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서양사 이해 (책소개)/6.동유럽역사문화

혁명의 넝마주이 (2022) -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와 소비에트 아방가르드

동방박사님 2024. 2. 6.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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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역사의 대기실” 풍경이 펼쳐져 있었던 혁명기 모스크바,
혁명의 넝마주이가 되어 그 흔적을 건져 올렸던 벤야민을 경유하여
소비에트 아방가르드의 유산을 재발굴해내다


발터 벤야민은 1926년 12월에서 1927년 2월까지 약 두 달간 모든 것이 변화의 와중에 있던 혁명 후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벤야민에게 이 모스크바 방문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가? 그는 이곳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이 책 『혁명의 넝마주이』는 벤야민의 모스크바 방문 기록인 『모스크바 일기』를 경유하여 벤야민의 사유에 드리운 소비에트의 흔적을 추적하고, 더 나아가 소비에트 아방가르드의 지적·예술적 유산을 새롭게 발굴해낸다. 모든 해방의 기획은 ‘비현실적’인 이상일 뿐이거나, 결국 스탈린식 ‘현실 사회주의’로 귀결되고 말 것이라는 공포를 야기하는 사고 회로만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오늘날, 소비에트 아방가르드의 유산을 되돌아본다는 것은 그다지 환영받는 주제는 아닐 것이다. 한동안 이 유산은 정치적 맥락을 탈각시킨 채, 미술관의 안온한 벽 안 ‘혁명 섹션’에 포함되어 있을 때만 상속받을 수 있었다.

이 책은 통속화된 서사에 갇힌 이 소비에트 혁명의 ‘과거’를 캐내 다시금 해석 투쟁의 무대에 올려놓는다. 모든 과거는 현재와 새롭게 만나 다시 쓰일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죽은 세대의 전통은 ‘살아 있는 세대의 머리를 짓누르는 망령’(마르크스)이 될 수도, ‘희망의 불꽃을 점화할 불씨’(벤야민)가 될 수도 있다. 이 책은, 기만적으로 현실을 변형시키는 ‘연속체로서의 역사’에 균열을 내기 위해 버려지고 망각된 역사 지식을 구제해내려 했던 벤야민의 텍스트에 의거해, 벤야민의 방식을 따라 혁명기 소비에트 사회 안에 존재했던 온갖 가능성들을 꼼꼼하게 되짚어본다. 이를 통해 역사의 잘려나간 페이지에 온당한 자리를 돌려주고, 우리가 붙들려 있는 ‘현재’라는 지평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도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책에 따라 살기』 『사유하는 구조』 등의 책을 발표하고, 유리 로트만, 보리스 그로이스, 미하일 얌폴스키, 알렉세이 유르착 등의 사상을 번역·소개해온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학과 김수환 교수의 세번째 단독 저서.

목차

서문

1부

들어가는 말. 『모스크바 일기』, 어떤 혁명의 기록
1장. 장난감 마니아 발터 벤야민: 혁명의 시간성에 관하여
2장. 혁명적 연극이란 무엇인가: 메이예르홀트와 브레히트 사이에서
3장. 혁명 이후의 문학: 생산자로서의 작가
4장. 영화(적인 것)의 기원으로서의 모스크바: 촉각성에서 신경감응까지

2부

5장.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사물론과 히토 슈타이얼의 이미지론: 트레티야코프와 아르바토프를 중심으로
6장. 러시아 우주론 재방문: 시간성의 윤리학 혹은 미래의 처방전.
[부록] 안톤 비도클·김수환 대담: 뮤지엄, 그 믿기지 않는 이상함에 관하여
7장. 아방가르드 뮤지올로지: 폐허에서 건져 올린 다섯 개의 장면들

원문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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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 : 김수환
 
김수환은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학술원) 문학 연구소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문예술잡지 F』 편집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사유하는 구조』(2011), 『속물과 잉여』(공저, 2013), 『책에 따라 살기』(2014), 『다시 돌아보는 러시아혁명 100 년 2 인문예술』(공저, 2017) 등이, 역서로 『기호계』(2008...

책 속으로

과거의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아방가르드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차이는 ‘단절’과 ‘반동’으로 단순 요약될 수 없다. 서구의 문화유산을 비롯해 전통적인 고급문화 형식 전반에 대한 식견을 갖추었던 급진적 아방가르드의 대표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시작을 위해 그 유산의 ‘폐기 처분’을 선택했다. 반면 스탈린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급진성은 바로 그 전통적인 문화 형식을 공리적으로 ‘이용’하고자 했던 데에 있다. 아방가르드가 과거를 단호하게 폐기하려 했다면, 스탈린주의는 ‘부정의 부정’이라는 기묘한 변증법적 아이러니를 통해 그에 대한 합법적 사용 권리를 주장했던 것이다.
--- p.48

여기서 또다시 곱씹을 수밖에 없는 것은 아감벤이 말한 장난감의 시간, 저 이중적 시간성이다. “한때 그러나 더 이상은 아닌”의 시간, 과거를 아예 없애버리거나 혹은 여전히 그에 붙들려 있는 대신에, 그것을 ‘다르게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디에 있을까?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여기에 걸려 있다. 만일 그것이 아감벤이 말하듯, ‘목적 없는 수단’의 잠재태적인 시간성이라면, 우리는 그와 같은 ‘아이들’의 시간을 여전히 ‘혁명’이라는 말로 지칭할 수 있을까? 신화의 무게와 권위로부터뿐만이 아니라 유토피아와 종말론의 핵심적 요체라 할 ‘목적’으로부터도 자유롭게 풀려나온 시간, 아이들의 저 ‘무위’의 시간성은 과연 혁명이라는 결정적 단절의 사건과 함께 갈 수 있는 것일까?
--- p.55

1920년대 모스크바의 극장은 단지 무대가 아니라 ‘새로운 세기와 새로운 인간’의 윤곽이 제시되는 장소였다. 소위 ‘혁명적 예술’이란 무엇이며, 또 어떠해야 하는지를 시험하기 위한 가장 생생하고 격렬한 현장이 바로 연극 무대였다. “극장의 10월”이라는 메이예르홀트의 슬로건이 잘 보여주는바, 1920년대 러시아에서 무대 위의 혁명과 거리의 혁명은 함께 가야만 하는 필연적인 과정으로 여겨졌다. […] 인류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국가에 방문한 벤야민은 혁명의 무대 위에서 무엇을 보았고, 또 어떤 생각을 했을까? 수세기에 걸친 연극의 관례들을 ‘혁명’하는 일과, 연극을 포함한 삶의 조건 자체를 총체적으로 변혁하는 일 사이에서 그가 고민했던 선택지는 무엇이었을까?
--- p.60

모스크바의 극장에서 벤야민의 시선이 끊임없이 무대가 아닌 관객석을 향하고 있음은 이제 더 이상 놀랍지 않다. 그가 보고 있고 애초부터 보고 싶어 했던 것은 혁명적 아방가르드의 놀라운 예술적 성취가 아니다. 그가 확인하고자 했던 것은 그것 너머, 그것 다음의 풍경이다. 그다음의 풍경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물음들을 둘러싸고 펼쳐진다. 과격하고 진보적인 ‘예술의 혁명,’ 그 실험적 시도 이후엔 무엇이 오는가? ‘예술 속의 혁명’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것’ 자체의 기능과 조건이 혁명적으로 달라져버린 세계에서, 예술가와 비평가, 저널리스트와 지식인은 어떻게 살아가게 될 것인가? 예술 ‘형식’의 혁명을 넘어선 예술 ‘생산’의 관계와 조건 자체의 변혁은 어떻게 발생하며, 또 그 결과는 무엇인가?
--- p.94

분명한 사실 하나는 벤야민의 행보가 일반적인 ‘소비에트 방문객’의 예를 따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신념에 찬 볼셰비키로서 러시아에 왔다가 왕당파가 되어 그곳을 떠나는” 행보. 아서 쾨슬러나 앙드레 지드가 거쳐 갔던 저 환멸의 행보를, 벤야민은 되밟지 않았다. 어떤 점에서 그는 반대 반향으로 움직여 갔던바, 모스크바에서 그토록 우유부단했던 벤야민은 이제 놀랄 만큼 단호하고 명료한 어조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우라에서 해방된 ‘대중’의 잠재력과 투쟁하고 개입하는 ‘생산자로서의 작가’에 관하여.
--- p.97

벤야민의 이 거꾸로 된 행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을 다시 꼼꼼하게 되짚어보아야만 한다. 당연히 귀국 후 급속도로 가까워진 브레히트와의 관계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과거를 재구(再構)하는 우리의 시선은 훨씬 더 포괄적이어야 한다. 두 사람 사이의 숨겨진 고리였던 세르게이 트레치야코프의 이야기, 무엇보다 “팍투라에서 팩토그래피로”라는 공식으로 흔히 지칭되는 소비에트 아방가르드 자체의 내적 변환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이 모스크바의 유산을 벤야민의 또 다른 중대한 기획과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 신경감응을 요체로 한 ‘집단적 신체’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공산주의 바깥의 공산주의적 시도, 초현실주의가 그것이다.
--- p.97~98

이 모든 사실들을 앞에 두고, 익숙한 환멸의 서사를 구축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식으로. 벤야민은 애초 공산당에 가입할 생각으로 러시아에 왔지만, 그가 목도한 현실은 온통 퇴행적 징후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결국 당대의 수많은 서구 지식인 예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환멸을 느끼며 소비에트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런 전형적인 서사에 동의하는 순간 우리는 곧바로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어떤 문제인가? 모스크바 이후 벤야민이 걸어간 길과, 그 과정에서 남긴 저술들이 이 서사를 통해 온전히 해명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그것이다.
--- p.108

‘사실의 문학’이나 ‘팩토그래피’라는 용어에서 받게 되는 일차적인 느낌은 ‘팩트,’ 즉 사실을 향한 강한 지향이다. 원어인 팍토그라피아 자체가 ‘사실(facto)’의 ‘기입(graphia)’이라는 의미를 떠올리게 하는바, 결국 이는 다큐멘터리즘의 다른 표현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외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팩토그래피와 전통적 의미의 다큐멘터리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최대한의 객관적인 현실 묘사라는 후자의 원칙은 팩토그래피의 지향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팩토그래피의 목표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 현실을 적극적으로 변형시키는 데 있었다. 훗날 트레티야코프가 ‘작동적’ 모델이라 부르게 될 이런 개입적 실천의 전략에는 다큐멘터리의 객관주의가 자리할 곳이 없다.
--- p.145~146

러시아 정교 철학자로서 도서관 사서로 근무했던 니콜라이 표도로프는 인류와 우주를 둘러싼 실로 평범하지 않은 생각들을 내놓았다. 표도로프의 독트린을 집약하는 ‘공통 과제의 철학’의 핵심은 ‘모두를 위한 불멸’이라는 개념에 놓여 있다. 간단히 말해 공통의 과제는 ‘기술적 수단을 통한 인간 불멸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이 프로젝트는 두 가지 과제를 포함하는데, 첫째는 모든 인류의 조상들을 물리적으로 부활시키는 일이다. […] 두번째 과제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항성과 행성을 정복하여 식민지로 만드는 일이다.
--- p.268

출판사 리뷰

소비에트 아방가르드의 맥락에서 새롭게 읽는 『모스크바 일기』
넝마주이가 건져 올린 파편적 이미지 속에 담긴 혁명의 기억들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는 다소 기이한 기록으로, 혁명기 모스크바를 방문했던 벤야민이 ‘혁명의 넝마주이’가 되어 ‘인상’이라는 집게로 걷어 올린 일종의 누더기 텍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 러시아어를 몰랐던 그는 보고 느끼는 것 이외의 수단을 갖고 있지 않았다. 벤야민의 마르크스주의적 전환의 배경에 이 모스크바 경험이 모종의 역할을 했을 거라는 느슨한 추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모스크바 일기』는 면밀한 연구의 대상이기보다는 사적인 벤야민의 모습을 보여주는 참조 자료, 특히 아샤 라치스라는 여성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읽혀왔다.

김수환은 『모스크바 일기』를 다른 각도에서 독해할 것을 제안한다. 그는 이 텍스트가 벤야민 사상의 성좌를 형성하게 될 온갖 파편들이 흩뿌려져 있는 사상의 보고이자 한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가 목전을 이룬 상황, 이른바 ‘역사의 대기실’ 풍경을 보여주는 빼어난 문헌 자료라고 이야기한다. 즉 사상가 벤야민을 보여주는 만큼이나 혁명기 소비에트 사회를 들여다보기 위한 탁월한 이중의 도큐먼트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의 실패한 가능성들과 현재와의 조우
“장난감이 가득 들어찬 커다란 가방만을 갖고 돌아온 벤야민,
그는 진정 그 밖에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던 것일까?


이 책은 모스크바에서 장난감들을 잔뜩 사들고 돌아왔던 벤야민의 독특한 행적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해, 『모스크바 일기』에 담겨 있는 혁명의 흔적들을 하나씩 끄집어내 그것을 둘러싼 온갖 기억과 이후의 궤적들을 이어 붙여나간다. 벤야민은 혁명기 모스크바에서 구시대의 유물을 상징하는 장난감, 바로 그 ‘사라져가는 과거’를 붙잡으려 그토록 동분서주했던 것일까? 장난감의 시간성을 바라보는 벤야민의 입장과 그의 역사철학 사이에 모종의 상동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벤야민의 장난감론을 경유해 ‘혁명은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취급하는가’라는 관점에서 소비에트 아방가르드의 입장을 되짚어볼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이런 식으로 지금껏 공백으로 남아 있던 부분에 대해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하거나 낯익은 장면을 새롭게 볼 것을 제안하면서 벤야민에 대한 그동안의 상투적이고 제한적인 이해와 대결한다. 그렇게 ‘소비에트 없이 이해하는 벤야민’과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이해하는 벤야민’은 엄청나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또한 『모스크바 일기』 속 소비에트의 흔적들을 벤야민 사상의 전체 지도를 완성해내기 위한 퍼즐 조각으로서만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에트 아방가르드 그 자체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해 탐색의 범위를 넓히고, 더 나아가 과거의 실패한 가능성들이 어떻게 현재와 조우할 수 있는지 모색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이 ‘미학의 혁명’과 ‘혁명의 미학’이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고 여겨지던 아방가르드의 전성기인 1910~20년대가 아니라 스탈린식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대변되는 1930년대로 이어지는 아방가르드의 쇠퇴기(1927~32년), 즉 그것이 무언가 다른 것으로 뒤바뀌기 직전의 ‘문턱의 시간’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인데, 저자는 다름 아닌 바로 이 시간을 직시하고 새롭게 해석하는 일이야말로 아방가르드에 대한 동어반복적 서사를 벗어나는 데 있어 결정적이라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의 자리는 샤갈이나, 칸딘스키, 로드첸코 같은 아방가르드의 잘 알려진 스타들이 아니라, 전환기의 풍경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메이예르홀트와 가스테프, 트레티야코프, 아르바토프 같은 미지의 이름에 할애되고, 과거(의 문화유산)를 바라보는 태도의 변화, 해방된 ‘대중’의 잠재력, 생산주의 미학, 팩토그래피 운동, ‘작동적 작가’ 모델 같은 주제가 본격 탐구의 대상이 된다.

이 책의 구성

1부에는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를 따라 1920~30년대 소비에트라는 과거의 시공간을 탐구해나가는 네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저자는 이 텍스트를 ‘넝마주이’가 수집한 조각들의 몽타주로 간주하고, 그 파편적 이미지들 속에 담긴 혁명의 문화적 기억들을 되살려보고자 했다. 벤야민이 모스크바에서 크게 관심을 기울였던 장난감, 연극, 문학, 영화를 징검다리 삼아 혁명의 빠른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본다.

벤야민의 인상기를 따라가다가 마주치게 된 발굴의 우연한 부산물들이 담겨 있는 2부에서는 소비에트 아방가르드의 감춰진 페이지를 보다 깊숙이 파고들어가 그 상실된 과거가 현재와 만나 어떻게 다시 쓰여질 수 있는지 고찰한다. 5장은 현대 영상 작가이자 저술가인 히토 슈타이얼의 ‘이미지론’과 소비에트 아방가르드의 ‘사물론’을 병치시켜 아방가르드의 실험적 기획이 오늘날의 예술 영역에서 흥미롭게 전유되는 양상을 살펴본다.

6~7장은 소비에트 혁명을 전후로 한 시기에 일군의 사상가 및 예술가들에 의해 전개되었던 ‘러시아 우주론’이라는 독특한 사상적 담론에 주목한다. 죽은 자들까지 되살리는 ‘모두를 위한 불멸’을 주장했던 러시아 우주론의 유산은 최근 뮤지올로지(박물관학)나 인류세, 포스트휴먼 담론 등과 연계되어 이를 이론적 돌파구나 예술적 영감의 단초로 삼아보려는 다양한 실험들이 시도되고 있다. 저자는 이 독특한 사상과 오늘날의 담론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식별해봄으로써 러사아 우주론을 유토피아적 상상력의 위기를 겪고 있는 우리 시대의 지표로서 전유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