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대한민국명소 (2006~) (여행지)/5.경기권 관광

고양 벽제관지

동방박사님 2018. 11. 13.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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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벽제관지 (高揚碧蹄館址)

고양벽제관지는 경기도 고양시덕양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물지이다. 1965년 2월2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44호로 지정되었다.

본래 고양시의 고읍치(古邑治)는 벽제관에서 서북방으로 5리 정도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위치로 읍치를 옮긴 인조 3년 (1625)에 이곳에 새로 세운 객관이 지금 벽제관이다. 당시 규모는 면적 1,265평, 건물 601평에 달하였다. 그러나 그후에 언제 다시 건물을 세웠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일제때 일부가 헐렸고 6.25 때 완전히 불타 버렸다. 그러나 1960년경 까지도 객관문(客館門) 은 남아 있었으나 퇴락해 무너져 버려 현재 객사의 윤곽터. 그리고 7척(尺) 긴격으로 원좌주초석의 장대석(長臺石) 이 남아 있을 뿐이다.


고양 벽제관지: 사적 제144호. 소재지 :고양시 덕양구 벽제관로 34-16

이곳은 조선시대 역관 터로서 중국을 오가던 고관들이 머물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중국을 오가던 고관들이 머물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중국을 통하는 의주로에 역관이 10여군데 있었는데 한양에 들어가기 하루전에 반드시 이곳 벽제관에서 숙박하고 다음날 에의를 갖추어 들어 가는것이 관례였다. 또한 중국으로 들어가는 것이 관레였다.또한 중국으로 가는 우리나라의 사신들도 이곳에서 머물렀다.

지금의 백제관터는 인조3년 (1625년) 고양군의 관아를 옮기면서 지은 객관자리로 일제강점기에 건물의 일부가 헐렸고 6.25 전쟁때 삼문을 제외한 모든건물이 불타 버렸다. 그후 객관의 삼문도 무너져서 현재의 터만

남아 있다. 건물의 중앙의 청사와 좌우의 익사로 구성되는데, 모두 정면3칸, 측면2칸이며 나란히 배치되어있다.






고양동 송덕비군 (頌德碑群)

고양동 송덕비군은 벽제관지 부근 도로 옆에 위치한다. 이 비들은 조선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역대 군수및 관찰사 면장의 선정(善政)과 치적을 기리기 위한 송덕비들이다.




느티나무

세그루의 노거수 군락이 공덕비와 함께 고양시의 오랜역사를 담보하고 있습니다. 은행나무, 팽나무와 함께 3대 정자나무라고 불릴정도로 우리에게 친근하여 많은 수의 보호수가 있고, 열매와 어린잎은 식용및 한약으로 사용하는 고마운 나무입니다. (보호수 : 수령 500년. 높이20m 둘레3.4m)

이 나무는 조선초 한양과 중궁을 연결하던 관서대로 (연행로)변의 사적 144호인 벽제관지 앞쪽에 위치해 있다. 이 느티나무들은 성종7년 (1476년)에 새로운 벽제관에 증축하면서 그 위용을 자랑키 위해 연못을 만들고 그 주위에 심은것 이라한다. 나무 앞쪽에 위치한 공덕비들과 함께 고양의 옛 역사를 보여주는 소중한 나무이다.



고양 벽제관 碧蹄館의 역사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읍내마을에 위치한 벽제관지는 고양향교 향교골 은행나무와 함께 이 지역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이곳 지명을 고양동이라 하는 것도 1625년부터 1914년까지 289년간 고양군청과 벽제관과 같은 중요한 공공기관에 있어 붙여진 것이다. 고양동은 파주, 양주, 고양지역이 만나는 곳으로 옛부터 교통의 중심지로 유명하였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과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연결 하는 곳이었고 중구의 사신과 우리나라 고위관리 등이 자주 지나가는 경의대로 (연행로, 의주로, 관서대로)의 중심건물이 벽제관이었다. 벽제관은 처음 이곳에서  서쪽으로3km 가량 떨어진  옷고골 (고읍)에 지어졌다. 이후 임진왜란등으로 훼손되고, 당시 고양군청이 1625년 현재의 고양동으로 옮기면서 벽제관도 고양향교와 함께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게 되었다. 고양의 벽제관은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기록을 보면 세종원년(1419년)에 중국사신을 효령대군,영의정 유정현등이 영접했다는 내용을 시작으로 이후 수십차례 기록에 보이는 중요한 장소였다.

그러나 벽제관은 사신영접의 기능 이외에도 고양군수가 전패와 궐매를 모시고 임금께 예를 올리는 장소 였으며 외부에서 온 관리나 손님이 머물렀던 공용의 숙박장소였다. 또한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지방 소송에대하여 재판하는 장소로 사용키도 했다. 특히 벽제관은 인근에 조선시대돵릉이 있어 이곳을 임시궁궐인 행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00년대 초반에 촬영한 사진에는 이곳 벽제관의 옛모습이 잘 남아있다. 우선 입구에는 삼문(三門)이 있는데 여기에 벽제관이란 현판이 쓰여있고 중문(中門) 에 삼태극 무늬가 그려져 있다. 삼문안쪽 정청 건물은 현재 터만 남아 있는데 전돌과 마루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정청 좌우에는방이 달린 우익현과 좌익현이 있었다. 엣 기록에는 행랑, 중대랑, 즉청방, 익랑, 하마대 등이 보여 지금보다 훨씬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곳 벽제관지는 1998년 경기도 박물과, 연세대학교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사진과 유사한 건축물 발굴결과가 나왔고 당시 명문기와, 도자기, 동전, 못 등 187점의 유물이 출토 되었다 특히 삼문 동쪽에 계단에서 벽제(碧蹄)라 스여진 석물이 발견되어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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