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역사문화기행 (2006~) (여행)/7.국립고궁박물관

백년전 고종황제의 국장

동방박사님 2019. 3. 18.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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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고종황제의 국장> 

1919년 1월21일,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되어 덕수궁에서 지내던 고종황제가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종의 국장 國葬은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주도하여 진행 하였기에 전통적인 조선국왕의 국장 절차에 비하여 매우 축소되고 변형되었다. 고종의 관[제궁 帝弓]은 불과 40여 일만에 덕수궁에서 발인 하였고, 이를 서러워 하는 많은 사람들의 통곡 속에서 조선의 제26대 왕이며 대한 제국의 1대 황제 였던 고종은 명성황후 민씨와 함께 남양주 홍릉洪陵 에서 잠들었다.

고종의 죽음은 우리나라 항일 독립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항쟁이라고 할 수 있는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 李王家로 격하된 상황에서도 여전히 나라의 상징이었던 고종황제가 독살 되었다는 소문은 나라를 잃고 억눌려 왔던 사람들의 울분을 폭팔시킨 것이다.

국립고궁박물관의 <100년전, 고종황제의 국장> 전시에서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역사적인 민중 항쟁의 배경이 되었던 고종황제의 국장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



100년전 고종 황제의 죽음, 민족항쟁의 불씨가 되다.

고종은 500년 조선왕조의 마지막 국왕이자 대한제국의 첫 번째 황제였다. 비록 전근대적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격동기에 제국주의 열강들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통해 나라의 주권을 유지하고, 서구의 근대적 제도와 기술을 도입하여 근대적 국가로 나아가고자 노력한 군주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권을 박탈하고 권좌에서 강제로 물러나 덕수궁에서 쓸쓸하게 생활하고 있던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은 백성들이 나라가 몰락했음을 뼈져리게 느낄만한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3.1운동의 정신과 독립에 대한 열망은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의 한인사회에도 들불 처럼 번져나갔고, 나아가 1919년 4월11일 상하이에서 민주공화제를 표방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조선왕조오 대한제국은 먼 과거의 역사로만 느껴지기 쉽지만 고종의 죽음은 불과 백 년 전의 일이다. 이번 전시가 억압에 항거하는 우리민족의 기념비적인 항쟁 3.1운동의 의미를 되졸아 보면서 우리의 현재를 만들어 온 역사의 흐름을 상기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1919년1월21일,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되어 덕수궁에서 지내던 고종황제가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종 황제의 일생

고종 (1892~1919년, 재위 1863-1907년)은 조선 제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 李昰應 (1820~1898)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철종이 승하하자 익종[ 翼宗 효명세자, 후에 문조 文祖로추존]에게 입적하여 왕위에 올랐다. 12세에 즉위한 고종은 신정왕후의 수렴청정 垂簾聽政과 흥선대원군의 섭정 攝政으로 나라를 다스리다가 1873년(고종10)부터 친정 親政을 시작하였다.

고종은 즉위 초기부터 조선을 노리는 주변국에 대응해야 했으며, 바른 시대 변화에 적응하려 노력했다.그러나 갈수록 대내외적인 혼란은 가중 되었고 1895년(고종32)에는 왕비가 일본인에게 시해당하는 초유의사건[을미사변]이 발생하였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등[아관파천] 위기극복을 피한 고종은 독립적인 나

라를 만들기 위해  1897년 대한 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에 올랐다.

그러나 결국에는 이론에게 주권을 빼앗김으로써 독립국 건설의 의지는 좌절 되었다. 고종은 이런한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고자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구편화회의에 특사를 파견 하였으나 실패하고, 그결과로 1907년 퇴위당하였다. 이후 덕수궁에 거처하며 말년을 보냈으며 1919년 1월21일 함녕전에서 승하하였다.  


고종황제 갑자기 승하하다.

고종황제는 1919년 1월21일 새벽에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하였다. 사인死因은 뇌일혈로 알려졌으나 평소에 지병이 없고 건강했던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은 곧 일제에 의한 독살설로 이어졌다. 고종이 조선 독립에 대한 비판적인 성명을 발표하라는 일본정부의 강제적 요청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또는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을 호소하는 성명문을 보내려고 했기 때문에 일본인 혹은 친일파에게 도갈 당했다는 소문이 퍼져 나간 것이다.

당시에는 1919년 1월25일로 에정 되었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과 일본왕족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이방자여사)의 결혼을 보는 민중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황제의 독살설은 나라를 되찿고자 하는 민중의 뜨거운 열망과 함께 3.1운동의 기폭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고종황제의 독살설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쓴 독립운동가 박은식 朴殷植 (1859~1925년) 등 당시 많은 사람으로부터 강력하게 주장되었다. 이는 3.1운동의 전개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으며 당시 민중들에게 조선왕실과 이를 잇는 대한제국이 여전히 의미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종황제 홍릉에 잠들다

고종 황제가 영면한 곳은 남양주에 위치한 홍릉洪陵이다. 이곳은 고종이 청량리에 있던 명성황후의 능을 옮겨 훗날 자신과 합장하기 위해 마련한 장소였다. 1900년에 터를 정한후 1904년까지 일부 전각을 조성해 두었기에 석물 등을 보강한 후 단기간에 왕릉 조성을 위한 공사가 가능 하였다. 왕릉의 조성은 이왕직 李王職이 주도 하였다.

홍릉은 다른 조선왕릉에 비하여 능역이 상당히 축소되었지만 제도는 왕릉이 아닌 황제릉을 따랐다.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수립하려는 고종의 의지를 보여준다. 전각의 명칭이나 석물의 종류 배치에 적용된 황제릉의 형식은 순종 황제의 유릉 조겅 때에도 적용되었다.

그러나 홍릉의 석물은 쇠락한 나라의 현실을 반영하듯 매우 형식적이고 투박하게 조각되었다. 또한 국장 진행 중에 명성황후의 재궁을 청량리에 옮겨 오는 등 기존 에법과 어긋난 절차가 홍릉 조성 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발생 하였다.












고종 황제의 국장, 조선총독부가 주도하다

조선왕조에서 왕과 왕비의 장레 절차인 국장國葬은 민간의 장례의식에 비해 장중하고 복잡했다. 임시기구인 도감都監의 주도아래 승하昇遐한 후 발인發靷을  거쳐 왕의 관 [재궁 梓宮]을 왕릉에 안치하고, 신주神主를 종묘宗廟에 모심으로써 끝났는데, 약70단게에 달하는 정차를 대략3년에 걸쳐 진행하였다.

그러나 고종황제의 장레는 조선총독부가 임시로 설치한 장의괘 葬儀掛가 주도하였고, 대부분의 절차가 축소, 변형되었으며 장례기간도 대폭 단축되었다. 또한 조선국왕의 국장이 아닌 일본 친왕親王의 국장을 기본으로 하고 이에 조선의 옛 더한다는 원칙으로 진행되었기에 일본 신도神道식 의레가 적용되었다. 이러한 변형과 왜곡은 일본 식민통치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었기에 많은 사람을 분노하게 했다.

고종황제의 국장은 500년 조선왕조의 종말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었기에 국내외에 큰 관심사가 되었다. 발인을 보기위해 상경한 지방민이 40만 명에 달했으며, 국장 기간 내내 관련기사가 끊임없이 보도되었고 이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일본과 유럽 등지에서도 관련기사를 보도하는 등 관심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