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역사문화기행 (2006~) (여행)/9.전통한옥고택생가

강서구 양천향교

동방박사님 2019. 9. 23.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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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향교 소개

양천행교는 태종11년(서기1411년)에 유학을 토대로한 교육기관이 건립되었다.

 

대성전에는 공자님을 비롯한 4성위와 송조4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음력2월과 8월 상정일에 석전을 봉행하며 문묘기능을 하며 유학을 연구 강론하는 지방교육기관으로서의 역활을 하였다. 년중 제일 큰행사인 석전 댖제를 지방수령이 석전제를 올리는 것을 전통으로 본 향교는 강서구청장이 초현관으로 석천제를 올린다.구한말 갑오개혁 (1894년)으로 과거제도가 페지됨으로 인해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상실되고 문묘기능만 남아 있다
- 1411년 (태종11년) 양촌향교 창건- 1945년 교궁 중수- 1963년 행정구역변경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 가양리에서 서울특별시로 편입- 1965년 대성전, 외삼문 보수- 1977년 양천향교 복원공사 수립- 1980년 복원공사착공- 1981년 복원공사 완료- 1988년 보수- 1990년 서울특별시 문화재 기념물 제8호 지정- 1994년 보수- 2007년 보수공사- 2009년 양천현 홀기 서울시 문화재 제44호 지정

 

 

향교의 소개

향교 (鄕校)는 고려시대를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계승된 지방 교육기관으로서 국립 교육기관이다. 고려시대에 처음생겼을때에는 향학이라 불렀다. 향교는 지방의 문묘와 그에 속한 학교로 구성된다,

조선시대에는 1392년(태조10)에 여러 도(道)의 안찰사(按察使)에 명하여 학교의 홍폐로써 지방관 고과(地方官 考課)의 법으로 삼고 크게 교학의 쇄신을 괘하였다. 여기에서 부,목. 군.현 (府牧郡縣)에 각각 1교씩 설립하고 점차 전국에 이르게 된다.

 

향교에 문묘,명륜당 및 중국, 한국의 선철, 선현을 제사하는 동서양무가 있다. 동서양재는 명륜당(강당)의 전면에 있으며 동재에는 양반, 서재에는 서류를 두고 보통 내외양사로 갈라진다. 내사에 있는 자는 내사생이라 하고 외사에는 내사생을 뽑기 위한 증광생을 두었다.
유생의 수는 부. 목에 90인, 도호부(都護府)에 70인, 군에 50인, 현에 30인으로 정하고, 직원으로는 교수(敎授), 훈도 (訓導)각1인, 소군(小郡)에는 훈도만을 두었으며, 또한 독서와 일과(日課)를 수령(守令)이 매월 관찰사에 보고하여 우수한 교관에게는 호역(戶役)을 양감(量感)하여 주었다. 수학한 경전은 시경, 서경, 주역, 예기, 춘추의 오경과 노어, 맹자, 중용, 대학의 사서이다.
이들 향교는 중앙의 사학(四學)과 같으며 여기에서 수학한 후 1차 과거에 합격한 생원(生員), 진사(進士)의 칭호를 받고 성균관에 가게되며, 다시 문과시에 응하여 고급관위(高級官位))에 오르는 자격을 얻었다. 그러므로 중기 이후의 향교는 과거의 준비장이 괴고 서원(書院)이 발흥하게 되자 점차 쇠미하게 되었다.
1894년(고종31)말에 과거제도의 페지와 함께 향교는 완전히 이름만이 남아 문묘를 향사(享祀) 할 따름이었다.

 

 

 

 

 

내삼문 (內三門)

문묘의례시 출입하는 문이다. 들어갈 때는 동쪽 문으로 나올때는 서쪽 문으로 나오며 중앙의 문은 신문(神門)이라 하여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사람의 출입을 금한다.

 

 

양천향교 터

지정번호 : 서울 특별시 기념물 8호

 

양천향교는 조선시대 양천현의 향교로 태종 11년(1411)에  건립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김포향교에 통합 하였다가 해방 후에 분리하였다. 1963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인해 경기도 양동면 가양리에서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다. 1980년에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향교는 제례 공간인 대성전 영역과 교육공간인 명륜당 영역으로 나눠 짓는다. 양천향교도 뒤편 언덕에 대성전을, 앞쪽으로 강당인 명륜당을 두엇다. 대성전 안에는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 그리고 송나라 4현, 우리나라 18현의 신위를 모셨다. 향교 입구에는 홍살문을 세워 경계를 표시했다. 외삼문으로 통하는 계단 좌측에는 양천현 관아 주변에 있던 역대현감들과현령들의 선정비를 옮겨 두었다.

 

 

 

 

명륜당(明倫堂)

교궁, 학당, 교실로서 학생 30~50명이 교육를 받았으며, 교수1인, 직원1인이 교육을 담당하고 과거시험은 성균관에서 직접관장하였다. 각 향교에서 1,2명씩 30여명을 모아 한곳에서 과거시험을 치르도록 하였으며 월급

없는 벼슬 진사, 생원의 직급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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