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남미여행 (2018) (여행)/4.남미 (칠레)

8-4 전망대에서본 칠례 발파아소

동방박사님 2018. 5. 4. 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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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례역사2 (독립)

1808년 나폴레옹이 스페인 국왕을 몰아내고 자신의 동생 조제프를 옹립하면서, 스폐인에서 독립하려는 시동 불이 붙었다. 1810년 9월18일 쫓겨난 왕의 후계자인 페르디난동의 이름을 딴 첫 의회가 열렸다. 이 의회는 칠례를 스폐인 왕국 내 자치 공화국으로 선언했다. 곧 완전 독립운동이 폭 넓은 지지를 얻게된다. 스폐이는 이 땅을 다시 찿고자 시도해, 지리한 투쟁이 이어졌다.

간헐적인 전쟁이 계속되다가, 1817년 칠례의 액애자 베르나르도 오이긴스와 아르헨티나 독립전쟁의 영웅 호세데산 마르틴이 안데스산맥을 넘어 칠례를 해방 시켯다. 1818년 2월12일 칠례는 오이긴스의 지도 아래 독립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 반란은 사회에 큰 변화를 주지 못했으며, 19세게 칠레사회는 여전히 식민지 시댕의 사회계층 구조가 지속됏고, 여기에는 가족 정치와 로마 가톨릭교회가 큰 영향을 주었다. 강력한 대통령이 등장 했으나, 부유층은 여전히 권력을 누렸다.

1924년 루이스 알타미라노 장군이 쿠테타를 일으켜 칠례는 1932년까지 정치적 불아정을 겪는다. 이 시기 10개 정부중 가장 오래된 정부는 1925년 잠시 권력을 잡았다가, 다시 1927년부터 1931년까지 사실상 독재정권을 수립한 카를로스 이바네스 델 캄포 장군의 정부였다. 그러나 이느 라틴아메리카 다른 국가에서 빈번했던 군사독재의 잔인함과 부패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고, 수십년뒤 아우구스트 피노체트의 군사독재 정권에 비할바도 못 되었다. 이바녜즈 델 캄포는 비록 이념 성향이 모호하고 변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권력을 포기하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에게 권력을 양도해 30년이 넘도록 대다수 국민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32년 헌정질서가 복원됐고 강력한 중산층 정당인 급진당이 부상했다. 이후 20년간 급진당은 연정의 주요세력 이었다. 1592년 유권자들은 이바녜스델 캄포를 다시 6년 임기의 대통령직에 선출 했다. 1958년 호흐혜 알렌산드리가 이바녜스 델 캄포를 승계해 칠례 보수정치를  다시 주도적으로  전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