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로마카톨릭-천주교 (책소개)/4.한국천주교회사

한국천주교회사2

동방박사님 2021. 11. 25.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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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국천주교회사』는 가톨릭교회의 아시아 선교에서 시작하여 조선 교회의 창립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 천주교회의 커다란 흐름을 다룬 통사이다. 신학적 관점에서의 교회사보다도 한국사의 한 부분으로서의 교회사에 중점을 두었으며, 설립 46년을 맞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교회사 연구기관인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집필진이 오랜 준비 끝에 심혈을 기울여 펴냈다. 한국 교회사와 관련하여 기존의 자료와 최근의 연구 성과까지 종합하였기에, 한국 천주교회사의 주요한 면면을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책이다.

2권에서는 제3부 ‘시련 속의 교회’라는 제목 아래 신유박해부터 1839년 기해박해 직전까지 19세기 전반부의 한국 천주교회사를 다루었다. 한국 천주교회가 1801년의 신유박해와 1827년 정해박해 등 여러 박해로 많은 교회 지도자와 신자를 잃었으나 박해의 영향으로 오히려 교우촌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퍼져 나가고, 신자들의 교회 재건운동 결과 마침내 1831년 조선 대목구가 설정되고 서양인 선교사가 입국하는 과정을 서술하였다. 각 장마다 집필진이 본 참고문헌과 함께 풍부한 사진, 그림, 표 등이 실려 있어 특히 신학교와 교리 신학원, 각 본당 교리 교육 등 현장에서 필수 교재로 활용할 수 있다. 『한국천주교회사』는 총 5권으로 발간될 예정이다.

목차

간행사

제3부 시련 속의 교회

제1장 신유박해와 황사영 백서 사건
제1절 박해의 원인
1. 천주교와 유교의 가치 충돌
2. 유교 중심의 사회질서에 대한 위협
3. 노론 벽파 중심의 정국 재편
제2절 박해의 과정
1. 박해의 시작
2. 주문모 신부의 자수
3. 박해의 확산
제3절 황사영과 백서 사건
1. 황사영의 생애
2. 황사영의 교회 활동
3. 황사영의 체포와 순교
4. 〈백서〉의 내용
5. 황사영과 〈백서〉에 대한 평가
제4절 신유박해의 종식과 의미
1. 박해의 종식과 〈토사교문〉의 반포
2. 박해의 의미와 영향
1) 척사론의 확산과 근대화의 지연
2) 천주교의 확산

제2장 교회 재건운동과 정해박해
제1절 ‘목자 없는 교회’ : 교우촌의 형성과 확산
1. 교우촌의 형성
2. 교우촌의 확산과 변화
3. 교우촌의 분포
4. 교우촌에서의 신앙생활
5. 교우촌의 일상생활
6. 교우촌과 회장
제2절 교회의 재건과 성직자 청원
1. 신자들의 교회 재건
2. 1811년의 성직자 영입 시도
1) 이여진의 활동
2) 1811년의 서한
3) 시도의 결과
3. 1824년의 성직자 영입 시도
1) 정하상의 활동
2) 유진길의 청원 서한
제3절 정해박해
1. 박해의 원인
2. 박해의 전개
3. 박해의 순교자
1) 순교자의 신앙
2) 순교자의 특징

제3장 조선 대목구 설정과 선교사의 입국
제1절 조선 대목구의 설정
1. 조선교회에 대한 교황청의 관심
2. 교황청과 파리 외방전교회의 교섭
3. 브뤼기에르 신부의 청원
4. 조선교회를 위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노력
5. 조선 대목구의 설정
6. 조선 대목구 설정의 의의
제2절 선교사들의 입국과 활동
1. 브뤼기에르 주교의 활동
1) 초대 조선 대목구장 취임
2) 브뤼기에르 주교와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의 갈등
3) 브뤼기에르 주교의 입국 좌절과 선종
2. 모방 신부의 입국과 사목 활동
1) 모방 신부의 생애와 입국 과정
2) 조선 대목구의 현황 보고
3) 신학생 선발과 해외 파견
3. 샤스탕 신부의 입국과 사목 활동
1) 샤스탕 신부의 생애와 입국 과정
2) 교우촌 순방과 조선 대목구 현황 조사
3) 선교 지역의 확대
4. 앵베르 주교의 입국과 활동
1) 앵베르 주교의 생애와 조선 대목구장 임명
2) 선교사 입국로 개척을 위한 모색
3) 앵베르 주교의 입국과 사목 활동

저자 소개

저자소개
이장우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최선혜 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
조현범 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
 
 

책 속으로

신유박해와 황사영 백서 사건
물론 '백서'를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라는 절박한 상황에 봉착한 젊은이의 사려 깊지 못한 극단적 선택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이미 병자호란 이후 당쟁의 격화로 점차 드러나기 시작한 왕실의 무능과 노론의 일당 전제화로 인하여 기존의 통치 체제와 사회질서가 허물어지고 있던 당시 조선 사회에 절망한 젊은이가 새로운 이상사회를 찾고자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하나의 대안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교회 재건운동과 정해박해
박해를 계기로 천주교 신앙은 보다 더 넓은 지역으로 퍼져 나갈 수 있었다. 생명의 위협과 혹독한 고문 앞에 한때 배교했던 많은 신자들은 참회와 신앙에 대한 갈망 속에서 몰래 기도를 드리고 기도문을 암송하며 신앙을 이어 나갔다. 박해를 피한 신자들 역시 두려움에 떨면서도 신앙에 대한 열망은 감출 수 없었다. 이에 신앙생활을 이어가려던 신자들은 가족과 친척, 또는 다른 신자들과 더불어 경기도·충청도·강원도·경상도 등의 산간벽지로 숨어들어갔다. 그로 인해 구석진 시골까지 천주 신앙이 전파되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렇게 형성된 교우촌이야말로 박해시대에 천주교회가 이어지는 구체적 신앙의 현장이자 터전이 되었다.

조선 대목구 설정과 선교사의 입국
이와 같이 교황청은 중국 천주교회의 교계 제도를 전반적으로 재조정함으로써 포르투갈에 부여했던 보호권을 축소시켰다. 이러한 방침은 궁극적으로 포교성성이 직접 아시아 선교를 관장하여 유럽 국가들의 간섭을 배제하고 오직 신앙적인 관점에 입각한 통일적인 선교 정책을 펼치려는 목적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교황청이 취한 일련의 조치에서 그 출발점 역할을 한 것이 바로 1831년 조선 대목구의 설정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맥락에서 조선 대목구의 설정이 지니는 교회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