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대한민국사 이해 (독서)/2.한국현대사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2022) - 인권기행2

동방박사님 2024. 3. 2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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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땅 곳곳에서 아직도 아물지 못한 상처들이
용기 내 입을 열도록, 소리쳐 말을 하도록


수풀이 무성하지만 어쩐지 음험해 보이는 깊은 산골짜기. 무슨 일이 벌어졌을 것만 같은 분위기의 표지 사진은 거창 박산골 민간인 학살터다. 1950년, 517명의 남녀노소 주민들이 이곳에 모여 총살당했다.

이 책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는 역사적 상처가 된 장소들을 인권운동가 박래군이 직접 찾아가 인권의 시각으로 정리해낸 답사기이다. 2년 전 출간된 인권기행 1권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는 한 번쯤 가보았거나 알고 있는 장소들을 방문해 그곳의 의미를 뒤집어보거나 이면에 숨겨진 사연을 찾아내는 여행이었다면, 이 책에서는 주로 현지인들도 잘 모르는 곳, 아예 길이 없는 곳에 남겨진 인권의 현장들을 탐사했다.

이번 기행은 대한민국의 근대와 시민을 탄생시킨 민중의 항거 동학농민혁명의 호남과 충청 지역 현장부터 시작한다. 천주교 순교성지에서 죽음으로 지켜낸 종교와 신념의 자유를 짚어보고 나서, 백정 차별 철폐 운동에 앞장선 한국 최초의 인권운동단체인 진주 형평사의 잘 알려지지 않은 흔적을 따라간다. 이어서, 전국에 퍼져 있는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터 중 대표적인 몇 곳을 찾아 그 참혹한 실상을 파헤치고 ‘골로 간다’라는 말의 기원을 곱씹는다.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 터에서는 사회복지시설의 끔찍한 현실을 마주하고, 동두천 미군 기지촌에서는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삶을 조명한다. 그리고 현지 주민들을 내쫓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재개발 사업의 전형을 성남 광주대단지 사건과 용산참사 현장에서 발견한다. 마지막으로, 전태일 열사의 모친으로 유명하지만 스스로 노동 인권운동가이기도 했던 이소선이 청계천, 구로, 창신동을 배경으로 한평생 보여준 연대 정신을 되새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이 땅 곳곳의 상처들은 아무리 가려져 있어도 언젠가 입을 열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픔을 딛고 용기를 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변화시켜왔다. 아직 아물지 못한 상처들이 직접 말을 할 수 있도록 연대하고, 그 말에 귀를 기울이자는 것이 이 책 전반에 진하게 배어 있는 저자 박래군의 절실한 메시지다

목차

인권의 지평을 열어젖힌 갑오년: 동학농민혁명 현장

죽음에 맞선 믿음: 천주교 병인박해 순교성지

최초의 소수자 인권운동단체: 진주 형평사 현장

골로 간 사람들: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터

사회복지시설에서 일어난 일들: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 터

그 많던 ‘순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동두천 미군 기지촌

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자리: 광주대단지 사건과 용산참사 현장 그리고 백사마을

노동인권운동가 이소선의 연대: 서울 청계천, 구로, 창신동

저자 소개

저 : 박래군
 
인권운동가. 4 ·16재단 상임이사로 일하고 있다. 1988년 광주학살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분신하고 세상을 떠난 동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일을 하면서 인권운동을 하게 되었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인권을 옹호하는 다양한 활동을 경험했으며, 주요 현안들이 발생할 때 연대기구들을 구성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활동도 많이 했다.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사무국장, 인권운동사랑방 사무국장과 상임활동가, 재단법인...
 
사진 : 한승일
 
사진을 찍고 글을 쓴다. 출판사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어서 책에 들어가는 사진과 글 작업을 많이 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의 표지 사진 촬영을 인연으로 박래군의 인권기행에 몇 년째 동행하게 되어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와 이번 책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의 전체 사진을 맡았다. 최근작으로는 사진과 글을 함께 작업한 『신신예식장』이 있다. 사라지는 것들과 그것들을 지키고 기억하려는 사람들 이야기에...

책 속으로

“종일 통곡의 피눈물을 금치 못할” 처지의 “낮으며 가난하며 열등하며 약하며 천하며 굴종하는 자”였던 백정들이 더 이상은 차별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단결하여 “공동의 존립책”을 세우겠다는 해방선언을 했다. 공평, 즉 평등은 사회의 근본이라고 천명한 역사적인 문서를 우리는 읽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감추고 살아야만 했던 존재들이 그것의 부당함을 느끼고, 스스로 존재를 드러내고 동등한 대우를 요구할 때, 차별받던 존재들이 더 이상 차별에 순응하지 않고 “우리도 인간이다”라고 말할 때 인권의 역사는 한 발 더 나아간다. 백정들의 차별 철폐를 향한 위대한 걸음이 시작된 것이다.
---「진주 형평사 현장」중에서

화살표로 표시된 골짜기 안쪽 바위에는 당시의 학살 때 쏜 총탄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었다. 바짝바짝 붙어 서도 500명이 들어서기에는 너무 좁은 곳이다. 서로 몸을 붙인 채 혼돈에 빠진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것만 같다. 그 골짜기 위에서 총탄이 쏟아졌다. 해가 뜨고 있었다. 517명의 시체는 솔가지들로 덮이고 불이 놓이고 다시 흙으로 덮였다. “여기서 죽은 사람들 피가 도랑을 타고 박산교 아래 중유천으로 흘러들었는데 물고기들이 얼마나 살이 올랐는지 사람들이 몇 해 동안 중유천의 물고기를 잡아먹지 않았다고 해요.”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터」중에서

한종선 씨는 아홉 살이던 1984년에, 최승우 씨는 중1 때인 1982년에 그 지옥에 끌려갔다.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지옥이 있기 마련이다. 지금도 어딘가는 지옥일 것이다. 다만 세상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뿐, 아니 세상 사람들이 구태여 보지 않으려 해서 보이지 않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국가는 ‘사회복지’라는 이름을 단 시설들에서 고통을 당한 이들, 그리고 죽어간 이들에 대해서 어떤 책임을 질 수 있을까? 이제라도 그들의 무참히 짓밟힌 인권을 회복시켜줄 수는 있는 것일까? 지금도 장애인과 사회적 약자들이 격리되고 수용되어 고통당하는 시설들은 언제까지 ‘사회복지’라는 이름으로 유지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형제복지원과 선감학원 터」중에서

이 책을 통해 역사적인 상처들을 많이 만났다. 부패한 관리에 착취당하던 동학 농민들, 순교의 길을 간 천주교인들, 신분 차별에 울던 백정들, 한국전쟁 시기의 학살당한 사람들, 부랑인으로 낙인찍힌 채 사회복지시설에서 죽어간 이들, 미군 위안부로 내몰려 비참하게 살았던 여성들, 가난한 판자촌의 빈민들, 여전히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노동자들… 이들에게 인권은 무엇이었을까? 무엇보다 평등한 세상을 살고 싶었을 그들과 그들을 먼저 보내고 세상에 남게 된 이들은 가만히 침묵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언젠가는 반드시 입을 열고 말을 하면서 세상을 변화시켜왔다.
---「후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