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대한민국명소 (2006~) (여행)/1.서울시 관광

삼각산옥천암(보도각 백불) 홍제천홍지문. 세검정터. (2024-02-03)

동방박사님 2024. 2. 3.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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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천(弘濟川)은 북한산에서 발원하여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대문구 마포구의 일부 또는 전지역을 포함해 흐르다가 한강의 하류로 흘러드는 지방하천이다. 1974년 지방 2급 하천(현 지방하천)으로 지정되었고, 1983년과 1988년에 각각 하천 정비 기본계획을 수립해 1999년 2월 현재 18.94km에 달하는 유역의 하천 개수가 완료되었다. 평균 너비는 50m이다.

조선시대에 이 하천 연안에 중국의 사신이나 관리가 묵어 가던 홍제원(弘濟院)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으며, 같은 유래로 홍제원천(弘濟院川)이라고도 한다. 모래가 많이 쌓여 물이 모래 밑으로 흘렀다고 해서 모래내 또는 사천(沙川)으로도 불리며,세검정  인근의 상류 부근에서 세검천(洗劍川)이라고도 불린다. [출처: 위키백과]

옥천암 마애좌상 (백불)

이 불상은 옥천암 보도각 안 바위에 새겨진 마애좌상이다. 불암 또는'보도각 백불'로 일컫지만, 조선말기부터 통칭하여 '백의관음상'으로 부르고 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이 존상 앞에서 기원했으며 흥선대원군의 부인도 아들 고종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는 서울의 이름난 불교 존상이다.

독립된 거대한 불암바위 앞면에 5미터의 장대한 마애상을 새겼다. 그리고 이 위에 팔작지붕의 전실형 건물을 세워 마애상을 보호하고 있다. 존상은 머리에 고려 초기부터 유행하던 높은 보관을 쓰고 있는데, 뿔처럼 생긴 관대에는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는 화려한 꽃무늬 수술 장식이 표현되어 있다. 존상의 얼굴은 타원형인데 양감이 비교적 부드럽고 눈··입이 단아하다. 신체는 건장하면서도 유연한 편이며 얼굴은 단정하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이어서 고려 12~13세기 마애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보도각 마애좌상
보도각 백불
홍지문

홍지문 및 탕춘대성(弘智門 蕩春臺城)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1976623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었다.

홍지문과 오간대수문 (홍수로 허물어지기 전인 1904)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으로 조선 숙종 41(1715)에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을 보완하기 위해 세웠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21년 홍수로 오간대수문과 같이 허물어진 것을 1977년에 복원한 것이다. 한북문이라고도 부른다.

탕춘대성은 조선 숙종 44(1718)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성한 것으로, 명칭은 세검정 부근에 있던 탕춘대(蕩春臺)에서 따왔다고 한다.

홍지문

홍지문은 한성(漢城)의 북쪽에 있는 문이므로 한북문(漢北門)이라고도 하였으나, 숙종이 친필로 '홍지문(弘智門)'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여 달면서부터 이것이 공식적인 명칭이 되었다. 기능적으로도 1413년 폐쇄된 숙정문 대신 실질적인 북대문의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홍지문은 숙종 41(1715)에 건축되어 1921년까지 탕춘대성문으로 그 역할을 하였으나 1921년 홍수로 붕괴되어 50여년간 방치되어 왔다. 이에 서울특별시에서 1977년 탕춘대성과 함께 정면 3, 측면 2칸으로 복원하였다.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다. 화강암으로 중앙부에 월단(月團, 아치)이 꾸며지고, 그 위에 단층 문루가 세워져 있다. 석축 윗 부분 둘레는 여장(女牆)이 있고, 문루는 평면이 40m2로 우진각 지붕이다.

홍지문 북쪽으로 홍제천(모래내, 사천)을 가로질러 홍지문과 같이 설치하였던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1921년에 홍수로 유실되었으나 1977년 홍지문 복원 때 길이 26. 72m, 6.8m, 높이 5.23m, 수구 폭 3.76m, 수구 높이 2.78m5간의 홍예교(虹霓橋)로 복원하였다.

탕춘대성

탕춘대성의 암문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사천을 지나 북한산 서남쪽의 비봉 아래까지 연결하여 축성한 산성이다. 이 산성의 명칭을 탕춘대성이라고 한 것은 현재 세검정이 있는 동쪽 약 100m 되는 산봉우리에 탕춘대(蕩春臺)가 있었던 것에서 연유한 것이며, 한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성(西城)이라고 하였다.

왜란과 호란 속에서 서울이 함락되며 갖은 고초를 겪은 조선왕조는 전쟁이 끝난 후 국방은 물론 유사시에는 수도를 방위하기 위한 온갖 노력을 경주하였다. 효종(16491659 재위), 현종(16591674 재위)을 거쳐 숙종 때에 이르러서는 수도방위에 더욱 치중하였다. 숙종은 재위 30(1704) 3월부터 도성 수축공사를 시작하였고 이 공사는 6년 후인 숙종 36(1710)까지 계속되었다.

도성 수축공사를 끝낸 숙종은 왕 37(1711)에는 북한산성을 축성하였고 다시 탕춘대성을 축조하게 되었다. 이 탕춘대성을 축조하자는 논의는 이미 숙종 28(1702)에 신완(申琬)이 제의하였다. 그 후 탕춘대성은 숙종 44(1718) 826일부터 축성하기 시작하여 106일까지 40일간 성 전체의 약 반을 축성하고 일단 중지하였다가 다음해 2월부터 다시 축성하여 약 40일 후에 완성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탕춘대성 전체의 길이는 약 4km였음도 알 수 있다. 성내에 연무장(鍊武場)으로 탕춘대 터(오늘날 서울세검정초등학교)에 연융대(鍊戎臺)를 설치하는 한편, 비상시를 대비하여 선혜청(宣惠廳) 창고와 군량창고인 상·하 평창(平倉)을 설치하였다. 그 후 탕춘대성의 축성과 함께 그 성안을 총융청(摠戎廳) 기지로 삼고, 군영도 배치하였다.

탕춘대성은 축성을 담당했던 관아나 또는 축성역, 축성 방법, 축성 경비 등에 관해서는 일체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다른 성의 축조와 마찬가지로 군문(軍門)에서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현존하는 탕춘대성은 도성이나 북한산성과 같이 주 성벽과 여장(女墻)을 쌓았으며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성구(城口)를 뚫어 놓았다.

현재 홍지문이 복원되어 있고, 상명대학교 북쪽으로 성곽이 남아있다. [출처: 위키백과]

세검정 터(洗劍亭터)

세검정 터(洗劍亭 ) 서울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던 정자다. 조선 영조 24(1748)에 세웠다. 그 이름은 인조반정 때 이귀·김유 등 이곳에 모여 광해군 폐위를 결의하고 칼날을 세웠다는 데서 유래했다. 1976 11 11일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었다.

세검정은 조선 숙종(재위 16741720)때 북한산성을 축조하면서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다고도 하며, 연산군(재위 14941506)의 유흥을 위해 지은 정자라고도 전한다. 세검정이란 이름은 광해군 15(1623) 인조반정 때 이곳에서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칼을 갈아 날을 세웠다고 한데서 세검(洗劍)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정자는 평면상 T자형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영조 24(1748)에 고쳐 지었으나 1941년에 불타 없어져서 1977년 옛 모습대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세검정은 평화를 상징하는 정자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되었다는 점 등에서 한국적인 건축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 위키백과]

세검정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