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국제평화 연구 (독서)/1.국제정치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 (2023)

동방박사님 2023. 12. 23.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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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은 저자 이삼성(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명예교수)이 전후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의 구조에 관한 우리 자신의 독자적인 아시아적 전망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이 질서에 대한 대안적 개념화를 추구해온 지난 20년간의 지성사적 오디세이다.

저자는 동아시아에 대해 유럽과 마찬가지로 냉전-탈냉전의 이분법으로 논하거나 또는 북방삼각-남방삼각의 대립이라는 식의 다분히 평면적인 도식에 근거한 상투적인 논의들을 넘어선다. 그래서 동아시아 질서가 내포한 질곡의 구조에 대한 더 포괄적이고 더 깊은 개념화를 시도한다. 전후 세계와의 수평적 연관성과 함께 20세기 전체에 걸친 동아시아의 역사적 조건과의 수직적 연결을 또한 그 개념 속에 담아낸다.

대분단체제론은 먼저 중국대륙과 미일동맹의 대립을 가리키는 ‘대분단의 기축’과 복수의 ‘소분단체제’들로 이루어진 구조의 중층성을 주목한다. 이어 대분단의 기축을 구성하는 긴장의 다차원성―지정학적 긴장,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긴장, 그리고 역사심리적 긴장―을 정의한다. 또한 그렇게 중층적이고 다차원적인 구성단위들 사이의 상호의존과 상호작용성에 착목한다. 이로써 전후 동아시아 질서가 내포한 고유성과 그것이 냉전-탈냉전의 이분법을 넘어 21세기 오늘에까지 이어지는 연속성을 개념화한 것이다. 아울러 그 구조와 내용이 시대와 함께 진화하는 양상을 분석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닫힌 질곡의 구조를 극복할 출구는 어디에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는다.

목차

전쟁과 평화의 구조에 대한 아시아적 전망의 오디세이│책을 펴내며

제 1 장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과 미중 갈등 그리고 한반도(2023)
1. 동아시아 근현대사에서 미중관계의 전제로서의 미일연합
2. 전후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성립 : 냉전과 탈냉전을 관통하는 연속성
3. 2000년대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진화
4. 대분단체제 제3국면의 동아시아와 한반도
5. 경직화하는 양극적 동맹체제에서 미일동맹과 한국의 선택
6. 가야 했지만 가지 않은 길
7. 맺는말 : 한반도 평화의 위기는 문명적·생태적 위기

제 2 장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의 역사인식과 동아시아(2023)
1.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투하와 한반도
2.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투하와 인간적 희생
3. 미국의 대일본 원폭사용 결정의 과정과 동기
4. 원폭과 전쟁종결의 역사적 인과(因果)
5. 원폭투하 사태에 대한 천황의 책임과 일본사회 내부 반전(反戰)의 문제
6. 전략폭격의 반인도성과 그 절정으로서의 원폭
7. 원폭사용의 정당성에 관한 시선들
8. 원폭사용을 배제했을 때 역사의 향방에 관한 인식
9.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폐쇄회로와 히로시마·나가사키

제 3 장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와 신냉전, 그리고 그 너머(2022)
1. 대분단체제로 바라본 전후 동아시아
2. 탈냉전 후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지속 : 3차원적 긴장의 재충전
3. 탈냉전기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제1국면과 제2국면
4. 2010년대 말 이후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제3국면과 러시아-서방의 신냉전
5. 제3국면이 동아시아 평화에 제기하는 세 가지 도전
6. 미중 패권경쟁 속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논리들과 대안의 사고
7. 동아시아 사회들의 연결된 운명과 세 가지 선택

제 4 장 한반도 정전체제의 동아시아적 맥락과 평화체제 전환의 요건(2020)
1. 전후 동아시아질서의 구성과 한국전쟁의 동아시아적 맥락
2. 정전협정과 제네바회의에서 한국과 인도차이나
3. 한국 정전협정과 베트남 평화협정 무력화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4. 한반도 정전체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그리고 미국 중심 세계체제
5. 냉전기 대분단체제의 타협국면 전환과 한반도 정전체제 변화의 기회와 좌절
6. 탈냉전 30년,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와 한반도 정전체제의 지속
7. 오바마 행정부와 북한 핵무장의 질주(疾走)
8. 2018년 한반도의 봄과 겨울 : 4·27 판문점선언과 6·12 싱가포르선언
9. 하노이회담 실패는 어떻게 준비되었나
10. 맺는말

제 5 장 일본 역사문제의 구조와 동아시아 국제질서(2019)
1. 역사문제란 무엇인가
2. 역사문제의 심각성과 지속의 원인 : 폭력의 크기가 아닌 맥락성
3. 분석 틀 : 국제질서의 맥락성, 그리고 역사청산의 객관적 요소와 주체적 요소
4. 전전의 동아시아질서와 일본 역사문제의 중첩성 : 제국체제의 동아시아
5. 전후 3년 일본 역사청산의 국제적 조건 : 외적 강제의 수준과 방식
6. 냉전기 일본 역사청산의 주체적 요소와 동아시아 국제질서
7. 탈냉전 이후 일본 역사문제의 증폭과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8. 일본 역사문제와 동아시아질서의 딜레마

제 6 장 3·1 운동 후 100년 동아시아의 초상(2019)
1. 제국의 시대에 나라 없음의 문제
2. 전후 세계에서 제국과 나라의 의미 유전(流轉)
3. 전후 동아시아질서와 한반도 국가의 초상(肖像)
4. 동아시아의 역사대화 방식의 전환을 위해
5. 맺는말

제 7 장 제주도, 또 하나의 발칸 혹은 동아시아의 제네바(2018)
1. 글머리에
2. 21세기 동아시아의 핵군비경쟁
3. 트럼프 행정부의 핵전략과 강정 기지의 미국 해상 핵무기기지 본격화 위험
4. 제주 해군기지 건설 이후의 제주도 : 두 개의 다른 미래
5. ‘세계평화의 섬’과 양립가능한 강정항 : 민군복합 관광미항 유지가 최소 조건
6. 제주 해군기지의 미군기지화를 막을 세 가지 명분
7. 제주 강정항의 해군기지 전용화 및 팽창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
8. 제주 해군기지의 미 해군기지화 방지를 위해 시급한 노력
9.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이후의 제주도: ‘동아시아 평화벨트’를 상상하기
10. 맺는말

제 8 장 제국과 천하 담론의 개념사적 맥락(2018)
1. 질서표상으로서의 ‘제국’과 ‘천하’
2. 전통시대 중국의 천하 개념과 그 도덕적 및 공간적 내포
3. 근대 일본과 천하 개념을 대체한 질서표상 개념으로서의 ‘제국’
4. 냉전과 탈냉전 : 제국 개념의 추락과 도덕적 복권의 지성사
5. 좌우파 모두에서 진행된 21세기 ‘제국’ 개념의 풍미와 ‘천하’ 담론의 복원
6. 맺는말 : 제국과 천하 담론 그리고 ‘문명국가’론의 지성사적 접점?

제 9 장 전후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구성과 중국(2016)
1. 문제의 제기
2.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의 대강
3. 전후 동아시아질서의 역사적 형성과정과 중국의 구성적(構成的) 역할
4. 맺는말

제 10 장 제국 개념의 동아시아적 기원 재고(2014)
1. 문제의 제기
2. 전통시대 중국의 ‘제국’ : 왕통과 『태평어람』의 ‘제국’
3. 전통시대 중국과 고대 일본에서 ‘황국’ 개념의 부재와 ‘천조’ 개념의 보편성
4. 중국에서 ‘황’과 ‘제’는 왜 ‘국’과 결합하지 않았는가 : 천하와 국가의 차이
5. 고대 한국에서 ‘제국’ 개념의 발신
6. 고대 한국에서 ‘제국’ 개념 성립의 전제와 ‘가외천황’ 개념
7. 7세기 초 일본의 대(對)중국 외교문서와 칭제 문제의 인식
8. 어떻게 볼 것인가 : 한자문명 개념의 매개자로서의 백제의 역할
9. 맺는말

제 11 장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란 무엇인가(2014)
1. 동아시아질서의 통시적 연속성
2. 청일전쟁부터 1945년까지는 동아시아 제국체제
3. 전후 동아시아질서의 상호작용성
4. 중국 내전이 동아시아질서를 결정
5. 대·소 분단체제 해소와 한국의 선택

제 12 장 한국전쟁과 내전(2013)
1. 문제의 제기
2. 러시아 외교문서 공개와 비수정주의적 내전론의 성립
3. 한국전쟁에 관한 세 가지 ‘내전’ 개념의 구분과 그 기준
4. 맺는말 : 내전 개념의 명료화가 한국전쟁 연구에서 갖는 의미

제 13 장 21세기 동아시아의 지정학(2007)
1. 21세기 중미관계의 이론적 전망 : 미국의 단극패권과 중국의 도전
2. 미국의 기득권으로서의 동아시아 해양패권
3. 미국의 동아태 해양패권과 중국 국력팽창의 내재적 긴장
4. 미일동맹과 그에 대응하는 중러연합의 형성
5. 맺는말 : 중국의 전략적 절제의 이중적 의미

제 14 장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와 타이완-오키나와-제주도(2007)
1. 동아시아 1세기 : 제국주의와 대분단체제의 그늘
2. 동아시아 근현대사와 오키나와, 타이완, 그리고 한반도
3. 제주도 : 대분단체제와 한반도의 관계의 새 국면
4. 대안적 질서의 형상화로서 동아시아 평화벨트

제 15 장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성격에 관한 일고(2006)
1. 문제의 제기
2. 동아시아 지역질서의 개념: 케네스 왈츠와 그 비판적 보완
3.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형성
4.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구조
5. 탈냉전시대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지속과 그 원인
6. 동아시아질서와 한국의 위치: 지정학적·역사심리적 중간자
7. 맺는말

제 16 장 동아시아와 냉전의 기원(2005)
1. 동아시아 냉전구조의 특수성과 냉전의 기원 연구
2. 동아시아 냉전의 현실적 전개와 두 전쟁의 의미
3. 전후 미국의 아시아 전략과 동아시아 냉전의 기원
4. ‘중국에서의 잃어버린 기회’ : ‘신냉전사’ 연구의 도전과 그 한계
5. 맺는말: 지속되는 역사해석의 긴장

제 17 장 한미동맹의 유연화(柔然化)를 위한 제언(2003)
1. 한미동맹체제와 그 사유구조
2.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문제와 한미동맹
3. 동아시아 세력균형 문제와 미국, 그리고 한미동맹
4. 한미동맹 변화의 방향
5. 맺는말

저자 소개

저 : 이삼성 (李三星)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와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예일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통일연구원 연구위원, 한림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가톨릭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일본의 리쓰메이칸대학교 객원교수를 지냈다. 현재는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명예교수로 있다. 롯데출판문화대상 본상(저작 부문, 2019), 한림대학교 학술상(2010), 백상출판문화상(저작 부문, 1999), 단재...

책 속으로

탈냉전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달리 한반도와 동아시아 전반에서는 긴장의 구조가 오히려 더 분명해져가던 1990년대 말부터 필자는 한반도 평화의 동아시아적 맥락에 대한 이론적·개념적 접근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 제기는 그러한 동아시아의 전후 구조 인식에서의 개념적 공백을 메꾸려는 하나의 시도였으며, 전쟁과 평화를 결정하는 전후 우리의 삶의 구조에 대한 우리 자신의 아시아적 전망의 내용을 채우려는 노력이었다.
--- p.10

지정학적 긴장은 이념의 차이와 무관하게, 독립적인 정치공동체들 사이에 으레 형성되기 마련인 영토적·경제적·군사적 영향력 경쟁을 가리킨다. 이념의 함수가 아니고 국력의 함수다. 다만 그것이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이질성이라는 차원과 결합할 때 그 긴장의 강도는 배가된다. 냉전기 후반의 중소대립은 한편으로 같은 이념을 가진 두 거대 국가 사이에 지정학적 긴장이 발전한 것을 뜻했다. 동시에 그것은 다른 이념을 가진 중국과 미국 사이에 존재한 지정학적 긴장이 부분적으로 완화된 것을 말했다. 그 틈을 타서 미국은 베트남전쟁으로부터의 명예로운 후퇴를 위해 중국과 대흥정을 벌였다.
--- p.44

홍콩 사태는 타이완해협의 소분단체제에서뿐 아니라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기축관계에서 작동하는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이질성 차원의 긴장을 더욱 활성화시켰다. 그것은 지정학적 긴장과 역사심리적 긴장의 차원과도 상호작용하면서 이 질서가 내장한 긴장의 복합성을 확인해준다. 타이완해협과 홍콩 사태에서 부각된 민주주의-권위주의 차원의 긴장은 한반도 소분단체제에도 영향을 미친다. 2022년 집권한 한국의 보수 정권은 북한과의 모든 대화를 ‘가짜 평화 쇼’로 규정하는 자신의 대북정책, 미국의 중국 고립화 전략에 대한 동참, 그리고 역사반성을 여전히 거부하는 일본과의 군사협력 강화를 ‘가치외교’ 개념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기본성격인 ‘양극적 동맹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고 경직화하는 데에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문제가 새삼 뚜렷하게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 p.58

가치외교는 정치사회체제와 이념이 다른 사회들과도 일정하게 교린하면서 그것을 신중하게 실천한다면 명분과 합리성이 있다. 그러나 ‘자유연대’라는 기치를 한미일 연합의 명분으로 전면에 내걸며 중국과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그리고 독립적인 ‘중추국가’의 위치에서 관리하기는 어렵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기축관계의 핵심 긴장의 하나인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이질성이라는 문제는 반드시 흑백의 도덕적 피아 구분으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선 경제적으로 현명하지 않음은 많은 한국인이 동의할 것이다. 더 나아가 그것이 군사안보 영역에서도 현명하지 않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자유연대의 기치는 미일동맹과의 더한층 밀착을 한국 국내정치에서 정당화하는 데는 유효하겠지만, 독립적 ‘중추국가’로서 동아시아의 지정학에서 긴장을 평화적으로 관리한다는 절체절명의 과제에는 결코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없다.
--- p.67

윤석열 정부는 북한과의 모든 대화를 ‘가짜 평화 쇼’라고 말해왔다. (하지만) 워싱턴선언은 미국 내 상당수 전문가들에게는 일종의 ‘과장된 안보 쇼’로 비치고 있다.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윌슨센터의 수미 테리(Sue Mi Terry)는 이 선언이 “대체로 수사적인 것”이며 한국 내부의 핵무장파들을 말리려는 “무화과 잎”(fig leaf)에 불과한 것이라고 평했다.
--- p.75

핵무기 사용이 핵교환 초기에 문명 파괴적 수준의 대규모 사용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핵무기의 본질인 순간적 대량파괴력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공포로 말미암아, 국가들은 전쟁에 돌입하는 순간 서로 앞다투어 상대국 핵무기와 그것을 품고 있는 사회 자체에 대한 선제적이고 압도적인 총체적 파괴를 추구하게 된다. 따라서 (핵무장을 한 북한과 한미동맹이 대치하는 한반도의 경우를 포함해) 전쟁 당사국들이 다 같이 다량의 핵무기를 동원할 수 있는 상황에서 전쟁의 발발은 그 지역 전체의 문명과 생태환경의 총체적 파괴로 이어질 가능성이 그만큼 높은 것이다.
--- p.89

김형률은 “평생을 원폭후유증이라는 고통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기억들과 싸워야 하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의 삶”을 토로했다. 그는 2002년 히로시마 평화공원의 원폭자료관을 방문했었다. 원폭의 피해만 내세울 뿐 원폭의 원인이 된 일본 국가의 역사적 범죄에 대한 반성의 자료는 전무하다는 사실에 깊은 실망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한국과 일본의 시민사회가 연대해 진정한 평화를 다음 세대에 건네주자”고 말하며 반핵인권의 이상(理想)을 피력했다. 원폭2세임을 밝히며 한국인 피폭자와 그 2세들의 인권을 위해 당당하게 활동한 생애 마지막 3년을 제외한 그의 삶은 고독 그 자체였다. 그의 젊은 영혼은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를,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돕는 진실한 친구”를 갈망했다.
--- p.102

한국의 운명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미국의 원폭투하가 없었다면 더 불행해졌을 것이란 생각도, 그리고 그 반대의 생각도 모두 역사적 가정법이다. 분명한 것은 미국이 두 도시의 수십만에 달하는 일본인과 한국인의 삶을 철저하게 파괴한 결과로 전개된 한반도의 역사는 누구도 상상하고 싶지 않았을 역정이었다는 사실이다. 뒤늦게나마 한반도의 반쪽이 이룩한 민주화와 산업화의 혜택을 누리는 세대의 시점에서 해방 후 10년의 비극과 그 이후 지속된 분단과 갈등의 역사를 ‘가능한 차선(次善)’이었다고 말해버릴 수는 없다. 필자가 하고 싶은 말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수십만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살육행위에 대한 도덕적 판단과 역사인식의 문제가 어느 쪽으로든 ‘닫힌 역사적 가정법’에 갇혀 전단(專斷)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p.178

2000년대 들어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세계 국제정치학계는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서방과 중국 사이에 경제적 상호의존이 발전해왔기 때문에 동아시아의 평화가 파괴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념이 지배했다. 필자는 그 관념의 안이함과 위험성을 경고하고자 했다. 어떻게든 이 지역에 공동안보의 질서를 구성해내기 위해서 “의식적이고 체계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경제적 상호의존은 “군사안보적 대분단체제의 그늘”에 언제든 덮여버릴 위험을 안고 있다고 필자는 지적했었다.
--- p.195

냉전기에는 동아시아에서 미일동맹과 중국 사이의 긴장을 기축으로 하는 대분단체제가 미소 냉전이라는 더 큰 맥락의 글로벌한 긴장 구조를 배경으로 했다. 반면에 2010년대에 표면화된 서방과 러시아의 신냉전은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긴장 심화와 맞물려 그것에 의존하면서 전개되고 있다.
--- p.198

미국 내 ‘반세계화 포퓰리즘’은 마침내 2020년 대통령선거의 결과를 폭력적으로 부정하며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트럼프는 선거 결과를 뒤집는 쿠데타를 음모한 혐의를 받고 있음에도 미 공화당 전체가 트럼프주의의 포로가 되었다. 트럼프주의는 부유층의 과두정 지향과 중하층 백인사회의 인종주의와 반세계화 포퓰리즘의 연합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적으로 노동계층의 지지에 의존하는 민주당도 중하층 노동자층의 지지를 회복하기 위해 그들의 정치적 요구에 민감해진다. 반세계화 포퓰리즘은 공화당도 민주당도 거스를 수 없는 미국 정치의 추세가 되었다. 반세계화 포퓰리즘으로 표상되는 미국 정치 내부의 반자유주의적 경향과 포용성의 약화가 대외경제정책에서 개방성의 후퇴와 동시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p.201

양극적 군사동맹체제는 각 진영의 구성원들이 동맹 밖의 타자들과 소통하는 것을 동맹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한다. 대신 동맹 내부의 단합대회에 집중한다. 주로 그렇게 전쟁과 그 피해에 대한 공포로부터 자유를 추구한다. 우리는 스스로 미국과 중국 가운데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으며, 당연히 미국을 택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게 우리는 강대국들의 긴장과 경쟁 속에서 한 세력의 첨병이 되어 이웃한 강대국을 향해 비수를 겨누는 역할을 스스로 떠맡게 된다. 그러한 무모한 선택을 불가피할 뿐 아니라 현명한 전략인 것처럼 포장하게 만드는 논리들이 있다.
--- p.223

동아시아의 안보 지형에 그처럼 공동안보의 실마리들이 성립하는 것이야말로 북한 전체주의의 강화나 중국 사회의 전체주의로의 회귀도 근본적으로 막아낼 동아시아 인간안보의 단초가 될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전쟁의 위협과 전체주의의 그림자는 서로 지탱하며 함께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 p.237

동아시아에서 역사인식의 타자화 문제는 냉전기의 담론에서 부차화되었을 뿐, 이념적 타자화와 일치했고, 대륙과 미일동맹 사이의 지정학적 타자화와도 또한 일치했다. 이렇게 삼중으로 결합된 타자화 사이의 상호유지적 상호작용이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본질적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 p.337

분명하게 생각되는 것은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정신적 측면인 역사심리적 간극의 폐쇄회로를 뚫어내는 진정한 힘이 주변국가들의 정치권력이 주도하는 정치외교적 압박이 아니라 일본 사회 안으로부터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가라타니가 말하는 일본인의 ‘평화주의적 초자아’가 지속하고 더 성장할 수 있도록 주변 사회들은 어떻게 함께 노력해나갈 것인가. 그것은 이 시대 동아시아 사회들에게 주어진 공동의 숙제이지만, 우리야말로 지금 그 새로운 시작을 더 치열하게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될 시점이라고 믿는다.
--- p.349

아렌트는 더 나아가 “인권과 근대국가 사이의 긴밀한 의존관계”를 간파했다. 정치철학도 철학 일반과 마찬가지로 탈형이상학화될 수밖에 없었던 20세기에, 흔히 ‘천부적 인권’이라 일컫는 ‘자연법적 권리’는 처음부터 실존하는 권리가 아니라 정치사상일 뿐이었다. 인권의 사상을 현실역사에서 구현하는 공간은 도시국가든 광역적 영토를 가진 큰 사회든, 폴리스(polis)라는 정치공동체 안에서의 정치적 실천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 p.358

한반도 남단의 섬에서도 멀리 남쪽으로 떨어진 ‘이어도’는 거대한 암초다. 기후가 온건한 평상시에는 보이지 않는다. 심한 파도가 쳐야만 비로소 자신을 드러내기에 ‘파랑도’(波浪島)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탈냉전과 함께 경제적 상호의존이 심화된 이후의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는 이를테면 이어도 같은 것이다. 보통은 잘 드러나 보이지 않지만 어느 순간 대분단의 골격이 실체를 드러내면서 잠재적 위험성을 현실화시킬 수 있다.
--- p.372

대분단체제의 지리적 표상이라 할 수 있는 동아시아 대분단선은 미일동맹과 중국 사이의 지정학적 긴장이 축적되는 지점이며, 이 지점을 따라 남으로는 남중국해에서 타이완해협과 오키나와를 거쳐 북으로는 한반도 서해상에 이르기까지 군사화가 심화되고 심지어 군사적 충돌도 일어날 수 있는 위험성을 언제라도 안고 있다. 이 선상(線上)의 섬들은 그 자체로서 군사적 요충지들이며, 그렇기에 ‘동아시아의 발칸’들로 작용할 잠재성을 내포한다. 그러므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에서 지정학적 긴장의 평화적 관리는 이들 대분단선상의 잠재적 발칸들을 어떻게 ‘평화지대’로 전환시킬 수 있을 것인지의 문제와 직결된다.
--- p.409

현실에 발을 딛지 않은 이상의 담론은 역사의 방향에 자국을 낼 수 없는 하나의 문학적 사건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상의 별이 없는 현실주의는 실제 역사에서 전개되는 작고 큰 변화들을 이끌지도 예감하지도 못한다. 인간이 가슴속에 품은 절실한 꿈과 이상은 그가 처해 있는 차돌 같은 현실의 구조 못지않게 그의 삶의 존재론적 구성인자다. 그것은 사회에게도 역사 전체에게도 마찬가지다.
--- p.414

왕후이는 중국-티베트 갈등의 문제에 대해 서방의 ‘민족국가’ 중심의 논의, 혹은 ‘일민족 일국가’의 논리를 비판하고 ‘다민족 일국가’의 논리를 전개하기 위한 취지에서 ‘제국’ 개념을 동원한 것인데, 그의 이 같은 제국 개념의 자연스런 원용이 20세기 말 이래 서방에서 발원한 ‘제국’ 개념의 도덕적 복권에 힘입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p.438

이 글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가외천황’과 ‘제국’ 개념을, 그것이 일본사관들에 의한 조작이 아닐 경우를 전제로 하여, 어떤 개념사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인가를 논의한 것이다. 한반도인들이 일본에 대해 선진 한자문명의 매개자로서 활동했던 점에 비추어, ‘천황’은 ‘제국’과 함께 한반도인들이 일본에 매개한 정치외교적 개념일 가능성을 논의했다.
--- p.526

탈냉전 이후에도 동아시아는 유럽과 달리 질서의 연속성이 강했다. 유라시아 대륙 전반과 미국 사이의 지정학적 긴장은 소련 붕괴로 급변했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의 부국강병으로 지정학적 차원의 긴장이 재충전된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긴장은 중국의 개혁개방으로 완화되지만, 한국·타이완·필리핀 등은 민주화된 반면 톈안먼사태로 중국과의 정치체제적 이질성이 재확인된다. 권위주의와 민주주의의 이질성이 또 다른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으로 부상한 것이다. 대분단체제가 응결시켜 보존했던 역사심리적 간극은 탈냉전과 함께 해방된 역사 담론이 민간과 정부 차원에서 더 활성화되면서 지속된다. 과거 공산주의와 반공주의를 대체해 새롭게 중요한 정치적 이념 자원이 된 민족주의도 역사담론과 결합하면서 역사적 기억의 정치는 오히려 치열해진다. 아울러 대분단의 기축과 소분단들 사이의 상호유지적 상호작용 패턴이 한반도의 핵문제, 그리고 동중국해에서의 지정학적 경쟁 등과 합류하면서, 대분단체제는 여기에 그대로 있다. 경제적 상호의존의 심화라는 외관에 종종 가려진 채로.
--- p.532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은 네 묶음의 논의다. 첫째는 개념 자체의 논리적 구성이다. ‘체제’란 두 가지의 설명을 요한다. 체제의 전체를 구성하는 인자들을 명확히 하고, 그 인자들 사이의 지속성 있는 상호작용 패턴을 설명해내야 한다. 둘째는 ‘동아시아 대분단선’에 놓여 있는 전략적 충돌 지점들과 이를 둘러싼 긴장의 양상에 대한 설명이다. 셋째는 대분단체제 안에서 한반도의 위치를 파악하고 이 체제와의 연관 속에서 한반도 문제를 해명하고 정책을 논하는 부분이다. 넷째는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상호작용에 대한 논의다.
--- p.533

한국 좌익은 민중적 기반을 가진 존재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긍정은 수정주의적 내전론의 본질적 요소였다. 냉전기에도 그랬고 탈냉전기라고 해서 큰 변화는 없다. 반면에 비수정주의적 내전론은 좌익의 민중적 기반을 기본적으로 부정하거나 혹은 일부 인정하는 데서 그친다. 그래서 이 질문은 수정주의적 내전론과 비수정주의적 내전론의 중요한 분수령이 된다.
--- p.562

그럼 타이완·오키나와·제주도가 어떻게 중국대륙과 미일동맹 사이의 대분단의 전초기지들이 아니라 평화의 벨트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인가. 그 가능성은 과연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명확한 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모든 문제가 수평적으로(지정학적·구조적으로) 그리고 수직적으로(역사적 차원에서) 헝클어진 채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헝클어지고 얽힌 문제들을 풀기 위해 타이완·오키나와·제주를 연결하는 지리적 형상화를 매개로 평화벨트를 상상하는 것은 여러 가지 가능한 실마리 찾기들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으리라고 희망해본다.
--- p.685

마치 탈냉전 후 역사의 종언을 선언한 프랜시스 후쿠야마처럼, 탈냉전과 함께 『이제 우리는 안다』라는 제목의 책을 들고 나타난 존 개디스는 역사해석의 종언을 선언하고자 했던 셈이다. 그러나 역사해석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역사해석의 긴장의 지속이 아닌 상실이 우리가 더 두려워해야 할 상황일 것이다.
--- p.799

한미동맹체제에서 한국의 군사정치적 역할의 상대적 증가는 한미동맹과 한국 국방력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대한 한국 자신의 전략적 역할과 정치외교적 책임의 강화일 뿐이다. 그 책임과 역할은 또한 미국 무기의 대량구매로 메꾸어질 수 있는 물리적 공백이 아니라, 한국의 정부와 정치권, 언론과 사회에 성년(成年)의 기풍이 자리 잡을 때만이 채워질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다. 한국이 가장 불행했던 때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이 강요한 한미관계의 비정상성을 넘어서 정상국가로, 보통국가로 나아가는 길에 다름 아니다. 그 책임과 역할에 대한 정치적 비전을 포기하고 단일 강대국의 군사력에 의존하는 태도를 버리지 못할 때, 한국은 언제까지나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수 없는 국제정치의 유아(幼兒)로 남을 수밖에 없다.
--- p.839
 

출판사 리뷰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은 저자 이삼성(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명예교수)이 전후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의 구조에 관한 우리 자신의 독자적인 아시아적 전망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이 질서에 대한 대안적 개념화를 추구해온 지난 20년간의 지성사적 오디세이다.

이삼성 교수는 동아시아에 대해 유럽과 마찬가지로 냉전-탈냉전의 이분법으로 논하거나 또는 북방삼각-남방삼각의 대립이라는 식의 다분히 평면적인 도식에 근거한 상투적인 논의들을 넘어선다. 그래서 동아시아 질서가 내포한 질곡의 구조에 대한 더 포괄적이고 더 깊은 개념화를 시도한다. 저자는 전후 세계와의 수평적 연관성과 함께 20세기 전체에 걸친 동아시아의 역사적 조건과의 수직적 연결을 또한 그 개념 속에 담아낸다.

대분단체제론은 먼저 중국대륙과 미일동맹의 대립을 가리키는 ‘대분단의 기축’과 복수의 ‘소분단체제’들로 이루어진 구조의 중층성을 주목한다. 이어 대분단의 기축을 구성하는 긴장의 다차원성―지정학적 긴장,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긴장, 그리고 역사심리적 긴장―을 정의한다. 또한 그렇게 중층적이고 다차원적인 구성단위들 사이의 상호의존과 상호작용성에 착목한다. 이로써 전후 동아시아 질서가 내포한 고유성과 그것이 냉전-탈냉전의 이분법을 넘어 21세기 오늘에까지 이어지는 연속성을 개념화한 것이다. 아울러 그 구조와 내용이 시대와 함께 진화하는 양상을 분석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닫힌 질곡의 구조를 극복할 출구는 어디에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는다.

우리 땅에서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한국 사회의 사유와 담론은 대개 한국과 미국의 동맹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미국의 어깨, 더 구체적으로는 미 국방부와 국무부의 어깨에 얹혀서 한반도 문제를 미국과 미국이 대표하는 ‘세계’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데 익숙해 있다. 정작 한반도의 가까운 환경인 동아시아와 그 사회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피상적 수준에 안주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우리의 한반도 담론이 동아시아를 건너뛰어 영미권 대표 지식인들이 설파하는 세계질서 차원의 논의로 직결하는 경향이 많은 것이다. 이 책에 담긴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은 우리의 전쟁과 평화의 동아시아적 맥락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과 사유의 틀에 대한 저자의 깊은 갈증을 반영한다.

전후 동아시아질서의 역사적 성격을 냉전-탈냉전의 문제와 전적으로 분리하지 않으면서도 보다 총체적이고 풍부한 방식으로 개념화할 방법은 없을까 하고 저자는 고민했다. 전후 동아시아질서의 전체상에 대한 개념화를 위한 저자의 시도는 다른 한편으로는 2009년에 출간한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2』에서 보이듯 전후뿐만 아니라 근대 동아시아, 그리고 더 나아가 전통시대 2천 년의 동아시아질서의 전체상에 대한 재개념화 작업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은 그런 의미에서 고대에서 현재에 이르는 동아시아질서의 전체상에 대한 이삼성 교수의 독자적인 개념화 작업의 대단원이라고 할 수 있다.

■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란 무엇인가

저자는 전후 세계의 처음부터 동아시아가 유럽에 대해서 가진 고유성을 주목했다. 전후 유럽과 동아시아 질서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유럽의 전후는 지역 내 열강들 사이 처절한 전쟁의 상처가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는 두 개의 대립적인 초국적 이념공동체들 속에서 치유되는 질서였다. 반면에 전후 동아시아는 과거 제국체제하의 침략전쟁과 식민주의의 상처가 응결되고 확대 및 재생산되는 질서였다. 동아시아 제국체제가 청일전쟁, 미국-필리핀전쟁, 그리고 러일전쟁이라는 세 전쟁의 결과로 성립했다면,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는 그 제국체제의 유산을 기반으로 하면서, 태평양전쟁, 중국 내전, 그리고 한국전쟁이라는 세 전쟁의 결과로 완성되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시점에 아시아의 신흥제국들로 동시에 등극한 미국과 일본 사이의 연합이 20세기 전반기 동아시아 제국체제의 근간을 이룬다. 두 제국은 러시아의 중국 진출을 견제하며 거대 중국의 혼란과 민족주의를 견제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한편 갈등하면서 다른 한편 권력정치적 흥정으로 협력하는 제국주의 카르텔을 구성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과 1945년 8월 미국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투하라는 두 개의 충격적인 사건은 근대 100년에 걸친 미일관계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지배하는 결정적인 이미지들로 작용해왔다. 미일관계는 결국 전쟁으로 가기 위한 갈등 심화의 과정이라는 굴절된 인식이었다. 그로써 일본과의 연합이 미국의 동아시아전략의 근저였다는 사실은 쉽게 가려진다.

태평양전쟁은 제국체제를 지탱하던 미일연합 붕괴의 결과였지만, 이 전쟁의 결과는 역설적으로 미일 제국주의 연합을 더 완벽한 동맹으로 재탄생시킨다. 전후 중국에서 전개된 내전과 그 결과는 제국체제에서 미일연합이 반식민지로 공동경영하는 대상이던 중국을 공동의 지정학적·가상적으로 전환시킨다. 미국은 중국 공산당이 건설한 신중국과 ‘적어도 전쟁은 하지 않는 공존의 관계’를 구성할 외교승인을 거부한다. 이로써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원형’이 구성되고, 그러한 역사적 기회의 폐쇄가 한국전쟁의 기본조건을 마련했다. 한국전쟁은 미일동맹과 중국 사이의 3차원적 긴장을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만들어내며, 동시에 한반도와 타이완해협, 그리고 인도차이나의 소분단체제들을 고착시킨다. 세 개의 전쟁의 조합이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를 완성시켰다고 말하는 이유다.

전후 동아시아 질서는 처음부터 유럽과 달리 미소관계가 결정적인 변수가 아니었고, 오히려 중미관계가 최종심급으로 작용했다. 중국의 지정학적 정체성을 결정한 것 역시 중소관계보다는 중국 사회 내면의 동학과 선택이었다. 저자가 대분단체제 기축관계로 정의하는 미일동맹과 중국대륙 사이 지정학적 긴장,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긴장, 그리고 역사심리적 긴장은 탈냉전의 동아시아에서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내용으로 치환되고 재충전된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소련과 달리 국력의 팽창을 가져온다. 지정학적 긴장은 이념의 함수가 아니라 국력의 함수다. 미일동맹과 중국 사이 지정학적 긴장은 재충전된다.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의 긴장도 재충전된다. 냉전기는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긴장이었지만, 중국 사회주의의 시장화가 진행되면서 그 긴장은 약화된다. 그러나 동아시아 주변사회들의 민주화가 중국 톈안먼사태와 동시에 진행되면서 민주주의 대 권위주의의 긴장이 부상한다. 역사심리적 긴장도 재충전된다. 냉전기 동아시아에서 역사문제는 이념 담론에 눌려 동결된 채 내연하는 상태에 있었지만, 탈냉전으로 이념 담론이 퇴장하며 생긴 공백을 민족주의와 결합한 역사 담론이 대신한다. 이로 인한 역사심리적 긴장의 재충전은 단순히 중일 간의 문제가 아니다. 전범국가 일본을 ‘자유세계’라는 전후의 초국적 이념공동체에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문명국으로 신분세탁을 시킴으로써 미국은 동아시아 역사문제를 ‘자기화’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더 나아가 2000년대 들어 동아시아 대분단체제가 진화하는 양상을 분석한다. 제1국면에 속하는 21세기 첫 10년은 미일동맹이 한편으로 중국을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통합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중국을 염두한 21세기형 군비경쟁을 주도하고 중국은 그에 대응하며 팽창하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력 강화에 박차를 가한다. 그 결과 2010년을 전후해 진입하는 제2국면에서 미일동맹의 동아태 지역 해상패권은 위기에 직면하고, ‘아시아 재균형’이라는 이름으로 미일동맹의 대중국 견제가 본격화한다. 중국에 대한 지정학적 봉쇄의 국면이다. 2010년대 후반에 시작되는 제3국면의 대분단체제에서는 미일동맹의 대중국 견제가 군사적인 지정학적 성격을 넘어 지경학적인 경제봉쇄 차원을 포괄하기에 이른다.

냉전기에 동아시아 대분단체제가 전 지구적 차원의 미소 냉전을 배경으로 전개되었다면, 2010년대 이후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 전개되고 있는 신냉전은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를 배경으로 하고 그것에 의존하여 전개되고 있다. 1990년 시점에서 중국의 경제력은 러시아연방에 미치지 못했지만, 2020년대에 들어 러시아의 경제력은 중국의 10분의 1에 불과하게 된 것과 관련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긴장이 심화되는 국면에서 발발하고 지속되는 이유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러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 개념을 기반으로 하여 동아시아와 한반도, 그리고 타이완해협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양상을 규명하고, 위기 극복의 지혜를 탐색한다. 또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정신적 폐쇄회로 역할을 하고 있는 일본의 역사문제의 구조적 성격을 해명하고, 그 궁극적인 해소의 방향을 제시한다. 아울러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지리적 형상인 대분단선(大分斷線)에 자리한 타이완, 오키나와, 그리고 제주도의 현재와 미래를 논한다.

■ 책의 구성

이 책은 『한국정치학회보』 『국제정치논총』 『국가전략』 『한국과 국제정치』 등, 한국 정치학계를 대표하는 주요 학술지들과 국내외에서 개최된 여러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된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지난 20년간 발표한 글들 가운데 2023년 올해 발표한 두 편의 글을 포함해 가장 최근의 글들을 맨 앞에 배치했으며, 가장 오래된 2003년의 글을 맨 뒤에 실어 시간상 역순으로 배치했다. 이로써 저자의 대분단체제론의 지성사적 역정을 짚어볼 수 있게 했다.

이 글들은 크게 네 가지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동아시아 대분단체제의 본질과 그 역사적 형성과정, 그리고 그 시간적 진화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글들이 있다. 실린 글들의 상당수가 이에 해당한다.

두 번째는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로 이해한 동아시아 질서의 틀을 바탕에 두고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에 깊이 관련되는 주제들을 다룬 글들이다. 미중 갈등과 동아시아의 현재, 그리고 그 맥락에서 한반도 평화에 관한 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의 역사인식에 관한 글, 일본 역사문제의 구조를 다룬 글, 그리고 오키나와, 타이완, 제주도의 현실을 직시하고 대안의 미래를 논하는 글 등이 이에 속한다.

세 번째 그룹은 저자가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를 개념화하는 과정에서 그 논리적 구성에 필수적인 주제들에 대해 저자가 자신의 학문적 관점을 정립해온 과정을 보여주는 글들이다. 한국전쟁과 내전에 관한 글, 동아시아 냉전의 기원에 관한 신냉전사 연구를 비판적으로 해부한 글, 동아시아 지정학에 관한 논의들을 정리한 글 등이 그러하다.

넷째 그룹은 2000년대 들어 풍미하는 제국과 천하의 담론을 비판적으로 다룬 글들이다. 과거 제국 건설의 경험을 가진 큰 사회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이들 담론은 크고 작은 정치적 공동체들이 저마다 민주적 변혁을 향해 노력하는 가운데 그들 사이에 힘의 강약을 떠나 평화롭게 공존하는 다원적 세계사회에 대한 민주적 비전을 억압하는 힘을 갖는다. 이들 담론에 대한 지적 긴장을 유지하는 것은 저자의 관점에서는 우리의 독자적인 동아시아 평화 담론에서 불가결한 요소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