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폭력연구 (독서)/6.홀로코스트

홀로코스트 '이후'를 살다 (2013) - 종교 간 대화와 정치적 분쟁의 틈에서

동방박사님 2024. 3. 23.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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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참신한 접근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세 종교 간 화합의 가능성은 있는가?


대자연과 우주, 인간의 선(善). 세상에는 그 존재만으로 보는 이들에게 경이감을 주는 것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유대인이다. 바빌론 유수와 로마 제국에 의한 예루살렘 파괴,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경들은, 그 하나하나가 한 민족의 정체성을 파괴하고 그 몰락과 해체를 재촉하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유대인은 그 모든 고난과 수천 년에 걸친 박해의 역사를 견뎌내고 ‘유대인으로서’ 살아남았다. 우리의 이웃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신화 속의 주인공. 이들의 존재에 경이를 품지 않을 수 있는 이가 있을까. 그렇다면 유대인을 유대인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은 무엇일까? 역사의 격류 속에서 그들이 보여준 지구력의 근원은 무엇일까? 저자는 말한다. 그들의 ‘신’이 있었기에 비로소 유대인은 존재할 수 있었다고.

목차

제1부 홀로코스트를 넘어서
제1장 홀로코스트 ‘이전’
제2장 홀로코스트의 한복판에서-순교와 저항 사이
제3장 홀로코스트 ‘이후’

제2부 성서 이야기 다시 읽기-영향사의 시점에서
제4장 새로운 여행-아브라함 이야기
제5장 희생-모리아 산에서 아우슈비츠까지
제6장 출애굽-‘선민의식’의 빛과 그림자

제3부 홀로코스트가 묻는 것
제7장 아우슈비츠의 원체험으로부터
제8장 에클레시아와 시나고그
제9장 예언자들의 예언의 빛 아래

저자 소개

저자 : 미야타 미쓰오(宮田光雄)
1928년 일본 고치 현에서 출생했다. 도쿄 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으며, 전공은 정치학과 유럽 정치사상사이다. 현재는 도호쿠 대학교 명예교수를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비무장 국민 저항의 사상』, 『나치 독일과 언어』, 『메르헨의 지혜』, 『宮田光雄 전집: 성서의 신앙』(전 7권), 『나치 독일의 정신 구조』(이상 岩波書店), 『본회퍼와 그의 시대』, 『십자가와 하켄크로이츠』, 『저항과 복종』(이상 新敎出版社...
 
역자 : 박은영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에서 근대일본사상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도시샤 대학교 대학원 신학연구과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현재는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야나이하라 타다오의 조선 인식 연구」,「근대 일본 기독교의 비전(非戰) 평화 사상에 관한 연구」 등 다수의 논문을 저술했다.
 
역자 : 양현혜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를 졸업하고 도쿄 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사학으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윤치호와 김교신: 근대 조선의 민족적 아이덴티티와 기독교』, 『빛과 소망의 숨결을 찾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교회 70년사』, 『근대 한일 관계사 속의 기독교』, 『김교신의 철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일본 사회의 인간관계』, 『기류민의 신학』, 『....

책 속으로

‘홀로코스트’라는 말은 원래 유대교에서 신에게 바치는 희생=번제를 의미하는 용어입니다.……‘홀로코스트’라는 용어는, 유대인과 나치 사이에 어떠한 형태로든 종교적인 대응과 연결이 있었다는 인상을 줍니다. 그것은 비록 사이비일지언정, 나치의 ‘사제적(祭司的)’인 역할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들어가며_홀로코스트란 무엇인가

반유대주의는 결코 근대에 생겨난 현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과 함께 오랫동안, 몇 천 년에 걸쳐서 그들의 존재를 따라다녔던 것입니다.……나치 독일의 반유대주의는 오랜 역사를 통해 집적된 이러한 편견을 거대한 국가권력을 이용해 한층 첨예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제1장 홀로코스트 ‘이전’

그것은 신에 대한 중대한 의문입니다. 철학자의 신이 아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신, 즉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고 “나의 규례와 법을 지켜라. 이를 행하는 사람은 그로 인해 목숨을 얻을 수 있다”(레위기 18:5)라고 약속한 신에 대한 중대한 의문이었습니다. 강제수용소에서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비인간화와 살육의 현실을 본다면 유대인 포로들이 그 종교적인 삶의 방식과 신에 대한 신앙심을 잃어버렸다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제2장 홀로코스트의 한복판에서

지상의 나라에서 신의 나라의 징표를 세우는 것은 가난한 자들, 차별받고 소외받고 있는 사람들의 편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문제는 기독교인에게 중대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제3장 홀로코스트 ‘이후’

그러나 지금 다시 한 번, 여행을 떠나는 순간의 아브라함으로 돌아가 보면, 그에게는 의지할 수 있다고 생각할 만한 그 어떠한 보증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다만 약속만을 받았을 뿐이며, 이 약속도 현실 상황에 비추어 보면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이었습니다.……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어떠한 반론도, 반문도 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그러나’도, ‘혹시나’도 입에 담지 않습니다.

아브람은 야훼께서 분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창세기 12:4)

창세기 텍스트는 아브라함이 며칠 밤을 못 자고 지새웠다고도, 또는 여행길에 오르면서 이별에 대한 감상적인 정경이 펼쳐졌다고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실제로 신의 부름을 ‘듣는 자’가 되었고, 그것에 대해 책임을 가지고 ‘응답하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제4장 새로운 여행

확실히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신의 권위를 증거로 내세워―‘왕권신수설’ 등―지배자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신에 대한 복종에 근거하여 인간에 대한 불복종, 즉 부정한 지배에 대한 저항이나 항거의 가능성도 생겨났던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의 이야기를 통해 신이 인간의 희생을 원하지 않는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면, 이제는 누구에게도 인간을 억압하고 희생하는 것은 허락될 수 없겠지요. 아브라함과 같이 신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신 이외의 어떠한 권위에도 따르지 않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제5장 희생

아모스에 의하면 그것은 이스라엘이 위선으로 가득 찬 예배를 행하고, 또한 일상생활에서도 신의 선택에 전적으로 위반되는 사회적 부정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이러한 기존의 질서를 정당화하기 위해 출애굽의 신으로서의 야훼를 이스라엘의 전유물이기라도 한 듯이 입에 발린 신앙고백을 남용하는 것은 허락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모스의 눈으로 보면 ‘출애굽에 대한 도착(倒錯)’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제6장 출애굽

신이 몸을 숨겨 침묵하고 있는 이상 우리는 인간=이웃에 눈을 향하는 수밖에 없게 됩니다. 우정과 사랑은 ??밤??의 어둠을 타파하고, 이웃 가운데서 신의 모습을, 어쩌면 신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설령 신이 어떠한 이유에 의해서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수동적으로 행동한다 해도, 인간은 이 지상 세계에 대해 새로운 인간적=신적인 얼굴을 부여해야 할 과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강조하며, 비젤은 그야말로 도발적인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의 불의를 인간의 정의로 전환한다’는 것입니다.---제7장 아우슈비츠의 원체험으로부터

이러한 전통적인 기독교적 구원론의 교의에 대해, 유대교는 몇 세기에 걸쳐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해왔습니다. 그중 가장 중대한 이의는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근본적으로 전혀 변화되지 않았고, 메시아적인 구원의 흔적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홀로코스트 이후 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물음이 제기되었습니다. 즉, ‘예수가 도래하지 않았던 편이 더 좋았던 것은 아닌가’(Fleischner, 1977).---제8장 에클레시아와 시나고그

실제로 엘리스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현재 서기 70년의 예루살렘 신전 붕괴 이래 가장 곤란한 상황에 서 있다고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예전과 같이 그들의 약함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강함으로 인해―그 권력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억압하기 위해 사용되고 남용되고 있는 것에 의해―평화적으로 살아남을 길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9장 예언자들의 예언의 빛 아래

출판사 리뷰

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한 참신한 접근
세계 평화의 가장 큰 걸림돌로 지적받고 있는 팔레스타인 분쟁은, 정치적·종교적·역사적 스펙트럼이 얽힌 인류의 난제이다. 이에 대해 『홀로코스트 ‘이후’를 살다』는, 종교적인 관점에서의 접근이라는 참신한 시도를 하고 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 공통으로 전해지는 아브라함과 모세의 이야기를 돌이켜보며 세 종교 간의 화합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작가는 특히 유대인과 유대교의 정신적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신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유대인들이 추구해야 하는 미덕이 무엇인지를 제시한다.

아직 한국인에게는 낯선 유대교, 그 정신적 근원을 파헤친다
어떤 이들에게 성경의 기사는 그저 흥미로운 이야기일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에는 유대교와 유대 민족, 더 나아가 전 세계인의 정신적 정수(精髓)가 담겨 있다. 아브라함의 여행에서 우리는 아버지와의, 조상들과의, 이웃들과의 연결점이었던 고향을 버리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신에게 맡겼던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신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과거를 버렸던 아브라함은, 그 뒤 아들 이삭을 바침으로써 자신의 미래까지도 신에게 바치고자 했고, 이를 통해 후세에 믿음의 아버지라 칭송받았다. 또한 출애굽기의 기사는, 이집트 파라오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를 통해 자유를 향한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를 보여주는 한편, 가나안 민족을 멸절시키는 이야기를 통해 ‘선민의식(選民意識)’이 갖는 어두운 면모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이것들은 하나같이 유대교의 근간을 이루고, 이후 기독교와 이슬람교에도 큰 영향을 준 이야기들이다. 『홀로코스트 ‘이후’를 살다』의 저자는 이 이야기들을 통해 홀로코스트에 임했던 유대인들의 정신적 기원을 탐색할 뿐 아니라, 오랜 역사 속에서 서로 대립했던 세 종교의 화합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기하지 말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단순한 종교 간의 갈등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역사적·정치적·민족적 갈등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을 벌이는 주체들의 종교가 하나의 뿌리, 하나의 정신적 근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야훼의 이름으로’ 혹은 ‘알라의 이름으로’ 서로를 죽이는 것이 자신의 신에 대한 참된 믿음과 괴리된 것이라는 것을 알 때,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은 상대방을 증오할 커다란 명분 한 가지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를 미워할 이유 한 가지를 없애는 것에서부터, 그들은 화합을 위한 여행을 떠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중동 지역의 화평을 바라는 수많은 세계인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그들의 신, 야훼
고대인들은 그들이 만든 우상 앞에서 풍요와 평안, 승리를 기원했다. 그리고 이렇게 신자들의 세속적인 욕망이 투영되었던 고대 신앙은, 그 신자들의 몰락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일반적인 운명이었다. 하지만 유대인의 신 야훼는 이러한 역사적 법칙과 무관했다. 나라를 잃고 바빌론 제국에 끌려간 유대인들이 그곳의 우상을 섬기려 했을 때, 야훼는 예언자를 보내 이렇게 경고한다.

너희들은 “우리도 다른 여러 민족들처럼, 세계 각지의 종족들처럼 나무와 돌을 섬기자”라고 하지만, 너희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일은 결코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에스겔서 20:32)

역사적인 흥망성쇠와 관계없이 항상 유대인들을 돌봐주는 신, 야훼. 그가 있었기에 유대인들은 수많은 역사적 역경 속에서도 ‘신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믿음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홀로코스트 속에서도 야훼에게 기도를 드릴 수 있었다.

아우슈비츠에서 기도는 드려졌는가
구약 성경에는 ‘이삭의 공희(供犧)’라는 사건이 나온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야훼의 요구에 따라 자신의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사건이다. 그런데 라틴어 성서는, 이때 아브라함이 바치려 했던 ‘번제물’을 굉장히 낯익은 말로 번역한다. 바로 ‘홀로코스트’이다. 이 단어에 담긴 종교적 함의(含意)는 유대인이 어떤 시선으로 나치 독일의 유대인 말살정책을 바라봤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야훼를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친다. 믿음이 있었기에 유대인은 가스실에서 죽어가면서도 신을 찬미할 수 있었고, 부모와 자식의 죽음을 보면서 신에게 감사를 드릴 수 있었다. 신을 믿지 않았던 세속적인 유대인조차도, 끝까지 신에 대한 경건함을 잃지 않았던 동족들을 보며 경이를 느꼈다고 증언한다. 신을 생각하며 고통을 감내하는 유대인의 모습은 수많은 유럽의 기독교인들을 감동시켰다. 유대인에 대한 죄책감과 경이감 속에서 그들은 시오니즘 운동, 즉 유대인의 건국 운동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세계인을 분노케 하는 유대인들
하지만 이스라엘의 건국부터 현재까지의 짧은 역사는, 기대감 속에서 유대인의 행보를 지켜봤던 세계인들을 실망시키고 분노하게 만들었다.
유대인은 신으로부터 약속 받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언하고 이에 반발하는 아랍 국가들을 상대로 중동전쟁을 일으켜 승리했다. 하지만 이후 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강제적으로 병합하고 점령지에 정착촌을 세우며 독립을 요구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유대인이 가자 지구에 세운 거대한 분리 벽은, 마치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나 게토 포위 정책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을 이끄는 유대교 원리주의자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다윗 시대 영토의 회복’을 이야기하며 지금도 이스라엘의 영토 확장을 주장하고 있다.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신의 이름을 찬미했던 유대인은, 이제 신의 이름 아래 다른 민족은 탄압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행보를 ‘잘못된 성서 해석에 기반을 둔 독선주의’라고 비판한다. 그는 이스라엘 안팎의 해방신학자들과 그들이 제시하는 중동 문제의 해결 방법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공존 가능성을 모색한 저자는, 신화시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유대 민족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이사야서의 마지막 예언을 들려준다.

보라 나는 예루살렘을 기뻐 춤추는 도성으로 만들고
그 주민을 기뻐 즐거워하는 백성으로 창조하겠다.
……
이리와 어린양은 함께 풀을 뜯고
사자는 소처럼 짚을 먹으며 뱀은 진흙을 양식으로 하고
나의 성스러운 산 어디에서도
해하는 것도 망하는 것도 없다, 라고 주는 말씀하신다.
(이사야서 65:1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