해하는 사실 중 가장 중요한 지점은 혁명은 새로운 것이고 구체제는 낡은 것이라는 이분법적 시각에서 프랑스 혁명이 구체제의 위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안이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저자는 “혁명의 문턱을 넘었다는 집단의식은 분명히 1789년부터 생겼지만, 프랑스 절대군주정의 구조가 허약하고 결국 무너지리라는 생각은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1789년에는 절대군주정의 질서 파괴보다는 이미 죽음의 문턱에 선 체제의 잔재에 붙인 이름이 관건이었다. 앙시앵레짐의 절대주의는 이미 1760~1770년부터 몰락하고 있던 건물을 가리는 벽면이었을 뿐이다”(71쪽), “혁명이 전혀 새로운 의미를 발명하고, 그렇게 해서 나라를 불행한 모험에 허우적거리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면서 혁명의 ‘새로움’과 구체제의 ‘낡음’을 대립시켜서는 안 된다”(154쪽)라고 단호하게 지적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정부가 세 가지 정책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까 망설이던 순간이 바로 혁명사의 실마리였다. 조세제도가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될 세 가지 정책 가운데 첫째는 프랑스가 부채상환 방법을 토의할 수 있는 입헌군주국으로 남을 것인가, 둘째는 전문직이 참여하는 정부를 운영하면서 난폭할 정도의 세금을 부과하는 절대주의 국가가 될 것인가, 셋째는 전통 귀족이 왕과 백성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는 ‘혼합형mixte’ 군주정이 될 것인가? 어떤 경우에도 프랑스 혁명은 ‘구체제의 위기’ 때문이 아니라 일련의 상황들이 결합해서 생겼다. (105~106쪽)

◆ 프랑스 혁명은 미리 계획한 개혁이 아니라 타협과 우발적 사건의 산물이다

30여 년간 프랑스 혁명사를 연구해온 저자는 ‘혁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888쪽이나 되는 이 방대한 책에서 저자가 ‘혁명’ 자체에 대해 언급한 부문만 간단히 추려서 살펴보자.

혁명은 영원히 채우지 못할 기대와 실패의 불안을 조성하면서 수많은 경험을 끊임없이 창조하고 확인해주는 과정이다. (17쪽)

혁명이란 멋대로 날뛰거나 궤도를 벗어난 기계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쇄신하고 기초부터 다시 놓는 과정과 배제하고 탄압하는 과정이 나선형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것. (18쪽)

[사실상] 왕의 ‘나약함mollesse’ 때문에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루이 14세나 보나파르트처럼 강한 성격이었다면 혁명을 막았을 것이다. (70쪽)

혁명은 집단이 체제와 국가가 인류 역사와 맺은 관계를 끊는다는 의식을 갖출 때 일어난다.
(95쪽)

혁명은 전혀 한 덩어리bloc인 적이 없었고, 전체적으로 함께 작용하지만 서로 대립하던 흐름들의 영향을 받아 움직인 집단들이 관리한 충격에서 나온 것. (492쪽)

국가를 중앙집권화하고 급격히 정치화한 것은 혁명이 아니라, 그 반대로 수많은 의견을 가진 개인들이 몰려들어 개입한 결과였다. (500쪽)

이처럼 저자는 ‘혁명’의 뜻을 예단하지 않고 평가해야 하며, 당시 여론이 국내외적 상황과 함께 ‘혁명’을 어떤 맥락에 접목시켜 언급했는지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1789년, 프랑스에서 가장 널리 받아들인 것은 재생이었다.”(246쪽) 결론적으로 프랑스는 고질적인 재정적자와 세금문제, 종교 갈등, 극심한 빈부격차에 따른 민중의 불만이 누적된 결과, 1789년 이전에 이미 혁명을 겪기 시작했다고 평가한다. 그 근거로 농촌과 도시에서 30여 년 동안 반란과 봉기가 지속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을 꼽는다. “이념적으로 야릇한 지름길을 부추기는 요약에 의존하는” 전체사적 해석을 경계하면서 “역사를 쓸 때 그 어느 때보다 정치철학의 체계적 분석에 솔깃해져 굴복하는 일을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저자는 “프랑스 혁명은 미리 계획한 개혁이 아니라 타협과 우발적 사건이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왕국의 헌법을 요구한다고 분명히 말하지 못한 상황이 진짜 혁명적인 목표보다 더 큰 역할을 했다”(241쪽)고 지적한다. 그리고 “우리는 혁명기를 종교전쟁기부터 온갖 갈등을 극복하면서 근대국가를 발명하고 절대군주정을 세우는 과정의 끝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99쪽)라고 결론짓는다.

◆ ‘계몽주의’를 ‘구체제’와 대립시키는 것은 역사적 신화 만들기다

프랑스 혁명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계몽주의다. 그중에서도 볼테르와 루소의 비중이 가장 크다고 말할 수 있다(1791년에는 볼테르가, 1794년에는 루소가 팡테옹에 안장되었다). 특히 루소의 ‘일반의지’라는 명제는 국회의 좌파와 우파 모두가 받아들인 개념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그렇다고 해서 계몽주의가 혁명의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기존 관념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계몽주의와 혁명의 관계를 둘러싸고 지난 2세기 동안 연구자들이 그릇된 토론에 힘을 쏟았다고 일침을 가한다. 저자는 기존 연구들이 가진 한계를 다음과 같이 짚어준다.

계몽주의의 마지막 대표들이 1790년 이후 비판의 대상이 되고, 더욱이 국회에서도 조심스럽게 침묵하고 숨어야 했던 현실은 좀처럼 고려하지 않았다. 1791년에 볼테르와 1794년에 루소를 장엄하게 팡테옹Pantheon에 안장했다고 해서 불화가 존재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의 다양한 현실을 이해하려면 계몽사상가와 프리메이슨이 프랑스 사회를 파탄 냈다고 비난하는 반혁명가들은 물론 생쥐스트Saint-Just처럼 18세기 전체를 팡테옹에 안장해야 한다는 혁명가들의 주장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여러 가지 맥락에 있으면서도 마르크스처럼 계몽주의를 봉건주의와 싸우는 부르주아 계층의 도약과 연결하거나, 카시러Cassirer처럼 계몽주의란 이성을 해방자로 믿는 행위로 보거나, 아도르노Adorno와 호르크하이머Horkheimer, 아렌트Arendt처럼 계몽주의란 모든 사회의 인간적 요소를 제거하고 전체주의의 기초를 놓는 데까지 현실세계를 지배하려는 욕망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추종하는 사상가들과도 멀리해야 한다. 이러한 해석은 모두 자극적이긴 해도 똑같은 결점을 가졌다. 불평등하고 모순투성이며 나라마다 다른 특성을 가진 운동을 포괄하고 단일화하려는 의도. (중략) 계몽주의가 프랑스 혁명에 책임이 있으며, 그 자체의 야망도 파괴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비난은 19세기에 수많은 현실을 혼합해서 나온 결과다. (중략) ‘계몽주의’를 ‘구체제’와 대립시키는 것은 역사적 신화 만들기다. (134~135쪽)

◆ 테르미도르 정변과 ‘위대한 혁명가’ 로베스피에르

이 책에서 저자는 크게 대서양 혁명기부터 나폴레옹이 제1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집정관정부의 총재로 권력을 장악한 시기까지를 다루는데, 프랑스 혁명기 자체는 1789~1799년까지의 10년을 중심으로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눌 수 있다. 그중 후반기는 혁명을 부인하는 시기였으며, 이 시기를 전후해 가장 주목해야 할 인물이 바로 ‘공포정’의 화신으로 알려진 로베스피에르다. 1794년 7월 27일, 혁명정부를 이끌던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었다. 그 사건은 ‘테르미도르 정변’이라고 불리며, 사실상 ‘반동’에 해당한다. 이렇게 혁명기 전반기가 막을 내렸는데, 저자에 따르면 “테르미도르는 사건이자 개념”이다. 저자는 ‘공포정’이라는 개념은 “테르미도르 반동파가 발명”한 것이며, “1793~1794년까지 정부의 어떤 위원회도 명시적으로 이러한 체제를 말하고 수립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지역사회의 수호, 신속한 법적 처벌, 정치적 폭력의 관행들이 1789년 이전의 군주정 시기에도 있었음을 다시 짚고 넘어가자”(404쪽)고 강조한다.

저자는 불철주야 혁명에 매진하던 로베스피에르가 동지들의 배반으로 목숨을 잃고 ‘단두대의 역겨움’이라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든 ‘공포정’의 주역이자 독재자라는 오명을 혼자 뒤집어쓴 것에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혁명이 과도한 공포정을 실시했고 그것을 로베스피에르의 책임이라고 비난하기 위해 이용되었기 때문에 처형자의 수가 알려진 것은 아닐까?”(651쪽), “푸키에 탱빌Fouquier-Tinville과 안보위원회가 일부러 법 집행을 마구잡이로 했기 때문에 ‘단두대의 역겨움’은 프레리알 법의 책임이 되었다. 이에 따라 로베스피에르는 쉽사리 변명할 여지도 없이 그 책임을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로베스피에르는 바둑을 둘 때처럼 달리 행동할 방법을 찾지 못해서 덫에 걸리고 말았다. 망명자들은 출판물에서 그의 ‘독재’를 언급했다. (중략) 구국위원회 동료들뿐 아니라 안보위원회와도 불화를 겪었다. 특히 그는 ‘내부의 적’을 직접 위협했기 때문에 고립을 자초했다. 여론도 그를 외면했다.”(652쪽) 그러나 후세에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의 화신으로 재조명되는데,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우리는 로베스피에르가 후세의 마음을 얻은 것이 (퓌레F. Furet의 말처럼) “그가 혁명의 가장 비극적이고 가장 순수한 이야기를 대변”했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이 분야에서 분명히 미라보를 이겼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에게는 좀 더 신경질적이며, 정부의 타협을 모두 거부하면서 혁명에 전념한 마라라는 경쟁자가 있었다. 로베스피에르가 혁명의 화신이 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그것은 [바레르나 비요 바렌처럼] 어제의 동지가 영원한 적이 되어 ‘공포정’으로 불린 정치적 폭력의 책임을 그에게 돌리고 오직 그만이 책임지도록 했으며, 무슨 일을 벌이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전혀 예상치 못하고 출구도 없는 방향으로 혁명을 난폭하게 몰아갔기 때문이다. 그의 신화는 이상하게도 그의 명성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그를 사형집행인으로 기억한 방데의 신화가 뒤섞이는 과정을 거쳐서 태어났다. (662쪽)

◆ 나폴레옹에게 몰수당한 혁명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프랑스 사람일 것이다. 파란만장한 인생사와 신화의 주인공이자 프랑스 혁명에 종지부를 찍고 1804년에 스스로 ‘황제’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인 만큼 비범하고 매력적인 면이 분명히 있다는 점을 저자도 인정한다. 그러나 냉정하고 객관적인 서술을 중시하는 역사가의 입장에서는 이탈리아를 비롯한 외국 원정을 통해 국고를 채우고 영토를 확장한 나폴레옹의 ‘성공 신화’ 중에서 추잡하거나 하찮게 비친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보나파르트의 신화를 깨뜨리고 싶지만, 그가 당시에 성공한 이유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면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보나파르트는 (중략) 이탈리아를 통제하고, 유럽을 재편하고, 프랑스 국민의 삶에 개입하려는 전략을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고 수립했다. 바라스 같은 총재들은 레오벤에서 예비협상을 할 때 많은 돈을 받았는데, 보나파르트는 그들이 돈을 밝힌다는 사실을 이용할 줄 알았다. (중략) 보나파르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공포정책을 체계적으로 활용했다. 1797년 4월 17일 베로나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추잡하게도 보나파르트는 주민과 군대의 적대감을 이용해서 베네치아 공화국을 점령했다. (763~764쪽)

이탈리아 원정은 보나파르트를 말 그대로 국가 정치생활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그의 무공은 능숙한 선전을 통해 프랑스에 세심하게 전달되었고, (중략) 이탈리아 원정은 비록 제한되고 미미한 결과를 낳았음에도 지중해와 보나파르트를 중심으로 프랑스 정치의 균형을 흔들었을 뿐 아니라 전쟁의 목표와 방법, 프랑스인과 권력자들의 관계, 그리고 정치적 의미를 바꾸어놓았다. (766쪽)

저자는 이탈리아 원정에 관한 선전이 나폴레옹의 전설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전환점이 되었지만, 거물급 인사들이 살롱에 모여 계속 음모를 꾸미고 있었기 때문에 보나파르트가 권력을 잃을 뻔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아직 서른 살도 안 된 때 총재가 되고 싶어 헌법에 명시된 마흔 살 이상의 조항을 무시하면서 바라스와 탈리엥에게 지원을 요구하고 결국 술책의 달인 탈레랑의 지지를 받은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가 야망이 크고 정치적 정력이 유별났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혁명이 몹시 급격하게 근대성을 도입한 탓에 국가와 프랑스인 사이에는 괴리감이 존재했는데, 보나파르트는 이에 “강압과 유혹으로 대응했다. 브뤼메르 정변으로 태어난 국가의 성격이 모호했기 때문에 제국으로, 보나파르트 중심주의로, 한마디로 전례 없는 정치문화로 나아가는 새로운 전망이 열렸다”(836쪽)고 설명한다.

끝으로 저자는 나폴레옹이 자신의 원칙을 담은 근대적 헌법을 만든 것은 인정하면서도 그가 일으킨 1799년 11월 9일(브뤼메르 18일)의 무장정변은 “단검으로 무장한 모의자들에게 거둔 하찮은 승리”였으며, “역사를 침묵시켜 혁명의 추억에 재갈을 물리고 역사가들을 통제한다는 사실을 예고했다”(841쪽)라고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책을 마무리한다.

200년도 훨씬 더 지난 과거의 역사적 대사건에 우리가 여전히 관심을 갖고 계속 더 깊은 연구를 해나가야 하는 이유는 저자의 말처럼 “오늘날의 지적 발전과 정치적 토론에 참여하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사를 써나가는 주체인 개인과 집단의 관계와 상호작용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 더없이 좋은 주제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