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동양철학의 이해 (책소개)/1.동양철학사상

한서열전 (반고)

동방박사님 2021. 12. 17.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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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중국 정사의 모범,
동양 역사학의 원류

한(漢) 제국의 위대한 유산인 『한서 열전』을
정확하고 현대적인 번역으로 만난다


『한서(漢書)』는 후한(後漢)의 역사가 반고가 집필한 전한(前漢)과 신(新)나라의 역사서로, 사마천 『사기』와 함께 2000년 동안 널리 읽혀 온 중국 정사(正史)의 대표작이다. 개인의 기록인 『사기』의 후속편으로 시작해 최초의 국가사업으로 완성된 『한서』는 엄격하게 검증된 풍부한 사료를 담고 있는 동양 역사학의 고전이다.

중국뿐 아니라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역사서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이 책은 분량과 난이도 때문에 현대 독자에게 널리 가닿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2021년 민음사에서 출간되는 『한서 열전』은 한문과 현대 중국어에 능통한 역자 신경란이 『한서』의 백미이자 전체 100편 중 70편에 해당하는 열전을 완역한 것이다. 기획에서 출간까지 10여 년이 걸린 대작으로 전 3권, 3612쪽에 이른다. 최신 연구와 현지 발굴 성과를 반영한 3200여 개의 주석과 살아 숨 쉬는 듯한 번역, 아름다운 장정으로 독자는 동양에서 오래 사랑받아 온 고전을 마침내 가까이 만나볼 수 있다.

『한서 열전』을 읽으면 여기에 보존된 전한 제국과 신나라의 문화가 2000년 시공을 넘어 오늘날 동아시아에 여전히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분열보다 통일을 지향하며 중앙집권제와 지방자치제를 병행하는 정치 체제, 능력을 중시하는 관료제와 개인의 개성 발휘를 중시하는 선비 문화, 각종 의례와 의식에서 천벌을 두려워하고 음양오행을 따져 앞일을 가늠하는 민간 신앙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문화의 원형이 이 책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말하는 전통문화를 온전히 파악하는 데 지침이 될 것이다. ― 해제 중에서

목차

『1권』

해제
일러두기

1 진승 · 항적 전 陳勝項籍傳
2 장이 · 진여 전 張耳陳餘傳
3 위표 · 전담 · 한왕 신 전 魏豹田?韓王信傳
4 한 · 팽 · 영 · 노 · 오 전 韓彭英盧吳傳
5 형 · 연 · 오 전 荊燕吳傳
6 초 원왕전 楚元王傳
7 계포 · 난포 · 전숙 전 季布欒布田叔傳
8 고 오왕전 高五王傳
9 소하 · 조참 전 蕭何曹參傳
10 장 · 진 · 왕 · 주 전 張陳王周傳
11 번 · 역 · 등 · 관 · 부 · 근 · 주 전 樊 ??灌傅?周傳
12 장 · 주 · 조 · 임 · 신도 전 張周趙任申屠傳
13 역 · 육 · 주 · 유 · 숙손 전 ?陸朱劉叔孫傳
14 회남 · 형산 · 제북왕 전 淮南衡山濟北王傳
15 괴 · 오 · 강 · 식부 전 ?伍江息夫傳
16 만석 · 위 · 직 · 주 · 장 전 萬石?直周張傳
17 문 삼왕전 文三王傳
18 가의전 賈誼傳
19 원앙 · 조조 전 爰?晁錯傳
20 장 · 풍 · 급 · 정 전 張馮汲鄭傳
21 가 · 추 · 매 · 노 전 賈鄒枚路傳
22 두 · 전 · 관 · 한 전 竇田灌韓傳
23 경 십삼왕전 景十三王傳
24 이광 · 소건 전 李廣蘇建傳
25 위청 · 곽거병 전 ???去病傳
26 동중서전 董仲舒傳
27 사마상여전 상 司馬相如傳 上
  사마상여전 하 司馬相如傳 下



『2권』

일러두기

28 공손홍 · 복식 · 예관 전 公孫弘卜式兒寬傳
29 장탕전 張湯傳
30 두주전 杜周傳
31 장건 · 이광리 전 張騫李廣利傳
32 사마천전 司馬遷傳
33 무오자전 武五子傳
34 엄 · 주 · 오구 · 주보 · 서 · 엄 · 종 · 왕 · 가 전 상 嚴朱吾丘主父徐嚴終王賈傳 上
  엄 · 주 · 오구 · 주보 · 서 · 엄 · 종 · 왕 · 가 전 하 嚴朱吾丘主父徐嚴終王賈傳 下
35 동방삭전 東方朔傳
36 공손 · 유 · 전 · 왕 · 양 · 채 · 진 · 정 전 公 孫劉田王楊蔡陳鄭傳
37 양 · 호 · 주 · 매 · 운 전 楊胡朱梅雲傳
38 곽광 · 금일제 전 ?光金日?傳
39 조충국 · 신경기 전 趙充國辛慶忌傳
40 부 · 상 · 정 · 감 · 진 · 단 전 傅常鄭甘陳段傳
41 전 · 소 · 우 · 설 · 평 · 팽 전 雋疏於薛平彭傳
42 왕 · 공 · 양공 · 보 전 王貢兩?鮑傳
43 위현전 韋賢傳
44 위상 · 병길 전 魏相丙吉傳
45 쉬 · 양하후 · 경 · 익 · 이 전 ?兩夏侯京翼李傳
46 조 · 윤 · 한 · 장 · 양왕 전 趙尹韓張兩王傳
47 갑 · 제갈 · 유 · 정 · 손 · 무장 · 하 전 蓋 諸葛劉鄭孫毋將何傳
48 소망지전 蕭望之傳
49 풍봉세전 馮奉世傳
50 선 · 원 육왕 전 宣元六王傳
51 광 · 장 · 공 · 마 전 匡張孔馬傳
52 왕상 · 사단 · 부희 전 王商史丹傅喜傳
53 설선 · 주박 전 薛宣朱博傳



『3권』

일러두기

54 적방진전 翟方進傳
55 곡영 · 두업 전 谷永杜?傳
56 하무 · 왕가 · 사단 전 何武王嘉師丹傳
57 양웅전 상 揚雄傳 上
  양웅전 하 揚雄傳 下
58 유림전 儒林傳
59 순리전 循吏傳
60 혹리전 酷吏傳
61 화식전 貨殖傳
62 유협전 遊俠傳
63 영행전 ?幸傳
64 흉노전 상 匈奴傳 上
  흉노전 하 匈奴傳 下
65 서남이 · 양월 · 조선 전 西南夷兩越朝鮮傳
66 서역전 상 西域傳 上
  서역전 하 西域傳 下
67 외척전 상 外戚傳 上
  외척전 하 外戚傳 下
68 원후전 元后傳
69 왕망전 상 王莽傳 上
  왕망전 중 王莽傳 中
  왕망전 하 王莽傳 下
70 서전 상 ?傳 上
  서전 하 ?傳 下

역자 후기

참고 문헌
찾아보기

 

 

저자 소개 

저 : 반고
 
자는 맹견(孟堅)이며 32년(광무제 8년) 부풍군(扶風郡) 안릉현(安陵縣)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반표(班彪)의 유지를 이어받아 『사기 후전』을 집필하던 중 사사로이 국사를 찬술한다는 중상모략으로 투옥되었다가, 동생 반초(班超)의 상소로 풀려나 후한 명제(明帝) 휘하에서 국사를 편찬하게 되었다. 전한의 왕조사를 편찬하라는 명에 따라 가업 『사기 후전』을 국사로 개편하여 본기 12편과 열전 70편을 완성했고, 이어...

 

역 : 신경란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중국 난징대학교 중문과에서 고대 중국어 문법 및 서지학을 공부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한글보다 한문을 먼저 배운 인연으로 일찍 동양 고전 읽기의 길로 접어들었다. 현재 난징에서 중국 고대문학·고대사를 공부하는 두 자녀와 함께 동양 고전을 현대적 감각으로 옮기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중국 도시의 역사와 인문 지리 연구를 바탕 삼아 『풍운의 도시, 난징』, 『오래된 미래 도시, 베이...
 

책 속으로

진시황이 동쪽 지방인 회계(會稽) 땅에 순행하러 와서 절강(浙江)을 건널 때였다. 항량과 항우가 함께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항우가 말했다. “저 자리를 빼앗아 우리가 앉아야 하는 건데.” 그러자 항량이 항우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족살을 당하게 돼.” 항량은 속으로 항우를 기특하게 여겼다. 항우는 키가 팔 척 이 촌이었고, 무거운 세발솥을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셌으며 재능과 기질 또한 남달랐다. 그래서 오중 지방의 젊은이들이 모두 항우를 두려워했다.
---「1권 ‘어릴 적부터 포부가 남달랐던 항우, 진승 항적 전」중에서

고조가 일찍이 한신과 함께 여러 장수의 능력 고하를 놓고 한담을 나눈 적이 있다. 고조가 물었다. “나 같은 사람은 군사 얼마를 거느릴 수 있겠는가?” 한신이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십만 정도는 거느릴 수 있습니다.” “그대 같으면 얼마나 거느릴 수 있는가?” “신 같으면야 많을수록 더 잘 거느릴 수 있지요.”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많을수록 더 잘 거느린다? 그런데도 나에게 잡힌 이유는 무엇인가?” “폐하께서는 군사를 거느리는 데는 능하지 않지만, 장수들을 거느리는 데엔 능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폐하께 사로잡힌 이유입니다. 폐하는 이른바 하늘이 내린 제왕으로, 사람들이 힘을 써서 황제가 된 것이 아닙니다.”
---「1권 ‘회음후로 강등된 뒤 여후에게 살해되다, 한 · 팽 · 영 · 노 · 오 전」중에서

조참이 벼슬이 높지 않았을 때는 소하와 사이가 좋았으나 소하가 재상이 된 뒤에는 멀어졌다. 그러나 소하는 죽음을 앞두고 황제에게 조참을 유일한 인재로 추천했다. 조참은 소하의 뒤를 이어 상국이 되었는데, 모든 일에 소하가 쓰던 정책을 하나도 바꾸지 않았으며 소하가 제정한 법률을 계속 따랐다. 각 군과 제후국의 관리 가운데 나이가 많고 문장과 언사가 어눌하며 매사에 조심하며 충실한 장자를 뽑아서 승상사(丞相史)에 임명했다. 관리 중에 조목조목 깊이 따지며 명성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은 모두 쫓아 버렸다. (……) 상국이 된 지 세 해 만에 조참이 세상을 떠나자 의후(懿侯)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백성이 조참을 칭송하는 노래를 불렀다.

소하가 법을 만들되, 조목조목 조리 있게 맞추어 놓았지.
소하의 뒤를 이은 조참은 그 법을 지키며 고치지 않았네.
청정무위의 법을 시행했으니 백성은 언제나 편안했네.
---「1권 ‘소하가 만든 법을 지켜 나라를 안정시킨 조참, 소하 · 조참 전」중에서

공자께서 “사람이 도의 외연을 크게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크게 키우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듯이, 나라의 안정과 혼란, 번성과 쇠망은 제왕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천명을 내려도 다시 거두지 않는 것이 아니니 나라를 다스린 것이 이치에 어긋나면 통서를 잃게 됩니다. 하늘이 크게 도와서 제왕이 되게 하는 것이지 인력으로는 제왕이 결코 될 수 없으니, 신이 알기로 저절로 제왕이 되는 것을 두고 천명의 부절을 받았다고 합니다. 제왕이 천명을 받으면 천하 만민이 한마음이 되어 천명을 받은 제왕에게 부모에게 귀부하듯이 귀속하므로 하늘도 그 정성에 감응하여 상서로운 징조를 나타내 보여 줍니다.
---「1권 ‘유학의 대가로서 첫 번째 대책문을 올리다, 동중서전」중에서

“저는 입으로 내뱉은 말 때문에 이런 화를 당하여 고향 사람들의 심한 조롱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선조를 욕되게 했습니다. 그러니 무슨 낯이 있어 부모님의 산소에 다시 성묘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치욕은 백 대가 지나도 더욱 심해질 뿐입니다. 그리하여 하루에도 아홉 번 창자가 꼬이고, 앉아 있으면 정신이 아물거려 꼭 무언가를 잊어버린 듯하며, 밖에 나가면 어디로 가야 할지 분간을 할 수 없습니다. 그때 당한 부끄러움을 떠올릴 때마다 등에 땀이 흘러 옷에 흥건하게 배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이미 환관으로 지내는 몸이 되었으니 어찌 물러나 심산의 동굴에 은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속에서 부침을 거듭하며 때에 따라 고개를 숙이거나 들면서 마음속의 거친 생각과 의혹을 발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뒤에 소경이 저에게 능력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하라는 가르침을 주셨지만 이는 제 속뜻과 어긋나는 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와서 비록 제가 자신을 잘나 보이도록 꾸미고 좋은 말로 처지를 설명하려고 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이 믿어 주지 않고 다만 욕을 먹을 뿐이니, 요컨대 죽는 날이 닥쳐서야 시비를 가릴 수 있을 것입니다.”
---「2권 ‘하루에도 아홉 번 창자가 꼬이는데, 사마천전」중에서

어느 복날이었다. 총애하는 신하들에게 고기를 내린다는 황제의 영이 있었는데 시간이 늦도록 고기를 잘라 나누어 줄 대관승(大官丞)이 오지 않았다. 동방삭이 혼자 칼을 빼 고기를 베고 같이 있던 벼슬아치들에게 말했다. “복날이라 일찍 돌아가야만 하오. 하사하신 고기를 받도록 합시다.” 그러고는 고기를 안고 바로 가 버렸다. 대관(大官)이 황제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이튿날 입궁한 동방삭에게 황제가 물었다. “어제 고기를 하사할 때 조서가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칼로 고기를 베어서 가 버린 것은 어찌 된 일인가?”

동방삭이 관을 벗고 사죄하자 황제가 말했다. “선생은 일어나서 자책하라.” 동방삭이 두 번 절하고 말했다. “삭이여, 삭이여! 조서를 기다리지 않고 하사한 고기를 받아 갔으니 얼마나 무례했는지! 칼을 뽑아 고기를 베었으니 얼마나 호방했는지! 고기를 베어도 많이 베지 않았으니 또 얼마나 청렴했는지! 돌아가서 세군(細君, 아내)에게 건네주었으니 또 얼마나 자애로웠는지!”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자책하라고 했거늘 선생은 거꾸로 자찬하고 있구나!” 황제가 다시 술 한 석과 고기 백 근을 하사하자 집에 돌아가 세군에게 주었다.
---「2권 ‘뛰어난 언변과 해학으로 황제의 마음을 얻다, 동방삭전」중에서

그 무렵 조충국은 일흔 몇 살이었다. 황제가 조충국이 늙었다며, 어사대부 병길을 보내 누가 군대를 지휘할 수 있을지 물어보게 하자 조충국이 대답했다. “노신(老臣)을 넘을 자가 없습니다.” 황제가 다시 사람을 보내 물었다. “장군이 보기에 강로(羌虜)가 어떻게 나오겠는가? 군사는 얼마를 출동시켜야 마땅한가?” 조충국이 대답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전쟁의 승패는 멀리서 판단하기 어려우니 신이 금성으로 달려가서 그쪽 지형도와 진압책을 올리겠습니다. 그런데 강융(羌戎)은 약소한 이민족으로 하늘의 뜻을 어기고 한나라를 배반했으니 오래지 않아 멸망할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강족을 노신에게 맡기시고 근심을 거두십시오.”
황제가 웃으며 허락했다.
---「2권 ‘백문이 불여일견, 조충국 · 신경기 전」중에서

앞서 촉군 사람 중에 사마상여가 부(賦)를 지었는데, 문체가 웅대하고 화려하면서도 출전이 풍부하여 그 기풍이 고상했다. 양웅은 가슴으로 사마상여를 숭배했기에 부를 지을 때마다 항상 그의 작품을 모방했다. 그러다가 굴원(屈原)의 글이 사마상여의 글보다 뛰어난 것을 알고 놀라게 되었다. 그 작품을 읽을 때마다 〔굴원이 초 경상왕(楚頃襄王)에게〕 배척되어 유배당했을 때 「이소(離騷)」를 지어 놓고 강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은 것을 애통해했는데,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양웅은 군자가 때를 만나면 큰일을 해야 하지만, 때를 못 만나면 용과 뱀처럼 몸을 도사리고 은거해야 하니, 때를 만나고 못 만나고는 명에 달려 있거늘 왜 강물에 몸을 던졌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한 편의 작품을 썼으니, 작품 곳곳에 「이소」의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때로 돌아가 민산에서 강물에 몸을 던진 굴원을 애도했다. 그리고 제목을 「반리소(反離騷)」라고 붙였다.
---「3권 ‘「반리소」, 목숨을 버린 굴원을 안타까워하다, 양웅전」중에서

왕온서가 황제에게 글을 올려 죄가 무거운 자는 멸족시키고 가벼운 자는 당사자를 죽이며 가산을 몰수하여 피해자에게 배상하게 해 달라고 청했다. 상주문을 올리면 이틀도 안 되어 황제의 비준을 받고 형을 집행했는데, 피가 십수 리에 걸쳐 흐를 만큼 많은 사람을 죽였다. 왕온서가 그렇게 빨리 상주문을 올리고 비답을 받아 내자 하내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12월이 다 갈 무렵 하내군 안에서는 도적의 기척에 짖어 대는 개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일부 잡히지 않는 도적 무리가 이웃에 있던 군으로 달아나 왕온서가 그 뒤를 쫓다가 〔사형 집행이 금지되는〕 입춘을 맞이하면 발을 동동 구르며 한탄했다. “아아, 겨울을 한 달만 더 연장할 수 있다면 내가 하던 일을 마칠 수 있을 텐데!” 왕온서가 사람을 많이 죽이는 것으로 위엄을 행사하며 인명을 아끼지 않은 바가 그 정도였다.
---「3권 ‘사람을 죽여 위엄을 행사한 왕온서, 혹리전」중에서

진준은 술을 좋아하여 매번 크게 술자리를 벌였는데 빈객이 방 안에 가득했다. 그런데 언제나 문을 닫아건 뒤에 손님에게서 타고 왔던 수레의 바퀴에 채운 자물쇠의 열쇠를 거두어 우물에 던져 버렸으므로 누군가 급한 일이 생겨도 끝내 돌아가지 못했다. 하루는 부자사(部刺史) 한 사람이 황제에게 보고하러 가던 길에 진준의 집에 들렀는데, 마침 큰 술자리가 벌어져 발목이 잡혔다. 몹시 난처해진 부자사가 진준이 만취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진준의 어머니 처소로 들어가 머리를 조아리고는 상서에게 직접 보고를 올릴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말했다. 진준의 어머니가 뒷문을 통해 빠져나가게 해 주었다.

진준은 늘 취해 있었다. 그러나 일을 미루는 법은 없었다. 키는 팔 척이 넘었고 얼굴이 길고 코가 컸으므로 용모가 아주 특이했다. 경서의 주석을 대개 다 섭렵했고 문장력이 풍부했다. 글씨를 잘 쓰는 재주를 타고나서 남에게 척독(尺牘)을 써서 보내면 받은 사람 모두가 영광으로 여기며 그 필적을 소장하고자 했다. 어려운 일을 해결해 달라는 부탁을 받으면 거절하지 못했다. 그런데 진준이 가는 곳마다 의관을 갖춘 벼슬아치들이 불러서 예를 갖추어 대했으니, 그들은 오로지 진준을 대접하는 대열에 뒤처질까를 걱정할 뿐이었다.
---「3권 ‘술에 살고 술에 죽은 진준, 유협전」중에서

왕망이 외척으로 벼슬길에 오르기 시작했을 때에는 자신을 절제하는 데 힘쓰며 명예를 추구했다. 그리하여 집안에서는 효성스럽다는 칭찬을 들었고 〔조카의〕 스승과 벗에게는 인(仁)을 베풀었다. 황제를 보좌하는 자리에 올라 성제와 애제 때에 황제를 위해 공을 세우며 정도(正道)에 따라 행했으므로 무슨 일을 하거나 칭찬을 받았다. “〔경과 대부의〕 가(家)와 〔제후의〕 국(國)에서 반드시 이름을 얻는데”, “겉으로는 인을 취하면서 행동은 인에 어긋나게 한다.” 라고 한 것은 설마 왕망을 이른 말일까!

왕망은 본래 불인(不仁)한 데다 간특한 재주까지 있었다. 백부와 숙부 네 명이 지냈던 권력을 이어받았을 때 한나라 황실이 중도에 쇠약해지면서 황위를 이을 후사가 세 번이나 끊어지는 일을 겪었다. 태후가 장수하면서 권세를 잡고 있었으므로 간악한 행위를 마음대로 저지르다가 결국 황위를 찬탈하고 권력을 훔치는 죄를 지었다. 이를 통해 볼 때 천시(天時)가 맞아떨어진 면도 있었으니, 사람의 힘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3권 반고의 찬, 왕망전 하」중에서
 

출판사 리뷰

동양고전의 양대 산맥,
『사기』 그리고 『한서』
서양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 있다면
동양에는 『한서 열전』이 있다


고귀한 혈통에 강력한 힘을 가진 항우와 출신은 낮으나 매력과 인덕을 갖춘 유방. 전쟁의 신이었던 항우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 하신다.”라고 탄식하며 패망하고, 유방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뛰어난 참모진과 우직한 수하들로 채워 승리한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두 영웅의 이야기이자 대립 구도의 원형이다. 천하 통일을 이룬 한나라는 진나라 영토를 넘어 서역과 흉노, 남월, 조선 등을 경략하여 대제국을 이루었으며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등의 여러 방면에서 동아시아 전통의 근간이 되는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진나라 말에서 한나라 초까지 전쟁으로 인구 절반이 죽은 폐허 위에 중국 역사상 가장 강대한 제국이 세워진 것이다.

평민 출신인 한 고조 유방이 건국한 한 제국의 역사서가 바로 『한서』다. 반고는 본기, 표, 지(志), 열전의 구성으로 사마천이 발명한 『사기』의 기전체를 보완함으로써 이후 동아시아 정사의 모범이 된 체제를 구축했다. 전체 분량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한서 열전』은 220여 년의 역사를 인물들의 이야기로 엮어 냈다. 반고의 간결하고 엄정한 필치에서 한나라를 세운 것은 지체 높은 황제, 제후만이 아니라 한 명 한 명의 사람들이다.

초한 전쟁이 배출한 소하, 장량, 한신 등의 영웅호걸이 개국 공신의 시대를 펼쳐 간다. 전쟁의 시대가 끝나고 황제와 제후들이 공존하는 시기를 거쳐 제국의 번성기에 접어들면 문관이 우세해져 평민 출신의 승상이 나오고, 황권 강화에 방해가 되는 호족들을 법의 이름으로 처단하는 순리(循吏)도 대거 출현한다. 또 수많은 무인이 영토 확장에 공을 세우고, 외척 권세가들이 득세하여 제국을 흔들다가 마침내 왕망이 세운 신나라에 권력을 넘기게 된다. 『한서 열전』에는 이 모든 과정이 수백 명의 사적을 통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유생, 문학가, 음악가, 협객, 상인이 등장하며, 이들이 남긴 상소문과 문학 작품까지 고스란히 수록되어 있다.

미신과 귀신을 믿었으며 사력 구제가 횡행하던 고대에 하늘의 뜻과 인간의 일이 감응한다는 천인감응(天人感應)의 신유학이 수립되고, 유교 경전에서 추출한 통치 이념과 각종 의례·의식, 도덕규범이 확립된다. 평민 출신 유방의 성공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능력이 중시되는 관료제와 문인의 개성이 부각되는 선비 문화로 이어진다. 요컨대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인간이라는 고대인의 자각이 여기에 그대로 담겨 있다.

『한서』는 누가 집필했는가?
사마천의 후세 반고가 역사가의 가업을 이루기까지
반표, 반고, 반소, 마속의 손을 거쳐 탄생한 『한서』


옛날에 글 잘 쓰는 학생이 살았다. 열여섯 살 나이로 수도의 큰 학교에 입학한 학생은 암기보다 요점 파악을 잘하는 편이었다. 한 사람만을 따르지 않았고, 여러 스승의 강의를 듣기 좋아했다. 이십 대 초반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학비도 부족했고 큰아들로서 집안을 돌봐야 했기에 학생은 졸업장을 뒤로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좌절할 뻔했으나, 깊은 사색 끝에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 나갈 것을 다짐했다. 취직에 실패한 어느 날, 그는 아버지가 남긴 일을 이어서 하기 시작했다. 사마천 『사기』의 후속편을 쓰는 일이었다. 이로부터 반고는 평생 동안 한나라의 역사 집필에 매달리게 된다.

이것이 『한서』의 시작이다. 61세의 나이로 반고가 죽자 황제는 『한서』의 마무리 작업을 반고의 여동생 반소에게 맡겼다. 역시 어려서부터 글을 잘했던 반소는 40대 후반에 가업을 물려받아, 「천문지」와 표 등 남은 골치 아픈 부분을 거의 다 썼다. 어려운 대목은 소문난 학자인 마융과 함께 읽었고, 마융의 형제 마속이 집필을 보좌했다. 이렇게 40여 년에 걸쳐 반표, 반고, 반소, 마속의 손을 거쳐 총 100편 120권의 『한서』가 세상에 나왔다.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 일이다.

사마천보다 150여 년 뒤에 태어난 반고는 사마천이 ‘근면했다’고 인정하면서도 『사기』의 관점은 ‘편벽되었다’고 지적했다. 반고는 한창 『사기 후전』을 집필하던 중에 이웃의 고발을 당한 적이 있다. 나라의 역사는 조정에서 집필해야 마땅한데 혼자 마음대로 쓰다니 불경하다는 것이었다. 반고가 옥에 갇혔을 때 반고의 동생이자 반소의 오빠인 반초가 나섰다. 반고는 한나라의 영광을 위해 역사를 집필하는 것이라는 반초의 상소에 황제는 그제야 반고의 능력을 알아보고 황궁으로 불러온다. 개인의 저작인 『사기 후전』이 국가사업이자 사상 최초의 국정 교과서인 『한서』가 된 순간이다. 이로써 사마천의 풍자와 낭만의 자리를 검증된 사실과 사료가 채우게 되었으니, 『사기』를 읽은 독자는 『한서』를 통해 중국을 이해하는 관점을 확장하면서 종합적인 시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소동파에서 이덕무까지,
동양의 문장가들이 늘 곁에 둔 고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직후 읽은 책이자
정조가 애독한 정치의 교과서, 『한서 열전』


열전이란 인물의 전기를 줄줄이 나열했다는 뜻이다. 첫머리의 백이와 숙제 이야기로 유명한 『사기 열전』에 이어 『한서 열전』은 사마천의 전기도 수록하고 있다. 사마천이 궁형을 당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가 몇 번이나 울음을 삼키면서 치욕을 견디고 살아남기로 결심했는지를 적은 편지글이 바로 반고의 편집을 거쳐 『한서 열전』에 보존되었다. 사마천에게 형벌을 내린 바 있는 서슬 퍼런 무제 앞에서 온갖 농담을 하고, 술에 취해 난리를 치고도 총애받은 동방삭 또한 『한서 열전』에 등장한다.

‘실사구시(實事求是)’,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최초로 쓰인 책이 『한서 열전』이다. 실사구시는 경제의 아들이자 무제의 이복 형제였던 하간헌왕 유덕이 사물의 실제 상태와 상황을 살펴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 애썼던 태도를 말한다. 학문을 숭상하고 옛것을 좋아했던 유덕은 진시황의 분서를 피해 민간에서 소장 중인 정본을 실사구시 정신으로 발굴해 냄으로써 고문 경전의 바람을 일으켰다. 한편 명장 조충국 장군은 변경을 위협하는 흉노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서 70세 나이에 몸소 국경으로 달려갔다. ‘듣기만 하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것’이 확실하니, 한나라 병사들과 유목 부족들의 사정을 파악한 노장은 조정 사람들이 주장하는 전쟁을 피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처럼 숱한 역사 인물의 생생한 이야기가 담긴 『한서』가 나오자 당대 사람들은 무척 소중하게 여겼다고 한다. 당나라와 송나라 사람들은 특히 열심히 읽었다. 구절구절을 안주로 삼아서 술을 마시다가 밤을 새고, 왔다 갔다 하는 이동 시간이 아까워서 소 등에 타서도 읽었다. 천재 시인 소동파는 유별나게 『한서』를 사랑해서 전체 100편을 최소 세 번 베껴 썼으며 줄줄 외우고 다녔다고 전한다.

조선 사람들도『한서』를 애독했다. 고려 사람이면서 첫 번째 조선 사람이 된 태조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직후에 『한서 열전』 중에서도 「곽광전」을 읽었다. 권신이냐 충신이냐로 늘 토론에 올랐던 대장군 곽광을 생각하면서, 이성계는 고려 우왕을 폐위시키기로 결심했다. 가장 유명한 조선의 『한서』 독자는 정조다. 『사기』와 『한서』에서 명편을 뽑은 『어정사기영선(御定史記英選)』을 간행해 사고에 두고 학업 성적이 뛰어난 선비들에게 하사하면서 읽기를 권했다. 그 자신은 이 책을 정치학 교과서로 삼았을 뿐 아니라 힘 있고 명료한 글을 쓰기 위한 문장 교본으로도 삼았다.

『한서 열전』은 이렇게 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위상을 가진다. 한부 사대가의 한 사람이었던 반고는 양웅, 가의, 사마상여 등 한나라의 위대한 문인들을 기리며 대표작 20여 편을 수록했다. 덕분에 2000년 전의 문학 작품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조선 후기의 문장가 이덕무는 스무 살 때의 어느 추운 밤, 얼어 죽지 않으려 『한서』 한 질을 덮고 잔 이야기를 남겼다. 섣달 칼바람을 견디다 못해 잠자리 곁 『한서』를 이불 위에 펼쳐 덮고 추위를 이긴 것인데, 분량이 제법 많으면서도 늘 간서치(看書癡) 신변 가까이 있었던 『한서』의 위용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오늘날의 독자도 이 책에서 역사의 교훈, 문장의 모범에서 긴 밤을 보내는 재미있는 이야기와 삶의 온기까지 각자 필요한 내용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