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대한민국명소 (2006~) (여행지)/5.경기권 관광

양주 회암사

동방박사님 2020. 2. 22.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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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회암사지 揚州 檜巖寺地

 

사적 128호

양주 회암사지는 1997년 시굴조사를 시작으로 2015년까지 12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일반사찰과는 다른 궁궐건축의 구조나 방식이 발견되었다. 천보산 남쪽 계곡을 흙으로 메우고 석축을 쌓아 계단식으로 평지를 조성하고 총 8개의 단지에 건물을 배치하였는데, 이와 유사한 건축구조는 고려 궁궐인 개성의 만월대와 행궁 역할을 했던 파주의 해음 원지 등이 있다. 또한 궁궐에서 사용하던 용, 봉왕무늬 기와, 청기와, 용두, 톳, 잡상 등의 기와류, 왕실 전용 자기를 생산하던 관요 (官窯)에서 제작된 도자기류 등 다양한 왕실 관련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회암사의 창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 명종 4년(1174)에 금나라 사신의 방문 기록을 통해 12세기 무렵에는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우왕 2년 (1376)에 나옹(懶翁)이 인도의 고승 지공(指空)의 말에 따라 262칸의 규모로 중창하여 현재와 같이 거대한 사찰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태조의 스승이었던 무학(無學)이 머물렀고, 태조가 상왕으로 물러난 후 궁실을 짓고 머무르면서 왕실 사찰로 자리매김하였다. 이후 효령대군, 정희왕후, 문정왕후 등 왕실 인물들의 후원을 받아 최대의 왕실 사찰로 번성하였다. 그러나 문정왕후 사후 사세가 급격하게 기울어 명종 21년 (1566년) ~선조 28년(1595) 무렵 유생들의 방화에 의해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선조 38년 (1605년)에 선왕의 어실(御室)을 조성하고, 인조 4년 (1626년)에 종친이 불사를 크게 벌이는 등 재건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병자호란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적은 고려 말에서 조선 전기 최대의 왕실 사찰로서 종교적인 공간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왕의 별궁으로서의 위상과 면모를 동시에 살필 수 있는 가치를 인정받아 1964년에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