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역사문화기행 (2006~) (여행)/5.서울역사박물관

서울살이

동방박사님 2019. 12. 22.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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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살이

서울시민의성장. 서울가족 탄생하다 . 서울 내가 자고 자라다.

지난 1백 년 동안 서울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100여년전 20만 명 정도가 살았던 서울에는 현재 그 50배에 해당하는 1천만명의 사람들이 거주한다. 지방으로 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혅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 대부분은 한양 사람의 후손이 아닌 새로운 사람들이라고 할수 있다. 파리와 뉴욕에 사는"파리지앵'과 "뉴요커"는 그들만의 독특한 정체정을 가지고 있다. 서울 사람들도 '서울내기"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들 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오늘날 서울 주민 가운데 ;서울내기'란ㄴ 정체성 보다는 그들이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귀속감을 더 강하게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즉. '서울사람" 보다는 '서울에 사는사람"이 대다수 일 것이다. 해방이후, 서울에서 나고 자란 새로운 "서울내기'의 등장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울 토박이를 찿습니다.

1980년대에 등어 서울 토박이가 부각 되었다. 고도성장기 동안 지방에서의 유입인구가 크게 늘면서 상대적으로 서울토박이의 희소성이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서울시도 이러한 흐름에 보조를 맞추어 1994년 조선왕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지 60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여 서울 토박이들을 발굴하여 지정하는 사업을 벌였다. 서울시가 정한 토박이 선정 기준은 1910년 이전부터 한성부에서 살도 있었던 사람이었다. 즉 "하냥 사람"의 후손들만을 서울의 토박이로 인정한 것이다. 1994년 각 구청별로 서울 토박이에 대한 신청을 받은 결과 3,605가구 1만 3,753명이서울 토박이 (전체시민의 0.12%)로 확인 되었다. 같은해. "서울토박이회'라는 단체도 탄생하었다. 그러난 2005년 호적 조사에서는 서울 인구의 4.9%에 해당한다고 한다.



서울 토박이의 주택


토박이의 서울사랑

1994년, 서울 정도 600년을 맞아 탄생한 서울토박이회는 회원수가 1만 4,000여명에 이르는 단체로 옛한성부 행정구역인 4대문 안과 4대문 밖 10리이내인 신촌, 청량리, 정동, 이태원지역에서 1910년부터 3대이상 거주해온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서울토박이회는 고향의 의미를 되새기며 서울의 역사와  전통을 지키기 위해 회원이 소장하고 있는 조상대부터의 유물 1,100여 점을 서울 역사박물관에 기증하기도하였다. 그밖에 과거시함, 이성계 한양 입성, 수표교 다리 밟기 등의 전통행사 재현에도 앞장섰다.


서울 토박이회 활동사진


김길련 역과백패

1882년 (광서8년) 한성부에 사는 김길련 (1867~1939)이 역과시험에 합격하면서 받은 증서이다. 당시 그는 사역원(司譯院) 한학(漢學) 전함(前啣, 해당관청의 이전 관직자)의 신분으로써 응시하여 2등 (두번째 등급) 7번째로 합격하였다.                                                                                                    1882년 김용욱 기증


김길련 칙명

김용옥은 서울 토박이로 장교동에서 거주한 증조부와 입정동과 장사동에서 거주한 조부와 부친 관련 유물을 기증 하였다. 내각참서관 (內閣參書官) 김길련을 중추원삼등의관 (中樞院三等議官) 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이다                                                                                                                         1896년 김용욱기증



김길련 칙명

김길련을 正三品 通政大夫로 임명한다는 내용이다 

1901  김용욱기증




다례단자

이원임은 서울 토박이로 외조부인 한의사 길홍식의 유품과 궁중의 상궁관련 유물을 기증 하였다  1903년 이원임기증


금목수호토명 오행 윷

일제강점기 이원임기증


국화문 / 수자문 / 태극문떡살

일제강점기 이원임기증



서울특별시장 편지 - 600년 서울토박이 시민

이 유물은 서울 정도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서울 토박이 찿기를 통해 수신인 공재연을 포함하여 3,567세대가 선정되었음을 알리는 서신이다.                                                             1994년 공재연 기증


서울토박이

1994년 공재연 기증


제24회 서울토박이 회보

2007년 5월30일 공재연 기증


서울의 터줏대감 -토박이

서울 토박이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조선시대 한양의 거주민들은 북촌 (북악산 아래), 남촌 (남산아래) 동촌(낙산 부근)에서 양반은 붕당별로, 상민과 중인들은 신분별로 나뉘어 거주 하였다. 일제 강점기가 되자 양반관료들 일부는 실직자가 되어 연고지로 내려가기도 하였다. 그대신 자녀교육을 이유로 상경한 시골지주들이 계동이나 가회동 등 북촌에 신식을 절충한 새로운 양식의 한옥을 짓기 시작했다.식민지 경성에는 가난한 사람들도 많았는데 대부분 지방에서 맨손으로 올라온 사람들 이었다. 이들은 안암천 제방이나 신당동 같은 지역에 '토막'이라고 불리는 허술한 움막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서울토박이는 이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조상의 후손으로  3대이상 서울에 거주한 터줏 대감이다. 


"동서남북의 네 마을에는 양반이 살되 북촌에는 문반 (문신), 남촌에는 무반(무신)이 살았다.....9중략)... 서촌에는 소론이 많이 살았고 북촌에는 주로 노론들이 살았다. 남촌에는 주로 남인이 살았지만 소론들도 일부 섞여 살았으며 주로 무반이 살았다. 그리고 동촌에는 소복이 많이 살았다.

중촌에는 중인들이 모여 살았으며, 우대는 육조(六曹)이하의 여러관청에 소속된 서리나 고지기 무리들이 모여 살았다. 특히 다동이나 상사동 등지에는 상인들이 많이 살았고 아래대는 여러 군영의 장교와 집사들이 살았다. 궁궐을 중심으로 하여 셩복궁 서쪽의 누하동 근처에는 대전 별파라고 불리던 궁궐안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창덕궁 동쪽의 원남동과 연지동 근처에는 궁궐을 지키는 무예별감 족속이 모여 살았다.

동서문 안 성균관 근처는 성균관에 예속되어 일을 거들면서 쇠고기 장사를 하던 사람들이 살았으며 왕십리에는 하급 병졸들이 모여 살았다. 오강(五江)의 강변에는 뱃사람과 상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속칭"강대사람'이라고 부른 것은 이들 강변에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김기전< 서울중심세력 유동><<개벽>> 48호


한성부 한우일(韓佑一) 준호구

1696년 (숙종22)에 한성부에서 한우일에게 발급한 준 호구다.

한우일과 처의 4대 조상과, 아들들 그리고 노비현황이 기재되어 있다 1696년(강희35)


한성부 증표

한성부에서 서부 (西部) 양생방 (養生坊) 대수관계 (大手館契)36통에 거주하는 진사 이명저에게 발급한 일종의 주민 증표이다.


한성부 손억만 (孫億萬)호적표

1901년 (광무5)에 한성부에서 손억만(孫億萬) 에게 발급한 호적표이다  1898년 손홍택 호적표戶籍表 기증 이다.                                                                                                                      1898년 손홍택 기증


호패

호패는 조선시대 16세 이상 남성이 지니고 다니던 신분 증명패임


훈도방 주자동지

조선시대 동 단위의 인물지리서로 현재 서울시 중구 주자동 일대지역의 연혁과 인물, 풍속에 대해 기록 하였다


동래정시 대종계좌목

대한제국시기  정향숙기증


한양조씨 족보

한양조씨 족보로 시조 조지수를 시작하여 그내용을 상세히 기록 하였다


풍양조씨 세보

35권 16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826년 (순조25년)에 조인영 (趙寅永) 이 간행 하였다.


망우동지 (忘憂洞志)

1760년 정일섭 기증



서울특별시 구역 변천도

해방이전 /1949.8.13/ 1963을 단위로 서울시 영역의 확대를 3색으로 표시한 개념도 이다 1965년 허영환기증


서울 인구의 폭팔

조선시대의 말이자 일제강점기의 시작인 1910년 서울의 인구는 약 24만 명 정도로 집계되었다. 그런데 1988년 서울인구가 1천만명을 돌파 하였으니 약 80년만에 40배로 증가한 셈이다. 세계에서 유례없는 폭팔적인 증가라고 할 수 있다. 서울의 인구는 해방 이후 국외자 귀환과 월남 인구까지 늘어나 1949년에는 144만 명에  달할 정도 였다. 1950년 전쟁으로 일시 감소 하였으나 전쟁 직후인 1953년 인구가 다시 1백만 명을 희복하여싸. 이후 베이비 붐과 타 지역 유입으로 인구가 폭팔적으로 늘어 1968년에는 400만명을 넘어섰고, 이 무렵 4년 만에 100만명이 증가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1988년에는 1천만명을 돌파하고 1992년에는 1,097만 명으로 최고점을 찍었다.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1990녀네 이르러 24.5%가 되었다. 전체 인구의 1/4 가까이가 서울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1944년 서울 인구모형 - 7개구  인구 988,57명 



서울의 인구조사

해방 이후 연도별로 실시하는 현주호구조사와 5년마다 실시하는 국세조사가 이어졌다. 1947년에는 "국민등록법"에 따라 해마다 상주인구조사가 실시되기 시작하였다. 상주 인구조사는 지방행정기관의 주민등록 자료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1949년 1월부터는 '인구조사법"이 제정되면서 총 인구조사가 실시 되기 시작하였다.이는 일제 강점기에 실시된 '국세조사'의 이름을 바꾼 것이었다. 이후 인구 센서스라는 이름과 혼용되다가 1990년부터 총인구조사 명칭이 통일 되었다. 인구조사도 국세조사와 마찬가지로 5념마다 실시되었다. 총조사와 간이조사를 5년마다 번갈아 가면서 실시 하였다. 인구 이외에 농업에 대한 조사는 1960년부터 병행 하였다. 



제1회 총인구조사기념재떨이

1949년 제1회 인구조사 기념으로 제작된 재떨이이다.



인구조사

경제기획원에서 발행된 책자. "인구동태신고(출생,사망, 혼인,이혼신고)를 독려하는 내용이다



서울로 돌아 오는 사람들

1945년 8월15일 해방과 함께 서울의 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처났다. 애국지사들이 감옥에서 풀어나고 군중들은 거리를 가득 채웠다. 이들 가운데는 일제 강점기 외국으로 나갔다가 귀환한 사람들과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도 많았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까지 서울에 유입된 사람의 숫자는 모두 26만 7,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해방된 서울은 온통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거리에는 '럭키 서울'이라는 노래가 울려 퍼졌다.

그러난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다시 커다란 인적 손실이 발생하였다. 특히 젊은남성이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1952년 20~24세의 성비를 살펴보면, 남성 비율이 여성의 37%에 지나지 않았다.이러한 불균형은 전후 "베이비붐"으로   출산율이 높아지면서 비로서 해소되었다.그러나 남겨진 폐허속에서 서울 사람들은 생존을 위한 고투를 벌여야만 하였다.


6.25 전란사진첩 -2주년편 1950년대


TIME (1950~53)


피란민증

6.25전쟁 기간동안 정부가 피란민들에게 발급한 것이다. 이 피란민증은 단기 4283년 12월14일 발행된 것으로 교부번호와 사진, 성명, 성별, 직업, 생년월일, 본적, 주소등이 기입되어 있다.  1950년대


피란 생활일기

석종이라는 필자가 1962년에 피란생활을 회상하여 11장의 종이에 붓글씨로 작성한 것이다. 피란생활중에 겪은 무정하고 허망한 세월을 기탄없이 기술해 놓았다.     1962년


6.25전쟁 관련 서울 방문 허가증

이 유물은 1953년 8월8일 방송활동 (장비운송)을 위해 작성된 (LEE KIL SOUN)의 서울 방문 허가증이다. 



서울 각역 여객 열차 발착 시간표

1970년대 후반에 사용된 서울역 및 남부역 발착시간표로 경부선, 호남선 경춘선, 경원선, 중앙선, 경인선, 장항선, 경의선 등의 시간표를 포함하고  있다.  1961년 


피안민의 안식처, 해방촌

언제부턴가 남산 남쪽 기슭에 마을이 하나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이 마을이 해방 직후 만들어졌다고 해서 해방촌이라고 불렀다.일제강범기 이자리는 용산의 일본신사(神社) 가 세워져 있었다. 해방 후 신사가 페허가 되었고 그곳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살게되면서 이 마을이 만들어 졌다.

이곳에 흘러든 사람들은 대부분 평안도 지역민으로 선천 출신이 유독 많았다.해방촌 주민들은 남산을 넘어 남대문시장에 나가 노점상이나 날품팔이를 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 다음으로 집에서 담배를 만들어 팔거나 스웨터를 짜는 일에 종사하였다. 해방촌 주민은 고향을 버리고 내려온 월남민 들인 만큼 자기들 기리 돌똘 뭉쳐서 살아야만 하였다. 





음반 -단장의 미아리 고개 (1956)


서울로 서울로

1960년대 아후 서울은 공간적으로 확장되었지만 인구도 크게 늘었다."잘 살아보세,우리도 한번 잘살어보세"

를 외치며 시골사람들이 대거 서울로 몰려들었다. 지방의 여유있는 집안의 자녀들도 주로 교육을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이 무렵 신문에는 '무작정 상경"이란 말이 등장 했는데, 아무런 계획없이 상경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가족이 함께 이주한 경우, 가장은 행상이나 막노동과 같은 힘든 일자리를 전진해야만 하였다.

한편 1960년대부터 서울역 광장에는 무작정 상경한 시골 젊은이들이 많이 등장하였다.이후 경제개발로 생긴 제조업 일자리에 종사하면서 가족을 이루고 서울에 정착하여 이른바 "한강의 기적'에 밑거름이 되었다.




잡지-고향

이 유물은 월간고향 창간호이다.

월간 고향사에서 1988년 9월1일 발행하였다 1988년


영화대본-보리피리

1969년에 한국에술영화 주식회사에서 제작한 "보리피리'라는 제목의 영화대본이다. 서울에서 공부하는 주인집 딸 소라를 연모하는 바우가 그녀를 찿아 상경하게 된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다.   1969년


영화대본-욕망 慾望

"욕망"이라는 제목의 영화대본이다. 1975년에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시골에서 상경한 청년이 출세욕에 사로 잡혀 파국을 맞은다는 내용이다 1975년


배반의 여름

1978년에 발간된 박완서의 소설집 초판으로 소년이 서울로의 이주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주변 (마을, 아버지)이세계의 중심이 아닌 변두리임을 깨닫게된다. 1973년


알루미늄 옷함

운반하기 쉬운 의류보관용 알루미늄 옷함으로 지방에서 서울로 이사가 잦았던 기증자가 직접 사용했던 것이다.  1960년대 김명주기증


서울살이의 희로애락은 드라마와 영화, 그리고 가요 같은 대중문화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사람들은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동이 뒷골목을 전전하녀 내뱉는 신세한탄과 이주민 청년의 절절한 사연이 담긴 대중가요의 노랫가락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