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한일관계사 연구 (책소개)/2.한일과거사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

동방박사님 2021. 5. 8.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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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강제징용의 현장 “군함도”

 

1. 군함도(하시마)의 역사

하시마에서 19세기에 석탄이 발견되었고, 1890년부터 미쓰비시의 소유가 되었다. 석탄 채굴을 위해 섬 주위를 매립하였고 1916년에 일본 최초로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집합주택 30 호동이 건설되었는데 해상에서 바라본 섬의 실루엣이 마치 일본 해군의 전함을 닮아 군함도(軍艦島)로 불리어왔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아직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고층아파트는 적었고, 대부분은 목조 단층집이나 2층 집이었다. 태평양전쟁 이후 일본에서 석탄을 생산할 노동력이 부족하자 일본 정부는 한국에서 실시된 "국가총동원법"을 통해 한국의 젊은이들을 강제 징용하여 탄광지역으로 보냈는데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약 800명의 조선인이 강제 동원되어 하루에 12시간씩 탄광에서 노역을 해야만 했다.

일본의 경제가 전성기를 맞이하던 1960년대에는 오천여명이 하시마섬에 거주하여 탄광시설, 주택 외에 초중학교, 점포, 공원, 영화관, 이발소. 미용실, 사교장 등이 있어 하시마는 완벽한 도시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주요 에너지가 석탄에서 석유로 바뀌어 감에 따라 석탄산업은 쇠퇴해 갔다. 1965년에 인근에 새로운 광산이 개발되어 잠시 회복되었지만 1970년대 이후의 에너지정책의 영향을 받아 1974년 1월 15일 폐광하였고, 그 해 4월 20일까지 주민들이 모두 섬을 떠나 하시마는 무인도가 되었다.

현재 하시마는 근대문화유산으로서, 그리고 다이쇼시대로부터 쇼와시대에 이르는 집합주택의 잔존물로써도 주목받고 있다. 오랜 시간 하시마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아 건물의 붕괴가 진행되고 있고 붕괴된 외벽에 대해서는 일부 콘크리트로 수복이 진행되고 있다. 하시마는 미쓰비시 사료관이 소유하고 있었지만 2001년에 나가사키시에 무상으로 양도되어 현재는 나가사키시의 소유지가 되어있다. 건물의 노후화, 폐허화에 따라 위험한 곳이 많아 섬 안으로 출입이 오랫동안 금지되었으나 2005년 8월 23일 보도관계자에 한해 특별히 상륙이 허가되어 황폐화가 진행되는 하시마의 모습이 각 매체에 소개되었다. 2008년 나가사키시에서 "나가사키시 하시마 견학시설 조례"와 "하시마 출입의 제한에 관한 조례"가 제정되어 섬의 남부에 정비된 견학통로에 한해서 2009년 4월 22일부터 관광객의 견학이 가능해졌다. 이후 연간 5만여 명이 군함도(하시마)를 방문하고 있다.

일본에서 세계유산 등록 운동이 진행되어 2006년 8월에는 일본 경제산업성이 하시마섬을 포함한 메이지시대 산업시설을 지역 관광자원으로 사용하기 위해 세계유산 등록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2008년 9월 "규슈의 근대화 산업유산군"의 일부로서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추가 기재가 확정되었고, 군함도는 2015년 6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 지옥섬 군함도는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군함도는 일본 나가사키 항구에서 약 18km 떨어진 작은 무인도로 초목이 없는 바위섬에 불과했지만 19세기에 석탄이 발견되어 탄광으로 개발되었다. 이후 1890년에 군함도에서 4.5km 떨어진 곳에서 탄광을 경영하고 있던 미쓰비시광업이 군함도의 탄광을 매수하여 확장하였다. 섬의 크기는 남북으로 약 489m, 동서로 약 160m, 둘레 1.2km 면적 6.3ha, 높이 10m의 방파제로 구성되어 있는데, 1916년 콘크리트 아파트를 처음 건립한 이후 고층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모습이 바다에 떠 있는 전함을 닮았다고 하여 “군함도(軍艦島)”로 불리게 되었다. 아파트의 위층에는 일본인 고위층이 거주하고 총을 든 무장 경비원이 총을 들고 출입문을 경계하고, 가장 높은 지대에 하시마 신사가 있고 학교 식당 등이 운영되었다.

바다 밑으로 개미집처럼 뻗은 갱도를 파서 해저탄광을 운영하여 1945년에는 5,3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이 섬에 거주하게 되었다.

 

3. 지옥섬 군함도로 건너간 조선인들

■ 강제동원 과정

일본은 1931년 만주침략에 이어 1937년 중국에 대한 전면적 침략전쟁을 일으키면서 식민지 조선을 물적・인적으로 총동원할 체제를 이미 정비한 상태였다. 1939년부터 부족한 노동력의 확보를 목적으로 일본 제국주의 정부와 기업에 의하여 조선, 일본, 중국, 사할린, 남양군도 등 광범위한 지역으로 노무동원 모집 공고를 내어 인력을 동원했다. 1942년 10월에는 재일 조선인에 대해 “국민 징용령” 적용하여 강제 동원했으며 1944년에는 영장에 의한 조선인 강제 징용을 실시하였다. 한 마을에서 발언권이 없는 조선의 하층민을 인질, 납치 등 폭력적 방법으로 강제 동원하고 남겨진 가족들은 수입이 끊겨 궁핍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강제 동원된 이들은 학대와 노예와 다름없는 노동, 민족차별, 저임금 등에 시달려야만 했다. 군함도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은 약 500명으로 추정되며, 다카시마를 포함해서 약 4,000명으로 추정된다. 이들의 이동경로는 고향을 떠나 부산까지 가고, 부산에서 뱃바닥에 화물과 같이 실려서 시모노세키까지, 시모노세키에서 열차로 나가사키까지, 나가사키에서 미쓰비시 배를 타고 군함도 도착하였다. 조선인들은 군함도에 도착할 때까지 해저탄광 일에 동원된다는 사실을 일체 알지 못했다. 또한 사할린에 강제 징용되었던 조선인 3,000여 명이 규슈・이바라키 현 등 일본 각지의 탄광으로 재배치되었는데 미쓰비시의 경우 사할린에 있던 약 1,000명의 조선인을 다카시마・하시마 등지에 있는 자사 탄광으로 이동시켰다. 이 가운데 지옥섬 군함도 전환 배치된 조선인은 약 200명이었다. 이들은 사할린에서도 열악한 노동 조건 속에 있었지만, 하시마로 배치된 후 더욱 끔찍한 상황에 놓였는데 가장 큰 고통은 가족과의 이산으로 이중 징용의 고통을 겪어야 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편 일본은 광부들의 가동률을 향상하고 도주를 방지하는 방편으로 산업 위안소를 설치하여 성노예 여성들을 치안유지 목적으로 운영하였다.

 

■ 지옥섬에서의 생활

숙소

골짜기 밑바닥의 최하층으로 악취가 심하고 습도가 높은 비위생적인 곳으로 좁은 방에 많은 인원이 함께 생활하여 밤에는 덥고 벼룩에게 뜯겨 잠을 못 이루었다. 밤 8시가 되면 복도에 두 줄로 서서 점호, 천황이 사는 곳인 동쪽을 향해 경례하고 전사자를 위해 1분간 묵도를 하는 등 명령에 의해 군대처럼 해야 했다.

식사

기본적으로 식당에서는 배식하는 대로 먹어야 했다. 감자에 약간의 베트남 쌀을 섞어 지은 밥 또는 콩깻묵에 약간의 현미 쌀을 섞어 지은 밥이었으며 정어리 조림의 부스러기나 된장국이 나올 때도 있었다. 가축 사료와 같은 밥이라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노무관리자가 식량을 빼앗아가서 가뜩이나 적은 양이 더 줄어들기도 했고 아침에 같이 주는 점심을 제시간까지 남겨두지 못할 때도 많았다. 늘 배고픔에 시달렸고, 빈약한 식사 탓에 심하게 설사하는 일도 많았다. 몸은 쇠약해지고 영양실조로 경련이 일어나 죽을 지경이었다.

갱내

평생 농사만 짓다가 탄광이란 곳에 처음 왔는데,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한 채 대개 며칠 안에 바로 채탄 작업에 투입되었다. 제대로 된 지식 없이 난생처음 들어가는 해저탄광은 공포 그 자체였다. 승강기를 타고 바닷속으로 수백 미터 내려가야 하는데 온몸이 움츠러질 정도로 하강 속도가 빨랐다. 일본인 갱부들은 천장이 높아 채탄하기 쉽고 안전한 곳에서 일했으며, 조선인은 주로 일본인 조장의 지시에 따라 가장 위험하고 고된 막장일을 해야 했다.

높이가 5~60cm 밖에 안 되는 비좁은 막장에서 계속 누운 채로 석탄을 캐야 했으며 머리가 천장에 닿았고 헬멧에 붙은 소형 전등의 코드가 목과 다리에 감겼다. 10분도 안 돼 하반신이 저려오고 등뼈가 점점 변형될 만큼 호된 중노동의 연속이었다. 굴을 파는 일을 할 때는 굴착기를 고정시켜 탄층에 설치한 다이너마이트를 폭발시키고 나무 막대기를 세웠는데 낙반사고와 가스폭발사고를 당할 위험이 높은 일이었다. 갱내는 가스 냄새가 심해서 숨쉬기 힘들었고 산소부족으로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하시마의 석탄은 손에 잘 잡히지도 않는 밀가루와 같은 것으로 갱내에는 그 석탄가루가 흩날리고 있어 온몸이 까매졌다. 눈을 뜨기도 어려웠고 온갖 질병에 노출되었다. 천장에서 집중호우처럼 지하수가 흘러내릴 때도 있었는데 염분이 많아 계속 맞다가 피부가 심하게 상하기도 하고, 워낙 차가와 감기에 걸리거나 폐렴을 앓기도 했다. 고열이 나고 의식이 몽롱해지고 다치거나 사고를 당할 위험이 높았다. 또한 갱내에서는 옷을 입고 있을 수가 없을 정도로 보통 더위가 아니어서 견디기 힘들었다. 항상 물통을 챙겨갔지만 목이 말라 금방 바닥이 났다. 일본인 갱부가 ‘조선인은 갱내에 흐르는 물이나 마셔라’라고 막말을 내뱉으면서 물통을 훔쳐가기도 했다. 화장실도 없어서 사방에서 떨어지고 흐르는 지하수는 항상 배설물로 오염되어 있었다.

침략전쟁이 장기화의 양상을 보이며 석탄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더욱 무모한 석탄증산정책이 강행되었다. 1943년경부터는 그전의 3교대 8시간이 2교대 12시간의 장시간 노동으로 바뀌었으며 하루의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더 긴 시간을 일해야 했다. 1~2주에 한 번씩 밤낮이 바뀌었는데 바뀌는 날은 다음날 아침까지 초과노동을 해야 했다. 극도로 피로가 쌓였고 저녁 6시부터 아침 6시까지 일할 때에는 낮에 일할 때보다 더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손가락을 다치는 일이 일상이었고 천장에서 돌이 떨어져 다리나 허리를 다치는 사고도 빈번히 있었다. 끔찍한 바닷속에서 피폐해진 몸을 이끌고 간신히 기어 나와도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 한참 동안 콘크리트 벽에 기대고 주저앉아 있어야 했다. 죽을 것만 같았고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들여왔다.

고문

‘쉬고 싶다’라고 말 한마디 잘못하면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다. 관리사무소로 끌려가 일하러 나가겠다고 할 때까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지나가는 광부들이 보는 앞에서 그러기도 했고 또 그들이 한 대씩 때리도록 전봇대에 묶긴 이도 있었다. 그리운 가족들에게 편지를 부치고 싶어도 많이 이들이 글을 쓸 줄을 몰랐다. 끌려온 지 2년이나 되었는데 편지 한 통 보내지 못한 이들도 많았다.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다는 것,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 하시마의 실상을 편지에 담고 싶었지만 그러한 편지는 절대 전달되지 않았을뿐더러 자칫하면 검열에 걸려 경찰에게 끌려갔다. 3~4일 동안 못 돌아온 이도 있었다.

임금

월급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일본인과의 임금차별도 심했지만 애초에 월급이 얼마인지 설명을 듣지도 못했고 아예 월급을 받지 못한 이들도 많았다. 회사 측은 용돈도 안 되는 월급을 주고 나머지는 고향에 송금한다고 했지만 고향의 가족들 대부분은 받지 못했다. 강제저축도 있었는데 통장을 보여주지도 않았고 나중에 돌려주지도 않았다.

의료

노무관리자는 감기를 병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파서 병원을 찾아가도 진단서조차 작성해주지 않아 쉬지도 못한 경우가 많았다. 겨우 진단을 받아도 별다른 치료 없이 방치되었다. 병원과 진료소가 있었지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다행히 목숨을 건졌는데도 결국 사망에 이르거나 평생 불편한 몸을 이끌고 살아야 했던 이들이 적지 않았다. 부상자나 환자에게까지 자행된 민족차별로 주사를 놓아주고 약을 처방해주는 일이 한 번 있을까 말까 했고 대체로 참으라는 말밖에 듣지 못했다.

도망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도 그만두고 싶어도, 최소한 하시마에서 나가고 싶어도 그러한 자유는 전혀 없었다. 일본인 광부들은 장 보러 나가사키 시내까지 나갈 수 있었고 행동이 자유로운 편이었다. 조선인 중에서 회사 측이 도주방지를 목적으로 불러들인 가족들이 같이 사는 이들의 경우는 하시마 밖으로의 외출 허가가 날 때도 있었지만, 회사 측은 기본적으로 조선인을 하시마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다. 24시간 감시의 눈이 번뜩였지만 살기 위해서 도주한 이들이 있었다. 배설물을 운반하는 배나 물자를 들이는 배에 몰래 타올라 숨거나 뗏목을 만들거나 헤엄을 쳐서 도망가다 성공한 이들이 드물게 하나 있었다. 그런데 약 5킬로의 장거리를 견뎌야 했고 더군다나 조류가 살인적으로 빨랐다. 익사한 이들도 적지 않았고 헤엄을 잘 치는 이들도 도중에 힘이 빠져 잡히기 마련이었다. 겨우 육지에 도착해도 거기서도 감시망이 철저했다. 도주를 시도하다 발각되면서 다시 하시마로 끌려와 고무 튜브로 피부가 벗겨지도록 맞고 반죽음을 당했다. 숙소도 작업장도 달라 일본인 갱부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거의 없었지만 간혹 조선인과 같이 도망친 이들이 있었다. 어떤 일본인 갱부는 일본이 빨리 패망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여기서 나갈 수 있을 텐데’라고 말했다.

사망자

1925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인 123명(남성 110명, 여성 13명)이 사망하였는데 병사가 60명, 사고사(질식사・압사・외상・변사・추락사 등)가 63명이었다.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낙반사고, 가스폭발사고가 빈번히 발생, 매몰되어 질식사 또는 압사를 당한 조선이 많았다. 열악한 주거 환경에 빈약한 식사, 안전장치도 지극히 부실하고 위험한 막장에서 장시간에 걸친 강제노동에 시달리다 억울한 죽음으로 몰렸다. 사망자 기록에 의하면 초기 치료로 충분히 회복할 수 있었을 거라고 추정되는 이들이 일본인보다 많았다. 고문으로 인한 죽음으로 추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인 사망자 중에는 자살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조선인보다 안전하고 자유도 있던 그들에게 조차 하시마는 견디기 힘든 곳이었다. 하시마에서 북동 방향으로 400m 떨어진 나카노시마에 빨간 벽돌로 만든 굴뚝이 우뚝 서있는데 화장하는 곳이다. 조선인 유골은 하시마로 다시 옮겨져 절에 안치되었다고 하고 나카노시마의 폐갱에 버려졌다고도 한다. 주검이 바다에 버려지는 경우도 있었다.

 

■ 강제노동에 시달린 중국인들

1942년 일본 내각의 결정으로 중국인 약 39,000명이 일본에 끌려와 135개의 작업장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렸으며 약 6,800명이 사망했다. 1944년 6월 지옥섬 하시마에 끌려온 중국인은 240명으로 그들은 농민, 상인, 포로들이었다. 미쓰비시는 중국인을 철조망으로 둘러싼 목조 2층 건물에 가둬놓고 총을 들고 감시했으며 먹을 것도 제대로 공급하지 않아 일본인 광부들이 먹다 남은 정어리 머리와 뼈를 버린 곳에 피골상접한 중국인이 모여들어 주워 먹었다. 가장 가혹한 작업장에 중국인을 투입했고 일상적으로 학대했다. 중국인의 저항은 거셌다. 채탄 중에 일본인 지도원에게서 폭행을 당한 중국인 두 명이 삽으로 반격을 했는데 회사 측은 그 책임을 중국인에게 물어 사무실에 연행을 해 고문을 가했다. 또 중국인이 파업을 일으키자 회사 측은 군대를 끌어들여 무력으로 탄압했다. 1945년 7월 31일에는 전기 공급을 받았던 다카시마의 발전소가 미국에 폭격을 받아 하시마에 정전이 일어났는데 그때 회사 측은 전기를 끊은 혐의를 걸어 중국인 전원을 대상으로 취조를 자행했다. 미쓰비시는 조선인과 중국인의 연대를 두려워했다. 조선인이 하시마에서 쟁의를 일으켰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다카시마에서는 ‘공복’을 견디다 못한 조선인 13명이 쟁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노무관리자들은 조선인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았고 수시로 폭행과 모진 고문을 가했기 때문에 미쓰비시는 조선인의 반격, 저항, 특히 중국인과 힘을 합치는 일을 늘 두려워했다. 미쓰비시는 조선인과 중국인의 접촉을 철저히 금지, 채탄 현장도 나눴고 수용소도 남과 북으로 갈라놓았고 서로 마주치지 못하도록 했다. 다만 갱내에서 중국인이 파는 굴과 조선인이 파는 굴이 연결될 때가 있었다. 갱 밖에서도 들키면 바로 총을 든 사람들이 달려와 모두 다 두들겨 맞았기 때문에 쉽게 말을 걸 수는 없었지만, 사고의 위험이 있는 곳에는 일본인이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경우가 있어서 그럴 때면 필담을 나누기도 했다.

1944년 하시마의 인구비율을 보면, 일본인 69%, 조선인 22%, 중국인 9%이었으나 사망률은 중국인과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높다.

 

4. 원자폭탄 투하, 그리고 귀국

규슈에서 가장 이국적인 면모를 지닌 나가사키는 오랜 옛날부터 한반도와 중국문화를 받아들이던 항구도시이다. 쇄국 당시에도 우리나라와 조선통신사를 통해 학술, 문화를 교류했기 때문에 불교를 비롯한 한반도의 다양한 문화가 나가사키를 거처 일본에 전래되었다. 16세기에는 서양문물을 급속히 받아들이며 일본 속의 유럽 문화를 꽃피우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일본 조선업의 중심지로 육성된 까닭에 히로시마에 이어 두 번째 원 폭투하지로 결정되는 비극을 낳았다.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한 줌 재로 사라져 간 사람은 무려 7만 3,800여 명을 헤아리며 도시의 절반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파괴되었다.

1945년 8월 9일 중공업 지대의 중심인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되어 조선인 피해자는 약 20,000명, 사망자는 약 10,000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군함도에 머무르던 조선인들은 폐허가 된 나가사키 청소에 동원되었다. 군함도에 징용된 조선인들은 2년이면 만기가 된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던 이들도 많았지만 알고 있었어도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원자폭탄 투하 후 해방의 소식을 들었지만 정부와 미쓰비시의 무책임한 태도로 8월 말 이후에나 귀국하였으며, 사할린에서 ‘이중징용’된 조선인들은 가족들과 생이별을 당한 채 수 십 년 후에야 겨우 가족과 재회할 수 있거나 평생 만나지 못했다.

 

5. 하시마(군함도) 연표

1810년 : 하시마에서 석탄 발견

1870년 : 아마쿠사의 고아마히데가 하시마광 뚫기에 착수, 그 후 사가 번 영주인 나베시마 마고 로쿠로 등이 광산 경영

1887년 : 제1수경 뚫고 44m까지 개착

1890년 : 미쓰비시가 나베시마 마고 로쿠로에게서 10만 엔에 매수하여 다카시마의 지점 광산으로 1891년부터 채광 시작

1895년 : 제2수경을 뚫음 (168m까지 개착)

1896년 : 제3수갱을 뚫음 (616m까지 개착)

1916년 : 일본 최초의 철근콘크리트 아파트 완성

1925년 : 제4수갱을 뚫음 (370m까지 개착), 평소에 배기용으로 사용하고 제2수갱에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대용으로 사용

1934년 : 하시마 초등학교 개교

1941년 : 연간 생산량 최고 기록 41만 톤 달성

1945년 : 석탄을 싣고 있던 하쿠주 마루 배가 어뢰에 맞아 침몰

1955년 : 다카하 무라 하시마와 다카시 마마치가 합병하여 다카시 마마치 하시마가 되다

1965년 : 미스 세신 갱도에서 출탄 개시

1974년 : 1월 15일 하시마광이 폐광, 그 해 4월 20일에 무인도가 되어 현재에 이름

 

2017년 군함도방문  (동방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