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대한민국 현대사 (책소개)/3.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2017) - 전개와 의의

동방박사님 2024. 6. 10.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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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올해로 30주년을 맞은 6월 민주항쟁을 기념하는 연구서출간되었다.

지금까지 6월 항쟁에 관한 책이 많이 발간되었지만 본격적인 학술서는 많지 않았다. 미국 등지에서 다양한 관련 문건이 공개되고 있고, 그동안 관련 사건과 단체 등에 대한 연구도 진척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따라 민주화 관련 사건과 단체 등에 대한 새로운 평가도 진행되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주주의 연구소에서는 이러한 자료와 연구들을 종합하여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종합적으로 바라보는 연구서를 기획 출간했다.
지난해 광화문 광장을 메운 촛불 민주주의 물결은 한국에서 민주화가 비단 30년 전의 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중요한 과제임을 말해주었다.

6월 민주항쟁의 전개와 그 시행착오를 분석해 보는 것은 우리가 어렵게 되찾은 민주주의를 공고화하는 데 길잡이가 될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과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해진 이 순간 대한민국의 미래를 어떻게 형성해 나갈 것인지 고민하면서 6월 민주항쟁 30주년을 맞아 그날 그때의 함성을 되돌아보는 것은 촛불시위 이후 펼쳐갈 새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를 상상하는 데 더 없이 큰 격려와 힘, 교훈이 될 것이다.

목차

총론 6월항쟁의 전개와 의미 ┃ 서중석

제1부 6월항쟁의 배경과 민주화운동의 성장
1장 1980년대 재야세력의 성장과 역할: 민통련을 중심으로 ┃ 정해구
2장 민주화추진협의회의 구성과 ‘저항·선명 야당’의 성장 ┃ 조현연
3장 학생운동의 발전과 6월항쟁 ┃ 이기훈
4장 6월항쟁과 시민운동의 태동 ┃ 정상호

제2부 6월항쟁의 전개: 성과와 한계
5장 1987년 민주화투쟁과 6월항쟁 ┃ 허은
6장 5공화국 헌법과 6·29선언 ┃ 정일준

제3부 6월항쟁 이후 민주화운동의 발전과 변화
7장 제13대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 전재호
8장 87년 노동자대투쟁과 노동운동의 성장 ┃ 이원보
9장 6월항쟁 직후 통일운동의 분출 ┃ 홍석률
10장 민주연합운동과 시민운동: 재편과 분화 ┃ 이창언

제4부 6월항쟁의 역사적·세계사적 좌표와 제도화
11장 한국 근현대사 속의 6월항쟁: 3·1운동·4월혁명과 비교를 중심으로 ┃ 오제연
12장 6월항쟁 연구의 흐름과 재해석: 시각과 지평의 조정 ┃ 정근식

책 속으로

요컨대, 국내외적으로 민주화 요구가 고양되는 속에서 운동을 통일하고 이를 선도할 수 있는 조직을 결성하기 위해 민민협과 국민회의가 통합하여 민통련을 결성하게 되었다는 것이 선언문의 요지였다. 한편 선언문은 민중이 주체가 되는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이 병행되어야 함을 강조하며, 민주화와 통일을 민족의 지상 과제로 여기는 그 어떤 집단이나 개인과도 연대할 것임을 천명했다. - 1장|1980년대 재야세력의 성장과 역할71쪽

발족식에서 민추협은 ?민주화투쟁선언문?을 통해 “전두환 정권은 소수의 부패한 특권층만을 위해 절대다수 국민들을 핍박하고 수탈해오고 있다. 우리는 우리 국민의 긍지와 자존심을 회복시키고 국가의 존엄을 해치는 군부독재를 청산해서 국민이 자신의 정부를 선택할 수 있고 시민의 참여가 보장되는 민주 정부의 수립을 위하여 민주화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이를 위해 민주화추진위원회를 발족한다”고 밝혔다. - 2장|민주화추진협의회의 구성과 ‘저항·선명 야당’의 성장 110쪽

1986년 말 학생운동은 위기 상황에 처해 있었다. 정부의 탄압이 갈수록 거세지며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있는데, 야당이나 재야 등 반정부 세력과 연합전선은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고립된 노선 투쟁과 관념적인 과격성 때문에 학생 대중들의 관심도 멀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1980년 이후 학생운동이 대중적 운동으로 급성장하면서 나타난 일종의 필연적인 부작용이었다. 학생운동의 기반은 급격히 확대되고 있었고, 대중적 동원력 또한 1970년대나 1980년대 초반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어 있었다. 급격히 과격한 주장들이 여과 없이 그대로 노출되고, 이론 투쟁이 선명성 경쟁이 되어버렸던 것은 기반이 확대된 운동이 노선과 방향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 3장|학생운동의 발전과 6월항쟁 166쪽

우리나라 환경운동의 역사에서 온산병과 이주투쟁이 차지하는 의미는 적지 않다. 왜냐하면, 온산병 투쟁은 반공해운동단체들이 주민운동을 직접 지원한 첫 번째 사례이기 때문이다. 1983년부터 광주민주화운동의 여파로 한국공해문제연구소(공문연)를 필두로 공해반대청년운동협의회(공청협), 공해반대시민운동협의회(공민협) 등이 조직되었다. 1983년부터 공문연은 온산을 답사하면서 그동안 무시되었던 피해를 객관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우리나라는 중금속에 의한 공해병 문제는 정부에서 철저하게 통제하였고, 학계의 조사도 은밀하게 제제를 가했다. 현지조사단 파견과 건강조사를 위한 설문조사, 각 종교단체와 연합을 통해 온산의 공해피해가 사회문제화됨으로써 환경운동의 확실한 전환점이 되었다. - 4장|6월항쟁과 시민운동의 태동 195쪽

박종철의 고문사가 보도된 16일부터 학생, 재야 민주단체, 종교계 등에서 고문살인 정권을 규탄하는 성명이 이어졌다. 박종철의 고향인 부산에서는 16일 부산대 학생 300여 명이 고문살인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고, 부산민주화연합회 지도부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결의를 밝혔다. 다음날 신민당이 자체 진상조사단의 조사결과 박종철의 죽음은 고문치사사건임이 분명하다고 발표하며 국회 진상조사특위의 구성을 요구했다. 1월 20일에는 서울대 학생들이 추모제를 개최했고, 1000여 명의 학생들이 합류하여 ‘고문살인 자행하는 전두환 정권을 타도하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1월 23일에는 전국 17개 대학에서 언론 추산 1000여 명의 대학생들이 박종철 고문치사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 동부지구 9개 대학 학생 700여 명은 고려대에 모여 ‘고 박종철 학우 추모제’를 개최했고, 서울대, 중앙대, 단국대 등 서울시내 6개 대학 학생 200여 명도 서울 중구 신당동 중앙시장에서 박종철 고문치사에 항의하는 기습가두시위를 벌였다. 분향과 추모제 그리고 시위들이 전개되며 박종철 고문치사에 대한 분노와 항의는 각계로 확산되어 갔다. - 5장|1987년 민주화투쟁과 6월항쟁 209쪽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1987년 전국적인 6월항쟁의 복합국면에서 한미관계가 재구조화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결정적 국면으로서 이후의 역사에 경로의존성을 부과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전두환 정권에 대한 지지는 애초부터 조건부였다. 미국은 비록 상황변화에 떠밀려 전두환 정권을 승인하기는 했지만 통치스타일까지 무조건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신군부는 구정치질서와 여야 국회의원을 비롯한 구정치인, 그리고 학생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세력을 정치불안의 원천으로 지목하고 조치를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집권한 뒤에는 달랐다. 더 이상 남 탓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 6장|5공화국 헌법과 6·29선언 292쪽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민주화 조치를 담은 6·29선언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는 군부 권위주의 세력의 완전한 청산이 아닌 ‘타협에 의한 민주화’였기 때문에 많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특히 민주항쟁의 실질적 요구를 담아야 할 헌법 개정이 민주화운동의 실질적 주역이던 재야와 학생 세력을 배제하고, 보수 야당과 청산대상인 민정당에 의해 진행된 점은 민주화의 진전을 더디게 한 결정적 원인이었다. 물론 새로운 헌법은 그동안 억압되었던 국민 기본권을 신장시키는 등 상당히 개선되었지만 기성 정치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대통령 임기와 선출 방법이 왜곡되고, 노동자의 권익이 제대로 보장되지 못하는 등 많은 한계 역시 노정되었다. - 7장|제13대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338쪽

아울러 노동자대투쟁은 광범한 노동자를 단련시키고 의식과 조직을 발전시킨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노동자들은 스스로 투쟁의 전면에 나섬으로써 자신들을 억압하는 체제와 각종 제도의 구조를 인식하게 되었고 투쟁을 통해 노동자 자신들의 힘과 단결이 갖는 큰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또한 투쟁을 통해 사회적 무력감이나 패배주의를 상당 부분 극복할 수 있었고, 투쟁 과정에서 조직적 지도성의 중요성과 넓은 범위에 걸친 연대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 8장|87년 노동자대투쟁과 노동운동의 성장 366쪽

한편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학생운동 내에서도 통일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특히 1986년 무렵부터 NL(민족해방) 계열의 학생운동이 표면화되자 대학가에는 북한, 통일문제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한국 민주화운동의 과제로 민족해방을 강조했던 학생운동 집단은 자주화투쟁을 정점에 놓고, 민주화운동과 함께 ‘조국통일촉진투쟁’을 주요 투쟁목표로 설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과거 학생운동이 민주화운동에 집중한 나머지 통일운동을 방기해왔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 9장|6월항쟁 직후 통일운동의 분출 388쪽

1987년 6월항쟁 이후를 민주화의 이행기로 규정하고 민주화 과정을 긍정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제도정치와 국가의 개방적 재편, 시민사회의 자율성의 확대란 차원에서 설명될 수 있다. 군부 권위주의의 퇴조,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장, 지방자치제 확산, 계급적 대중운동의 조직적 발전, 민중운동과 구별되는 시민운동의 출현과 분화라는 국내적 상황의 변화와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 세계화 담론의 확산이라는 국제적 상황의 변화는 운동방식의 수정과 전환을 가속화하였다. 1987년 민주화는 ‘운동에 의한 민주화’와 ‘위로부터의 민주화’라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최장집, 2005; 조희연, 1990).이는 민주화운동을 이끌어왔던 한국의 사회운동세력이 ‘운동에 의한 민주화’를 이룰 정도로 강력한 사회운동 역량을 갖고 있었지만, ‘위로부터의 민주화’를 저지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 10장|민주연합운동과 시민운동 439쪽

6월항쟁의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는 경찰 병력을 분산시켰다. 분산된 경찰 병력으로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거센 시위의 물결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이에 전두환 정권은 5·18광주민중항쟁 때처럼 군을 동원해 6월항쟁을 진압하고자 했다. 하지만 광주와 그 부근 지역으로 한정되었던 5·18과 달리 전국적인 범위에서 동시다발로 전개되는 6월항쟁을 진압하는 것은 군을 동원하더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미 5·18 당시 엄청난 유혈 학살을 저지른 전두환 정권으로서는 그 보다 몇 배는 더 큰 규모로 전국 곳곳에서 전개되던 6월항쟁을 또다시 군을 동원해 진압하는 것에 커다란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경찰력으로 지탱하기 힘들고, 군 투입도 어렵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결국 6·29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는 길을 선택했다(박준성, 2016: 187~188). - 11장|한국 근현대사 속의 6월항쟁 467쪽

87년체제론은 정치적 차원뿐 아니라 사회경제적 차원을 포함하는 것으로, 1997년 말과 1998년 초에 걸쳐 발생한 금융위기와 이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적응 과정에서 ‘97년체제론’이 만들어지면서 사후적으로 정교화된 것이기도 하다. 금융자본주의와 노동시장에서의 비정규직의 확대, 계층의 양극화 등을 강조하는 97년체제론은 87년체제의 연장이자 대립물로 간주된다. 이런 점에서 87년체제론은 30년간 이상 유지되고 있는 민주주의의 구조사적 설명틀이지만, 동시에 사회운영의 원리가 신자유주의로 전환되기 직전의 10년간의 국면사로 해석되기도 한다.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다시 역사의 전환점에 선 오늘 우리는 어떤 길을 열어가야 하나

“6·10 민주항쟁 30주년 기념 연구서를 기획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역사 속에서나 존재했던 민주항쟁이, 원고를 집필하는 와중에 바로 우리들이 참여하고 있는 현재의 항쟁으로 발현되었다. 비민주적이고 부도덕한 정권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연일 광장을 가득 메웠고, 굳이 언론 보도가 아니더라도 국민들은 다시 1987년 6월항쟁을 떠올렸다. 6월항쟁은 30주년을 맞아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실천 속으로 생환’된 것이다.” - 책을 펴내면서

현행 헌법과 그에 기초한 민주주의 체제의 기틀이 마련된 것이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해서라는 것에는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그 후 민주화가 어떤 길을 걸어왔고 그 원인은 무엇인가에 관한 분석은 다양할 것이다. 민주화는 제도와 체화가 맞물려야 비로소 제대로 기능한다. 6월항쟁으로 그 이전의 시기와는 다르게 자유와 민주주의가 전진해가는 것 같았으나,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등장하면서 그 방향이 뒤집혔다. 지난 촛불이 다시 민주주의를 회복시켰다고는 하나 이것을 지키고 이 시대가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그 때문에 30년 전 6월항쟁의 의미와 과제를 다시금 고민하고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6월항쟁은 한국 근현대사의 분수령

3·1운동, 4월혁명, 6월항쟁 그리고 2016년의 촛불혁명까지 분명 한국 근현대사의 물길을 바꾼 중요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6월항쟁은 박정희 때부터 이어진 30년간의 독재시대를 끝내고 정치적 민주주의를 이끌어낸 한국 민주화운동사의 이정표적인 사건이었다. 1987년 6월 10일부터 역사적 6·29 선언이 발표될 때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위가 전개되었다. 독재에 맞서 30년간 줄기차게 전개해온 민주화운동이 6월 항쟁으로 결실을 맺었다. 6월 민주항쟁이 열어 놓은 자유와 민주주의는 그 폭과 깊이가 무엇보다 넓고 깊었으며 민주주의를 체화하고 실천하는 세대를 낳고 길렀다. 6월항쟁과 그 이후 민주화의 여정을 이정표 삼아 미래를 설계한다면 과거 민주화 역사의 굴곡을 미래 세대는 겪지 않도록 반석을 깔아 줄 수 있지 않을까.

6월항쟁과 그 이후 민주화의 경로를 냉철하게 분석하다

금년으로 6월항쟁이 30주년을 맞았다. 이번 30주년은 지난해 거리를 뜨겁게 달군 촛불시위가 성공적으로 평화적으로 반민주적인 정권을 탄핵하고 새 정부를 탄생시킨 후라서 더욱 뜻깊게 다가온다. 시민들이 만들어낸 촛불 민주주의 물결은 한국에서 민주화가 비단 30년 전의 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중요한 과제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 취지에서 한국민주주의연구소는 이 책을 6월항쟁에 대한 교육과 기념의 준거가 될 수 있는 연구서로 기획하였다. 지금까지 6월항쟁에 대한 책은 역사적으로 접근하거나 항쟁 이후 한구사회 이행을 다른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 책은 새로 입수된 자료와 관련자들의 구술 등을 바탕으로 관련 분야의 전문 학자들이 주제를 분담하여 6월 민주항쟁의 역동적 전개와 여러 쟁점을 짚어냈다.
이 책의 1부에서는 시대적 배경과 민주화 운동 주체였던 재야와 민추협, 학생운동의 전개와 시민운동의 출현을 분석했다. 2부는 6월 항쟁의 전개와 성과를 87년 민주화 투쟁과 6월항쟁, 그리고 5공화국 헌법과 6·29선언을 통해 살펴보았다. 3부에서는 현재 대한민국을 형성한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운동의 발전과 변화를 살펴보기 위해 1987년 대통령 선거와 1988년 총선을 분석하고 7·8·9 노동자대투쟁, 통일운동, 시민운동연합 등을 분석했다. 마지막 4부에서는 한국 근현대사 속 6월 항쟁과 동시기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한국의 6월항쟁의 의미를 밝힌 글을 담았다.
다시 역사의 전환점에 선 오늘 30년 전 1987년 6월 항쟁의 뜨거운 함성과 그 이후의 한계를 냉정하게 분석하고 아프게 성찰하여 그 결과를 13편의 글로 묶어냈다. 이 글이 민주주의의 미래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나침반이 되고 반면교사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