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한일관계사 연구 (책소개)/2.한일과거사

일본의 노예 : 한국인이 꼭 알아야 할 역사의 진실

동방박사님 2021. 12. 11.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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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우리의 역사 속에는 우리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두운 과거가 많이 있다. 일본군 위안부나 강제징용 문제도 역사 속에서 영원히 감추고 싶은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이를 새삼 들추어내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슬픈 과거가 재발하지 않도록 기억하고 대비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위안부와 강제징용 제도는 거시적으로 볼 때 중세 시대 일본의 인취와 난취, 왜구의 조선인과 중국인 납치,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인 연행, 포르투갈 상인의 해외 노예 매매, 유럽 상인과 군인들에 대한 가라유키상 제도 등과 연결된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즉,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이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고, 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관행적 행위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피해자들을 모두 비자발적 노예상태에 있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반복된 이러한 형태의 노예상태는 미래에도 새롭게 진화한 형태로 재발할 가능성이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슬픈 과거들을 그냥 흘러 보내지 말고 기억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들이 국수주의나 배타주의, 혐오주의로 발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책은 우리의 슬픈 역사를 다루면서도 이 점에 대하여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위안부나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는 기본적으로 인권 문제다. 그리고 이들이 위법한 국가권력에 의하여 자신의 자유와 생명, 재산에 피해를 입었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가해자인 국가나 기업이 이들의 피해를 보상하고, 미래에 이와 같은 피해가 재발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인권 문제 해결의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는 단순한 인권 문제의 차원을 넘어서 한국과 일본의 국가적 문제가 되었다. 한국과 일본의 정부와 국민 사이에는 문제의 본질에 대한 엄청난 이해의 간격이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함에도 어느 국가의 정부도 이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하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이나 협의가 없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작은 밀알이 되고 싶은 것이 바로 이 책의 탄생 배경이다. 그리고 이 책은 단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 박태석은 말한다. “이번에는 ‘일본의 노예’라는 제목으로 위안부와 강제징용의 실상, 그리고 이와 역사적 연관성을 가진 일본의 유녀와 가라유키상, 임진왜란의 인취와 약탈 등에 대한 연구 결과를 먼저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 이어서 세계 각국의 인권침해 피해 사례를 살펴보면서, 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찾아보는 노력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목차

책머리에_잊어서는 안 될 우리의 과거를 쓰면서 / 5

제1부 위안부와 강제 동원의 역사적 기원_인취와 난취

일본의 유녀와 인신매매 / 25
일본의 인신매매 관행
일본 윤락 산업의 발전, 여성 인신매매의 결과
일본 유녀의 성노예 생활
요시와라 유곽, 일본 최대의 유곽

일본 전국 시대의 인신매매, 인취와 난취 / 37
인간 사냥과 노예무역
일본 중세의 노예사냥, 인취
일본의 중세 이후 노예사냥, 난취
히데요시의 어오와 도쿠가와의 대오, 쇼군의 위안소

노예무역, 해외로 팔려 간 일본인 / 54
해외 인신매매, 일본의 오래된 관습
포르투갈, 일본, 중국의 삼각무역
포르투갈 신부와 남만무역
무역항 나가사키의 발달
나가사키의 노예시장
전 세계로 팔려 간 일본인 여성 노예들
덴쇼 소년 사절단의 유럽 순방, 수많은 일본인 노예를 보다

히데요시의 인신매매 금지령 / 70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코엘류 신부의 대립
히데요시의 인신매매 금지 칙령과 바테렌 추방령
히데요시가 선교사 추방령을 내린 이유

임진왜란 중 노예로 끌려간 조선인들 / 82
임진왜란은 노예 전쟁
조선인 포로들이 기여한 일본 경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의 수
조선인 포로들의 운명
조선인 남녀 노예의 포획 및 매매의 참상
유럽으로 팔려 간 조선인 노예, 안토니오 코레아
조선인 여성 포로 줄리아 오타아와 고니시 유키나가

제2부 가라유키상_해외로 나간 일본의 성노예

포르투갈의 퇴장과 네덜란드의 등장 / 109
아카풀코 항로, 스페인의 등장
주인선으로 체계적 무역관리
산펠리페 사건과 스페인선의 입항 금지
야유타야 사건과 봉서선의 등장, 그리고 쇄국령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윌리암 애덤스, 네덜란드로 무역 상대방을 바꾸다

가라유키상 제도와 일본의 근대화 / 121
가라유키상의 등장
오란다유키상
데지마, 일본 근대화에 기여
조선 왜관, 데지마와는 달랐다

근대의 가라유키상, 세계로 끌려간 일본 여성들 / 133
가라유키상의 해외 진출
가라유키상, 기망에 의한 인신매매
가라유키상의 규모
후쿠자와 유키치의 가라유키상 예찬론
가라유키상, 일본 경제의 소방수였다
국가의 수치가 된 가라유키상의 퇴출

가라유키상, 비자발적 성노예 / 148
마리아루즈호 사건, 비자발적 성노예임을 확인하다
산다칸 8번 창관, 가라유키상의 일생
가라유키상과 위안부, 국가의 조직적 강간 시스템에 의한 희생자들

전후 가라야키상, RAA 협회 / 158
미군을 위한 위안소 설립 계획, 일본 여성의 정조를 지켜라
국가 성 방파제, RAA는 국가적 강간 시스템
오키치상으로 미화한 미군 위안부
미군의 위안소, 신가라유키상
숨겨진 인권침해
미군의 요청에 따른 RAA 제도의 폐지
일본군 위안부와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제3부 일본군 위안부 제도_국가적 폭력의 산물

일본군 위안부의 성격은 성노예 / 177
일본군 위안부란?
위안부와 정신대
위안부는 성노예다
위안부, 노예 매매에서 진화한 해외 연행 인신매매
비자발적 노예로서의 위안부

일본군 위안소 설치 및 위안부의 등장 / 188
제1차 상하이 사변과 최초의 위안소 설치
위안소 설립의 목적, 군인들의 합법적인 강간 센터
제2차 상하이 사변과 위안부의 제도화
태평양 전쟁과 위안소의 확대

일본군과 일본 정부의 유기적 협조로 위안부 강제 모집 / 204
상하이 총영사관 공문에 나타난 일본군 헌병, 영사관, 경찰의 업무 분담
일본 육군성 지시 공문에 나타난 위안소 설치 지시
일본 정부와 식민지 총독부의 적극적 위안부 모집 활동
일본군과 일본 정부의 체계적 위안부 강제 연행
일본군 지시를 받은 위안부 모집 활동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과 기망성 / 219
속임수, 감언, 강제력을 사용한 모집의 위법성
일본군에 의한 부녀자 강제 납치
일본군과 모집업자의 강제 모집
모집업자들의 강제 모집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 논란
위안부 모집의 관행적 수법, 기망성
정신대 지원 강요를 통한 강제 모집

강제 연행이 아니라는 주장, 사실과 다르다 / 242
위안부의 강제 연행의 의미
모집 과정에 관한 일본 내 일부의 주장
위안부가 매춘부라는 주장,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위안부의 대부분은 강제 연행되었다.

일본군 위안부의 실체 / 256
훼손된 자료들, 실체 파악이 어렵다
전체 위안부의 수, 29대1
최소 20만 명 설이 객관적이다.
위안부의 약 80%가 한국 여성
위안부의 다양한 국적
위안부의 대부분은 나이 어린 소녀들
아동 매매 금지 국제조약의 식민지 적용 배제

일본 정부의 위안소 관리 / 274
위안소의 위치와 수
일본군의 일선 위안소 관리
유엔 쿠마라스와미 특별 보고관의 결론, 일본군의 성노예였다
유엔 게이 맥두걸 특별 보고관의 보고, 위안소는 강간 센터였다

위안부의 전선 생활과 보수 / 287
전선에서의 위안부 생활, 일본군의 성노예
대가 없는 조직적 집단 강간
호주령 라바울의 위안부 3,000명, 거의 대부분 사망했다

위안부 피해자의 슬픈 이야기 / 299
난징을 거쳐 미얀마로 간 박영심
인도네시아로 끌려간 14세 소녀 정서운, 스마랑의 성노예
식민지 대만의 위안부 피해자들
필리핀의 위안부 마리아 로사 루나 헨손의 비극
네덜란드인 얀 루프 오헤른, 『나는 일본군 성노예였다』

잊힐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 / 318
전쟁 이후 위안부, 계속되는 인권침해
종전과 함께 살해된 위안부들
전쟁 중 사라진 위안부들
부정할 수 없는 진실들
처벌받지 않은 국제범죄

제4부 한국인의 슬픈 역사_강제징용의 진실

일제 강제징용, 그 유래와 규모 / 337
강제징용의 유래, 인취와 난취
조선인 강제 노동자의 규모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일본 정부의 조선 인적자원 수탈 정책의 개시

조선인 징용의 단계별 국가 강제력 행사 / 345
조선인 강제 동원의 구분
모집의 형식을 취한 강제 동원
관 알선 방식에 의한 강제징용
국민 징용령에 의한 강제징용

친일 단체와 피징용 피해자로 갈라선 조선인들 / 362
친일 단체를 통한 강제 동원 독려
징용 거부 운동
도망가는 조선인 노동자들
조선인 노동자들의 저급한 임금, 그나마도 받지 못했다
군인·군속의 강제징병
여성 근로정신대의 조직과 여성 인력 강제 동원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의 비참한 노예 생활, 그리고 학살 / 377
강제 노동 현장의 실태
마쓰시로 대본영 건설의 징용자들의 희생
옥매산 광산 광부들의 비극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
군함도의 유네스코 논란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있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대참사 / 387
밝혀지지 않은 우키시마마루호 사건의 의혹
사할린 강제징용 조선인 노동자들의 학살
하이난섬 난딩 천인갱의 대학살

중국인 강제 노역자들의 희생 / 407
1천만 명 이상 강제 동원된 중국인 노동자
하나오카 광산의 학살
수많은 만인갱

연합군 포로들의 처참한 노예 생활 / 415
연합군 포로들의 강제 노역
바탄 죽음의 행진
버마 철도 건설의 대참사

남태평양의 비극들 / 426
오키나와의 조선인 학살과 집단 자살
남양군도 밀리 환초의 대학살
치치지마 미군 조종사 식인 사건
일본 군인의 뉴기니섬 식인 행위
이오지마 전투의 억울한 피해자 조선인 노동자 1천 명

주석 / 444
 

저자 소개 )

저 : 박태석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과 육군 법무장교를 거쳐 검사로 20년, 변호사로 15년을 살아온 평범한 법조인이다. 변호사 개업 후 사회에 미력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소수 계층의 인권 보장을 위해 새터민(북한 이탈 주민)의 무료법률상담을 진행했다. 또 대한변협의 국제난민지원변호사단에 소속되어 정치· 종교적 박해를 피해 도피해온 외국 난민들의 망명 신청과 관련된 행정소송을 무료로 변론하기도 했다....
 

책 속으로

일본에서 인신매매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일본에서 매춘부는 유녀遊女, 유조라고 부르며, 성매매 지역인 유곽遊郭, 유카쿠이나 숙소에서 남성에게 성적 서비스를 하는 여성을 일컫는다.
--- p.25

그런데 일본에 의한 노예사냥과 노예 매매는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예로부터 일본 전쟁터에서는 전리품의 일부로 남녀를 납치해 가는 ‘인취人取’가 심심찮게 행해졌다.
--- p.40

50만 명의 일본 처녀들이 팔려 나갔다는 소년 사절단의 보고서 내용에 대하여 과장되었다는 주장이 많으나, 이에 대하여 반박하는 논리도 있다.
--- p.67

이러한 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볼 때,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 수는 일본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2만 명에서 3만 명보다는 훨씬 많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다수 학자들은 약 10만 명 정도로 보고 있다.
--- p.91

일본은 데지마를 통하여 서양의 선진 문물을 얻음과 동시에 세계정세를 파악하고 있었지만, 조선은 왜관을 통하여 서양의 문물이나 세계정세 등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 p.131

주로 한국 여성들로 이루어진 위안부들이 그 주된 피해자였는데, 그것은 역사상 볼 수 없었던 장기간에 걸친 대규모의 합법화된 군대 강간이라고 할 수 있다.
--- p.156

패전 6일 후 내각 각료들은 긴급조치를 논의하기 위하여 수상 관저에 모였다. 하지만 그때 논의한 긴급조치 사안은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피해나 수백만 명의 전쟁 이재민 등 국가 위기에 관한 사항이 아니었다. 이들 내각 각료들은 곧 진주할 미군들의 성적 욕망을 어떻게 만족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논의했다.
--- p.158

이 책에서는 일본군 위안부의 성격에 대하여 쿠마라스와미 특별 보고관의 ‘군 성노예’라는 표현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한국 여성가족부의 공식 의견에 따라서 ‘일본군 위안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 p.187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한국 여성들 거의 대부분은 가난한 집안의 평범한 처녀들로 일본 경찰이나 군인에게 강제로 끌려가거나, 공장이나 간호사로 일한다는 말에 속아 일본군을 상대로 성적 봉사를 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업자들을 따라간 여성들이었다.
--- p.221

램지어 교수의 주장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은 그가 위안부 고용계약서와 같은 아무런 근거 없이 위안부들이 계약관계로 일했다는 허위 주장을 하고 있으며, 그가 근거로 들고 있는 자료에 나오는 일부 여성들이 계약관계에 있다고 하나 그들도 모두 일할 업무의 성격에 대하여 기망을 당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 p.251

유엔 인권위원회의 게이 맥두걸 특별 보고관은 1998년 8월 12일 제50차 유엔 인권소위원회에 ‘제2차 세계대전 중 설치된 위안소에 관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의 분석’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맥두걸은 위 보고서에서 ‘강간 센터의 성격과 범위’라는 항목에서 위안소의 성격과 실태에 대하여 분석을 했다. 그는 위안소를 ‘강간 센터’라고 명명하고 일본 군대가 사실상 운영했다고 주장했다.
--- p.282

위안부들은 전선에서는 항상 군과 함께 행동할 것을 강요당하고 아무런 자유도 없는 생활이었다. 일본군이 저지른 범죄는 위안부에 대한 직접적인 강간은 말할 것도 없고, 위안부 강제 동원을 위한 납치나 기망 행위 등이 대표적이다. 또 위안소를 유지하고 위안부의 도주를 막기 위한 감시와 폭력, 통제, 고문, 감금, 살해 행위 등이 포함된다.
--- p.287

1945년 8월 15일 전쟁이 끝났으나, 대부분의 위안부 피해자들에게는 평화가 오지 않았다. 많은 위안부들이 전쟁 중 살아남지 못했다. 병들어 죽거나 연합국의 공격으로 사망하기도 했고, 전쟁에서 패배 시 집단 자살을 하는 일본 군인들의 관행에 따라 일본군의 손에 살해당하기도 했다.
--- p.318

1944년 8월부터는 징용령에 따른 일반 징용이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대상은 만 16세 이상 40세까지의 남자였다. 일반 징용이란 일정한 연령대의 남성에게 영장을 발부하여 신체검사를 한 뒤, 노무자로 일본 본토와 조선, 기타 전선으로 보내는 것을 말한다.
--- p.357

조선과 중국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일본 노동자들보다 훨씬 길었고, 음식도 일본 노동자들보다 훨씬 나쁜 것을 제공하고 양도 적어 항상 굶주림에 시달렸다. 숙소는 일본인·조선인·중국인으로 각각 구분되어 엄중한 울타리를 만들어 서로 왕래가 금지되었다.
--- p.377

마쓰시로 대본영의 지하 벙커 굴착은 그 대부분이 조선인의 손에서 진행되었다고 하며, 낙반 위험이 높은 곳에는 조선인 노동자를 강제로 노역을 시켰다고 한다. 조선인들의 생활은 극히 열악하여 힘든 노동인 데다 식사는 빈약하고 양도 적어 영양실조나 눈이 멀게 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천황의 좌소를 판 조선인 180명은 비밀 누설을 막기 위해 살해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공사가 거의 끝날 무렵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행방불명인 채 돌아오지 않았다.
--- p.381

천인갱에 묻힌 이들은 강제 노역 도중 숨진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제는 패망 후에도 조선인에게 해방 소식을 알리지 않은 채 학대하고 살해한 후 천인갱에 묻었는데, 전체 매장된 조선인이 1,200~1,3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 p.403

바탄 죽음의 행진Bataan Death March은 1942년 4월 9일 일본군이 약 8만 명에 이르는 미국과 필리핀 전쟁 포로들을 필리핀 루손섬의 바탄과 마리블레스에서 산페르난도까지 강제로 도보 이동을 시킨 것을 말한다.
--- p.403

당시 미군 조종사 8명, 통신사 1명 등 9명이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중 8명이 살해당했고, 그 가운데 5명이 일본군의 식인 피해자다. 부시 전 대통령도 체포되었으면 식인 피해자가 될 뻔한 것이다.
--- p.433

격렬한 전투의 결과, 미 해군 및 해병대의 전 병력 11만 명 중 전사자는 6,821명, 부상은 19,189명, 실종이 494명이었다. 일본 육?해군은 21,000명 가운데 216명만 남고 전원 전사했다. 1천여 명의 일본 해군 소속 조선인 군속들도 전투 속에서 모두 사망했다.
--- p.442
 

출판사 리뷰

네버 어게인!
“다시 반복되어서 안될 슬픈 역사”

우리가 영원히 기억하여야 할 역사 이야기


우리의 역사 속에는 우리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두운 과거가 많이 있다. 일본군 위안부나 강제징용 문제도 역사 속에서 영원히 감추고 싶은 이야기 중의 하나이다. 이를 새삼 들추어내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슬픈 과거가 재발하지 않도록 기억하고 대비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이 책에서 이러한 어두운 이야기는 일본 중세의 인취와 난취로부터 시작한다. 일본에서는 중세 시대부터 전쟁에서의 승자가 전리품의 일부로 남녀를 납치해 가는 ‘인취’가 빈번하게 행하여졌다. 그들은 납치하여 온 이웃나라 주민들을 많은 돈을 받고 되돌려 주거나 노예로 활용하였다. 일본의 해적인 왜구들이 조선인과 중국인들을 납치하여 일본 농지소유주에게 노예로 팔아 농사를 짓게 한 것도 이러한 인취라는 일본의 전쟁관행에서 비롯되었다.

16세기 중반 대항해 시대에 들어서면서 포르투갈 상인들이 일본의 은을 찾아서 일본을 드나들었다. 이때 일본의 지방 영주들은 주변 국가의 남녀를 납치하여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고 대신 그들의 무기와 화약을 구입했다. 자기 영토를 보존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16세기 후반 전국의 통일과 함께 서양 무기의 도입으로 군사력이 강화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수많은 조선인들을 납치해 갔다. 당시 규슈 지방 다이묘(영주)를 중심으로 한 일본군들은 일본 노예 상인들과 함께 조선의 남부 지방을 돌아다니며 수십만 명의 조선인 남녀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노예로 삼거나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팔아 넘겼다. 일본 나가사키의 노예시장에서 많은 조선인 포로들이 포르투갈 상인들을 통하여 헐값으로 유럽과 전세계로 팔려나갔다. 임진왜란을 노예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그리고 전쟁에 참여한 지방 영주들은 임진왜란기간 동안 충청, 전라, 경상 지방의 유명 도자기 기술자들을 대거 납치해 가서 경쟁적으로 도자기 산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17세기 후반에는 유럽에 수출까지 했다. 2세기가 지난 후 일본의 조슈, 사가, 사쓰마의 세 번이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와 1873년 빈 만국박람회에서 대상 등을 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는 메이지 유신의 성공으로 이어지면서 정치, 경제, 사회가 두루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통일하고 중앙집권을 확립하자,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그들의 통치권을 지키기 위하여 쇄국정책을 취했다. 그들은 모든 서양 국가들에게 문을 걸어 잠갔지만, 오직 네덜란드 상인들에게는 문호를 개방하였다. 일본은 그러한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오란다유키상이라고 부르는 윤락 여성들을 제공했다. 가라유키상이라고도 불린다. 이러한 가라유키상 제도는 차츰 발전하여 19세기 들어 메이지 유신과 함께 일본인들의 해외 왕래가 빈번해지자, 젊은 여성들을 해외로 보내 외국 군인이나 상인을 상대로 윤락행위를 제공하는 형태로 변화하게 된다.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이 에도만에 나타나면서 일본은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결국 젊은 무사들을 중심으로 아시아 국가로는 처음으로 근대화에 성공했다. 메이지 유신은 국가 제도와 산업 전체를 바꾼 참으로 대단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수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근대화와 산업화에 성공하자, 서양보다도 더 지독한 제국주의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 가장 큰 희생자가 바로 이웃에 있는 조선이었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후에 중국 대륙을 침범하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아시아 대부분을 점령했다.

전쟁 기간 중 수많은 일본 군인들이 중국과 동남아시아, 남태평양 지역으로 출전하게 되자 위안부 제도를 만들어 조선 식민지 여성들을 강제로 끌고 가 전쟁터의 성노예로 삼았다. 에도시대 말기와 메이지 시대에 해외로 내보내 일본과 유럽상인들을 상대로 윤락행위를 시킨 가라유키상이 강제성과 기망성을 더하여 진화한 것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군인들이 출병하면서 노동력이 크게 부족해지자, 조선 식민지와 중국 점령지의 남성들을 강제로 징용하여 일본과 태평양 각지에서 강제 노동에 종사하게 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로서는 참을 수 없는 역사적 수치다. 하지만 우리들의 조상인 조선 위정자들의 잘못도 적지 않다. 국가의 부국강병을 기초로 한 국민들의 안전 보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의지나 능력도 없었다.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는 그러한 역사의 결과다.

이처럼 위안부와 강제징용 제도는 거시적으로 볼 때 중세 시대 일본의 인취와 난취, 왜구의 조선인과 중국인 납치,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인 연행, 포르투갈 상인의 해외 노예 매매, 유럽 상인과 군인들에 대한 가라유키상 제도 등과 연결된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즉,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이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고, 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관행적 행위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피해자들을 모두 비자발적 노예상태에 있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반복된 이러한 형태의 노예상태는 미래에도 새롭게 진화한 형태로 재발할 가능성이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슬픈 과거들을 그냥 흘러 보내지 말고 기억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들이 국수주의나 배타주의, 혐오주의로 발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책은 우리의 슬픈 역사를 다루면서도 이 점에 대하여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위안부나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는 기본적으로 인권 문제다. 그리고 이들이 위법한 국가권력에 의하여 자신의 자유와 생명, 재산에 피해를 입었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가해자인 국가나 기업이 이들의 피해를 보상하고, 미래에 이와 같은 피해가 재발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인권 문제 해결의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는 단순한 인권 문제의 차원을 넘어서 한국과 일본의 국가적 문제가 되었다. 한국과 일본의 정부와 국민 사이에는 문제의 본질에 대한 엄청난 이해의 간격이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함에도 어느 국가의 정부도 이에 대한 해결책을 강구하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이나 협의가 없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작은 밀알이 되고 싶은 것이 바로 이 책의 탄생 배경이다. 그리고 이 책은 단권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 박태석은 말한다. “이번에는 ‘일본의 노예’라는 제목으로 위안부와 강제징용의 실상, 그리고 이와 역사적 연관성을 가진 일본의 유녀와 가라유키상, 임진왜란의 인취와 약탈 등에 대한 연구 결과를 먼저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에 이어서 세계 각국의 인권침해 피해 사례를 살펴보면서, 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찾아보는 노력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지은이의 말

저는 약 4년 전 새로운 결심을 했습니다. 자녀들이 교육을 모두 마치자 가장으로서 가정에 대한 책임을 어느 정도 이행했다고 생각하고, 이제부터는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찾아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사회에 나름대로 기여할 수 있는 방식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다, 평소 좋아하는 사회과학 연구 활동을 체계적으로 진행하여 자료를 남긴다면 사회제도 개선에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평소 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제가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7~8년 전 외국 인권 보호 사례를 찾아보면서부터입니다. 2차대전 중 집단 캠프 수용으로 미국 정부로부터 보상과 사과를 받은 재미 일본인들을 보면서 ‘왜 우리의 위안부나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같은 방식으로 일본 정부로부터 사과와 배상을 받을 수 없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권침해 피해자로서의 일본인이 그 가해자인 미국 정부로부터 보상과 사과를 받았다면, 인권침해 가해자로서의 일본 정부는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보상과 사과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논리입니다.

그런 계기로 먼저 시작한 연구 분야가 이 책에서 다룬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입니다. 그 진실을 파악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이 책입니다. 아무쪼록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도움이 되는 일’을 찾고자 한 저의 결심이 헛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