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대한민국명소 (2006~) (여행지)/5.경기권 관광

화석정

동방박사님 2018. 11. 16. 20:44
728x90

화석정 이야기

먼 곳 강릉에서 시집 온 신사임당을 비롯해 율곡 선생집안이 모두 모셔진 자운서원 근처에는 화석정 (化石亭)이라는 정자가 있습니다. 파주 화석정이 있는 율곡리는 원래 율곡이이 (栗谷 李珥 1536~1584) 선생의 고향 입니다. 과거를 아홉 번이나 연이어 장원한 천재적인 율곡선생은 외가인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6살 까지  그곳에 지내다가, 그후 아버지의 고향인 이 동네로 옯겨와 성장 하였으며, 파주 율곡리는  일산 밤가시 마을 처럼 원채 밤나무가 많은 동네 였던지라 그 동네 이름을 따서 이이(李珥) 는 율(栗, 밤나무) 곡 (谷, 골짜기)이라는 호를 붙였다고 합니다.

율곡 선생은 유명한 십만 양별설을 제기하고 관직을 떠난 뒤 후학을 양성하며 자운서원을 직접 세웠고, 5대조부가 세운 근처의 화석정에서 늘 묵상(默想) 하며 시를 썼다고 합니다. 정자 양쪽에는 500년 이상된 느티나무 두그루가 우둑 서있으니 그들은 율곡과도 만난 적도 있겠지요. 율곡은 일본의 침략을 미리 예견 했기 때문인지  묘한 행동을 일상으로 삼으셧습니다. 그는 화석정을 고친뒤, 임진강을 바라보며 묵상 할 때면 항상 하인들에게 관솔과 기름걸레에 잔뜩 기름을 먹여 기둥과 바닥을 반복해서 닦도록 시켰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자 정자 마루와 기둥 전체에는 기름이 잔뜩 베어갔습니다. 글고 임종 (1584) 휴 어려움이 다치면 열어 보라고 하며 봉투를 남기셨다지요.



화석정 花石亭

임진강가에 세워져 있는 정자로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 (栗谷 李珥 1536~1584) 가 제자들과 함께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던 곳이다. 세종25년 (1443) 율곡5대조인 이명신이 정자를 건립하였는데, 성종9년 91478년) 이이의 증조부 이의석이 중수하고 이숙함이 "화석정" 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80여 년 간 터만 남아 있다가 헌종 14년 (1673)에 후손들이 복원 하였으나 6.25전쟁때 다시 소실 되어버리고 말았다. 1966년 파주의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다시 복원한 것으로 건축양식은 팔작지붕 겹처마에 초익공 형태로 조선시대 양식을 따랐다.


선조의 피난길 이야기

율곡은 임진강 나루에 있는 화석정에 틈이 날 때마다 들기름에 젖은 걸레로 정자 마루의 기둥을 딱도록 하였으며 임종때 "어려움이 닥치면 열어보라"고 하며 봉투를 남겼다고 합니다.

후에 임진왜란 (1592년)이 일어나 4월 그믐밤 선조가 의주로 파천 라였는데 폭풍우가 너무 심해 한치 앞을 봀가 없었습니다. 이때 호종하던 이항복이 율곡이 남긴 봉서를 열어보니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고 쓰여 있었습

니다. 화석정에 불이 붙자 관솔이 타듯 불길이 올라 나루 근처가 대낮같이 밝아져서 선조 일행이 무사히 강을 건널수 있었습니다.

1593년 환도하면서 이강에 당도 하였고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순국한 병사들의 넋을 달래고자 나루터강변 모래사장에 제물을 차려 놓고 위령제를 지냈습니다. 의주파천 당시 달빛조차 희미한 4월 그믐밤 폭풍우 속에서 노심초사 고생끝에 이 나루를 건너게 된 스라린 아픔을 기억하고, 이 강을 지키고자 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용감한 충신들의 명복을 기원하는 가운데 선조가 통곡하며 '하늘의 도움을 받아 이 나무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구나"하였다 하여 신지강 (神智江) 을 임진강으로 개칭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율곡 이이 선생은 (1536년 : 중종 32~1584년: 선조 17) 조선 중기 대표적 성리학자로 성치. 경제.사회 국방, 교육등 전 분양 걸쳐 개혁정신을 실현한 경세가 였습니다. 화석성시는 율곡선생이 8세때 지은 시로 화석정의 가을 정취와 선생의 시상을 조화롭게 엮은 아름다운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