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역사문화기행 (2006~) (여행지)/5.서울역사박물관

일제에 의한 테일러부부의 강제추방

동방박사님 2019. 3. 5.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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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의한 강제추방 (1942~1948)

2차세계대전중 인도차이나 반도를 침략한 일제에 대해 미국이 경제제재 조치를 취하자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였습니다. 일제는 서울에 거주하는 서양인들을 수용소에 가두거나 가택연금을 시켰습니다. 이후 풀려난 테일러 부부는 1942년 조선에서 추방되어 미국 캘리포니아로 떠났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한국이 해방되자 앨버트W. 테일러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기위해 미군정 통역사에 지원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던 중 1948년 앨버트W. 테일러는 심장마비로 인해 갑작스럽게 숨을 거두었습니다. 매리L테일러는 평소 죽어서라도 한국에 가고 싶다는 남편의 유언에 따라 그해 다시 입국하였고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아버지 조지 알렌산더 테일러 옆에 앨버트W. 테일러를 안장 하였다.


앨버트가 수용된 곳이 서대문형무소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서대문형무소에는 외국인을 구금했다는 기록이 없다. "호박목걸이'에서 서술한 "형무소와 그 근처에 빨간 벽돌로 된 높은 건물이 보였다."

문장을 볼때 앨버트W. 테일러가 수용된 곳은 서대문형무소 옆에 위치한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사우하우스 (붉은색 벽돌집0라고 할 수 있다.



베티 린리의 사진앨범

테일러 부부는 일제에 의해 추방당한 후 베티 린리의 도움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이 사진앨범에서는 추방당한 직후 뉴욕에서 촬영된 앨버트 와 메리 테일러 부부의 모습이 담겨 있다.


선박 승선비 지불 이행 서약서

테일러 부부가 탓던 로렌스 마크호 승선비 지불을 위한 보증서류이다. 이 서류에는 앨버트가 미국 시민권자이고, 조선 경성에서 왔으며 승선비에 대한 지불을 약속한다는 내용이었다. (1942년)


선박 승선 쿠폰 (1942년)


베티의 서신

일제에 의해 추방당한 테일러 부부가 호텔에 머무를 수 있도록 요청하는 편지이다. (1942년)


테일러 부부의 수하물 목록

테일러 부부의 각 가방에 담겨진 물품에 대한 목록을 기록하였다. 가방 안에는 의류, 신발, 세면도구 품목이 적혀 있다 (1942년)


미국 특수부대 입사지원사 및 편지

9월28일자  발신인 : 앨버트 수신처 : 미특수부대

앨버트W.테일러는 미국에 돌아오자 마자 다시 한국에 가려고 하였다. 미군특수부대에서 근무하면 태평양 전쟁 이후 한국에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입사 지원원서와 한국에서 쌓은 경력을 소개하는 편지를 통해 자신이 한국전문가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1942)


국방부에 보내는 편지

1월7일자    발신인: 앨버트     수신처 : 국방부

앨버트W. 테일러는 한국에 파견할 통역사 모집을 보고 편지를 했다고 전하며, 꼭 한국에 보내달라는 의사를 밝힌 편지이다. (1946년)


에몬스에게 보내는 편지

12월 3일자 발신인: 앨버트 수신인:에몬스

앨버트W.테일러는 미군정 자문관 에몬스에게 한국어 능력과 경력을 강조하며 니 군정에서 자신을 채용해주기를  요청하는 편지이다 (1945년)



알프 베하벤의 편지

11월8일자 발신인 : 알프벤하벤   수신인 앨버트

수시인은 앨버트W. 테일러이다. 미군정에서 테일러빌딩에 대한 임차문제와 함께 현재 딜쿠샤는 테일러부부가 떠나온 이래로 가구나 집사가 없으며 집안은 텅 비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1945년)



메리L. 테일러 여권

메리L.테일러가 앨버트 W. 테일러의 유골을 들고 한국으로 입국할때 사용했던 여권이다.  (1948년)


메리L. 테일러의 일기

메리L. 테일러는 앨버트가 죽은후 그의 유해를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원에 안장하기 위해 한국에 입국하였다. 1948년 9월부터 1949년 7월까지 일정을 일기장에 적었다 (1948년)


92세의 메리L. 1981년


메리L.테일러 부고장  1982년




다시 조선에 돌아온 테일러부부

미 해군 소속 민간물자 검사관으로 근무하던 앨버트W. 테일러는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겉으로 한국에 돌아가지 않을 것처럼 말했지만 만주에서 머먼저 한국으로 돌아간 윌리엄W. 를 통해 한국소식을 듣고 있었고, 미국정부나 미군정에 편지를 보내 자신의 다양한 경력을 소개하며 한국파견을 요청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던 중 앨버트W. 테일러는 심장마비로 인해 갑자기 사망하였고. 메리엘 테일러는 신촌에 위치한 남편의 유해와 함께 1948년 9월 인천으로 입국하였습니다. 메리L.테일러는 신촌에 위치한 언더우드 가에 머므르면서 측근이었던 김 주사와 그의 아들 윌리암 김, 곤도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녀는 6년 만에

 다시 딜쿠샤를 찿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짧은 일정으로 한국에서의 생활을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채 다시 미국으로 건너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