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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월미도 (2021년 10월22일 금요일)

동방박사님 2021. 10. 23.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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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에서 바라본 영종도

당일치기 인천월미도와 영종도 구읍뱃터의 여행을 사진과 함께 글도 함께 써보고자 한다. 

 나는 인천에서 태어났다.  인천에서의 기억중 월미도를 를 이야기 하고자한다.  초등학교 입학 1년전 신학대학 선생님께서 6개월 정도 우리집에서 과외를 가리킨적이 있다. 동네아이들을 모아서 5명정도 과외를 가리키고 계셨는데 여름방학에 월미도로 소풍을 가자고 해서 월미도에 처음 발을 디뎠다. 당시 1960년대로 기억되는데. 지금은 월미도가 인천의 유명관광지 이지만 그당시에는 월미도주변이 아무것도 없고 오직 섬, 그자체 이었는데 육지에서 월미도 가는길은 염전이 많았다.

사각형모양의 염전의 작은 뚝방을  걸어서 월미도 같던 기억이 있고, 또하나의 기억은 소월미도의 추억이다. 지금은 소월미도야 일반인이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용도로 사용되는것 같은데 그당시 6살인 나에게 소월미도의 해수욕장이 눈에 들어 왔다. 해수욕장의 갯벌과 작은 모래사장이 있었고, 당시에도 젊은여성들의 비키니 차림모습으로 요즘과  다름없이 검정 타이어 쥬브를 사용하여 물장구치며   수영하고 즐겁게 해수욕도 하던 모습이 기억난다.그당시 시설은 부족하지만 나름 사람들이 적응해서 여가생활 하던 모습을 볼수 가있다.

 

월미도 앞바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둥둥" 인천에 사는 시민들은 어릴적에 자주 듣던 이야기이다. 인천은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곳이다. 지금은 서울에 살고있지만 월미도는 나에게 사회생활 하면서 머리를 식히고 싶을때 자주 찿은 곳이다. 최근 방문한적은 2018년 이다.

 

 

작약도

기계장비 뒤에 보이는섬이 작약도이다. 크기는 작지만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개인섬으로 알고 있는데,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예전에는 연안부두에서 관광선이 정기 운행해서 1990년대에 3번정도 갔던 기억이 있다.

 

월미도 앞바다 
월미도 앞바다 준설장비와 영종도 구읍뱃터 영종도 하늘도시 아파트단지

 

인천상륙작전 조형물

인천상륙 작전

미해군 상륙지휘함 USS 마운트 맥킨리(USS Mount McKinley)에서 유엔군 총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방어가 약했던 인천을 포격하는 것을 살펴보고 있다.

미해병대 발도메로 로페즈(Baldomero Lopez) 중위가 인천 레드비치(Red Beach : 현재 인천광역시 동구 만석동 일대)에 상륙한 후, 방조제를 기어오르는 모습. 얼마 지나지 않아 로페즈 중위는 날아오는 수류탄을 몸으로 막아 폭사당했다. 사후에 미국 명예 훈장(Medal of Honor)을 수여받았다.

낙동강 전선에서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이어 9월 13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인천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다. 미국의 제임스 도일(James H. Doyle) 해군 소장이 유엔군 해군사령관으로서 작전을 지휘했다. 동원된 군함은 한국 15척, 미국 226척, 영국 12척, 캐나다 3척, 오스트레일리아 2척, 뉴질랜드 2척, 프랑스 1척, 도합 261척의 대선단이었다 13일부터 맹렬한 함포 사격이 시작되어 이틀이 지났다. 15일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의 지휘 아래 대한민국의 백인엽 대령이 합동으로 상륙작전을 수행하면서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인천에 진입하였다.

 

서울 탈환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자 김일성은 다급해졌다. 민족보위상(民族保衛相)인 최용건을 서울 방위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약 2만의 병력으로 투입시켰다. 서울에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다. 그러나 20일에 유엔군 수색대는 이미 한강을 건너 서울에 침투해 있었다. 23일에는 대한민국 해병대와 미국 제1해병사단이 현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의 안산(鞍山)을 점령했다. 다음 날 한강을 도하하여 마포를 통하여 시내로 돌입했다.

25일에는 대한민국 국군 제17연대와 미국 제7보병사단이 현재 경기도 과천시 관악산 방면을 통하여 한강을 도하했고 서울의 남쪽으로부터 시내로 돌입, 해병대와 맹렬한 협공으로 가했다. 조선인민군은 시가전을 치루려고 했으나 병력의 대부분이 섬멸되어 서울에서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9월 28일 제2차 서울 전투로 서울 탈환이 이루어졌다.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복궁 자리에 있었던 중앙청 첨탑에 다시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이별의 인천항 노래비

 

 

 

작약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