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기억여행 (2010~) (여행)/3.삼일운동기억

평양만세운동

동방박사님 2019. 4. 9. 17:39
728x90

평양 시내에 울려퍼진 만세소리

평양에서는 기독교의 장로교와 감리교 천도교가 각각 별도로 준비하여 특별선언식을 했다. 2월26일 태극기와 전단을 미리 만들었으며 28일 에는 보성사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를 각각전달 받았다.3월1일 오후1시 장로교은 장대현교회 앞마당인숭덕학교 운동장에서 감리교는 광성학교 근처 남상현교회에서, 천도교는 설암리교구당에서 고종의 봉도식과 독립 선언식을 하고 행진을 시작하였으며 거리에서 만나 함께 연대하여 만세운동을 계속 하였다. 이들은 평양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어 독립가를 불렀고, 이후 두갈래로 나뉘어 서문과 평양역으로 이동 하기도 하였다. 저녁7시 일본군이 경찰서 옆의 군중을 해산시켰지만, 한 시간뒤 숭실대학 밴드부가 연합하여 연주하여 시내로 행진하기도 하는 등 시위는 게속되었다, 하지만 군대와 경찰들은 주요한 길목을 지키고 순찰을 강화하여 시위를 진압해갔다. 





천도교 평양부 종리원 교보 /1934 천도교 중앙도서관 자료

천도교 평양교구의 교인 이름과 가족관계, 생년월일, 입교일 등을 기록한 것으로 623가구 1,584명의 명단이 담겨있다.


천도교 평양 종리원[평양부]  1932 개인소장

천도교 평양종리원의 모습이다. 천도교는 1923년 기존의 대교구 체제를 종리원체제로 변경 하였다.


평양 남산현교회 /기독교 감리회 역사정보자료실


1893년 미국 북감리회 의료선교사 홀 W.J Hall과 조사 김창식이 설립한 교회이다. 1903년 벽돌로 다시 예배당을 지었다. 1919년 3월1일 민족대표 33인으로 서울의 독립선언식에 참석한 담임목사 신홍식을 대신해 부목사 박석훈이 교인들과 함께 이곳에서 독립선언식을 갖고 만세운동을 하였다. 박석훈은 체포되었으며 평양감옥에서 사망하였다. 2.8독립선언의 실행위원이었던 전영택의 소설에 그의 장례식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자유를 위한 한국인의 투쟁


언론인 프레더릭 멕켄지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전에 한국에 대해 쓴 [대한민국의 비극 The Tragedy Korea]을 보완하여 3.1운동을 중심으로 이책을 저술하였다. 그는 일제의 탄압을 받고 있는 한국의 실상을 기록하여 한국의 입장을 세계에 알리는데 기여 하였다.

평양에 있던 선교사들이 3.1운동 관련 자료를 전국에서 모아 출판을 위해 편집한 것으로 보이는 보고서이다. 3.1운동 당시 한국의 상황과 시위의 양상 피해 상황등을 자세하게 설명 하였다. 특히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번하이젤이 3월1일 평양 숭덕학교에서 진행된 고종의 봉도식과 독립선언식의 광경을 상세히 기록에 남겼다.






나인협 선생 유품과 수형기록 카드 / 천도교 중앙도서관자료실


나인협선생은 1890년 동학에 입교하여 1894년 동학혁명때 나용한 선생돠 함께 평안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에 참여하였으며, 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평양에 머물며 천도교 도사로 활동하다가 한국전쟁기 부산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1952년 4우러16일 부산 범일동에서 서거하였다. 이후 유품은 유족이 천도교 중앙총부에 기증하였다. 


계속되는 만세운동과 선교사 탄압


3월1일 이후 평양과 인근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은 게속 일어났다.3월2일 숭실학교 학생 이응칠이 태평리의 취명학교 학생들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어 만세운동을 하였고, 4일에는 신앙리의 미국인 선교사 집 근처에서 여학생 2백 명이 만세를 불렀다. 숭실대학의 이보식 등은 선교사 모펫 부인의 집 등에서 독립신문과 격문을 등사하여 시내에 배포하였다. 3월 7일경에는평양 강동면에서 100여 명이 만세운동을 하였는데, 그들은 조선

총독과 경무부장이 이미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전파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위는 3월 말 까지 평양 주변으로 퍼지며 계속되었는데 숭실학교 학생을 비롯하여 기독교계 학생들이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 하였다. 일제는 이과정에서 선교사들이 깊숙하게 개입되어 있다고 판단하여 4월4일에는 총 8명의 외국인 선교사 집을 수색하였다.이 과정에서 그들의 집에 숨어 있던 학생들이 체포되었고 선교사 모우리도 구금되었다. 모우리는 4월19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조선 소용의 진상/ 1920 가도 후사조

당시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의 사장인 가토후사조가 저술한 책이다. 3.1운동을 전후로 조선인의 사관과 정세에 대한 생각을 당시 조선에서 살고 있는 일본인의 생각과 면밀히 비교하여 원인을 분석하고, 식민정책에 대한 당위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3.1운동에 대한 외국인 선교사의 태도에 대해 유감을 표현하고 있다.



선교 관련 사진엽서 1910~1913



선교사 모우리 /1910

대동강변에서 촬영한 것으로 뒤로 평양의 전경이 보인다.



조선의 3대도시, 평양

평양은 조선시대 평안도 감영 소재지로 목성,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진 성곽도시였다. 내성에는 평안도 감영과 객사및 시가가 형성되어 있었고 청일전쟁 이후부터 다수의 일본인이 불법적으로 거주하기 시작하였다.1904년 2월 러일전쟁 이후 일본군의 철도 부설과 군용 이라는 명분으로 중성과 외성지역의 광대한 토지를 수용하였다.철도의 건설과 함께 중성과 외성의 성벽이 해체되었다. 평양역을 기주능로 중성 및 외성 일대에는 일본인 시가지가 들어섰고 평양역 너머로는 군대가 주둔하였는데, 1915년 일본인은  전체 평양인구의 약 20%를 차지하게 되었다. 한편 평양은"조선의 에루살렘'이라 불릴만큼 많은 기독교 신자가 있었고 이들을 위한 선교본부가 설치되었다. 장로교는 보통문 근처에 언덕에 감리교는 남산현에 거점을 마련하고 교회를 비롯한 다양한 학교와 병원, 선교사 주택을 지었다.


기성도

평양의 전경을 담은 작품으로 일종의 회화식 지도이다. 주요 산과 전각에 한글로 그명칭을 표기한 점과 화면 하단에 표기된 영무닝 눈에 띈다. 또한 액자 뒷면에붙어 있던 세 장의 메모지를 토대로 평양에서 활동했던 감리교 선교사이자의사부부인 윌리엄 홀이 사망하였지만 1897년 로제타 홀은 그를 기념하는 근대식 병원인 기홀병원을 평양에 건립하였다. 1919년 2월15일 이승훈은 이병원에 위장 입원하였으며, 16일 장대현교회 길선주와 남산현교회 목사 신홍식의 3.1운동 참여를 다짐 받았다.




평양의 주요명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