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문학의 이해 (책소개)/1.서양고전문학

이방인 (알베르 까뮈)

동방박사님 2022. 2. 14.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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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
카뮈를 배반한 『이방인』의 기존 번역들


44세의 알베르 카뮈에게 노벨문학상(1957년)을 안긴 소설 『이방인』. 그동안 세계 각국의 언어로 숱하게 번역된 이 전설적 소설에 또 하나의 번역본이 필요할까? 필요할 뿐 아니라, 기존의 한글 번역들이 『이방인』의 위대한 가치를 뭉개고 있는 현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게 번역가 이정서 씨의 판단이다. 『이방인』을 둘러싸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카뮈는 두 문장으로 요약한 자신만의 역설적이고 독창적인 사유를 작품 구석구석, 캐릭터 하나하나에까지 심고 끝까지 몰고 나갔다. 지극히 민감하고 간결한 문체에 담긴 카뮈의 의도는 우리 독자들에게 제대로 전달돼 왔던 것인가? 독자들은 과연 카뮈의 『이방인』을 제대로 읽은 것인가?

『이방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뫼르소의 이야기다. 뫼르소만의 독특한 캐릭터가 소설 전반을 휘어잡는다. 그렇다면 뫼르소는 어떤 인물일까? 어떤 거짓말도 거부하는, 사회와 법정이 요구하는 ‘뉘우침’조차 받아들일 수 없는, 그래서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마는 뫼르소의 캐릭터는 우리 독자들에게 제대로 이해가 된 걸까? 전혀 새롭기 때문에 낯선, 그러나 카뮈의 사유와 문체를 정교하게 살린 또 하나의 『이방인』 번역이 나와야 했던 이유다.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은 오역과 왜곡의 근본원인이 최대한 원문 그대로를 직역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는 인식하에, 구두점 하나까지 살리는 정확하고 바른 번역을 통해 원전의 표면적인 의미를 물론 감추어진 맥락과 저자의 의도까지 그대로 전달하고자 하는 새로운 시리즈이다. 이상으로만 취급되고 현실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받아온 직역을 통해 명저의 가치와 내용을 정확히 드러내고, 독자들은 원어민의 독서에 뒤지지 않는 고전 독서의 즐거움을 직업 경험하게 될 것이다.

 

목차

이방인
역자 해설 : 〈이방인〉에 대한 여전한 오해
작가 소개

저자 소개

저 : 알베르 까뮈 (Albert Camus)
 
그 모든 것에 항거하며 인간의 부조리와 자유로운 인생을 깊이 고민한 작가이자 철학자. 1913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몽드비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알사스 출신의 농업 노동자였던 아버지가 1차 세계대전 중 전사하고, 청각 장애인 어머니와 할머니와 함께 가난 속에서 자란 카뮈는 유년 시절의 기억과 가난, 알제리의 빛나는 자연과 알제 서민가의 일상은 카뮈 작품의 뿌리에 내밀하게 엉기어 있다. ...

역 : 이정서

 
소설가, 번역가, 출판인 혹은 편집자. 그의 이력은 다소 독특하다. 가명(이환)으로 소설을 쓰다가, 그 가명과는 또 다른 ‘이정서’라는 이름으로 번역을 시작했고, 뒤늦게 그것이 출판사 대표가 자신을 숨기기 위해서인 게 아니냐는 지적을 받고, 아예 그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소설과 번역, 그리고 편저, 세 분야에서 휘두르는 그의 펜은 거침없다. 2014년 기본 알베르 카뮈 『이방인』의 오역...
 

책 속으로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 한 통을 받았다. ‘모친 사망. 내일 장례식. 삼가 애도함.’ 그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아마 어제였을 것이다.
--- p.16

그때 갑자기 가로등이 켜지며, 밤하늘에 가장 먼저 떠오른 별들이 흐릿해졌다. 그처럼 온갖 사람들과 빛이 가득한 거리를 바라보고 있자니 나는 눈이 피로해졌다. 젖은 보도블록은 가로등 불빛을 받아 빛났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전차들이 들어올 때 비치는 빛이 머리칼이나 웃음 띤 얼굴, 은팔찌 위에서 바스러졌다. 이윽고 전차들이 뜸해지고 깜깜한 어둠이 어느새 나무들과 가로등 위로 내려앉으면서 거리엔 차츰 인적이 끊기고 첫 번째 고양이가 천천히 다시 한적해진 길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 p.42

시뻘건 폭발은 그대로였다. 모래 위로, 바다는 아주 빠르게 부딪치며 헐떡였고 잔파도들이 숨 가쁘게 밀려왔다. 나는 천천히 바위를 향해 걸었는데 햇볕에 이마가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었다. 열기 전체가 나를 짓누르며 내 걸음을 막아서는 것 같았다. 얼굴을 때리는 뜨거운 숨결을 느낄 때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바지 주머니 속의 주먹을 움켜쥐며, 태양과 태양이 쏟아붓는 그 영문 모를 취기를 이겨 내느라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흰 조개껍데기나 깨진 유리 조각, 모래에서 발하는 모든 빛의 칼날로 내 뺨은 긴장했다. 나는 오랫동안 걸었다.
--- p.83
 

출판사 리뷰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

전세계 101개 국가에서 번역되어 수천만 부가 팔린 우리 시대 최고의 소설
왜, 우리에겐 어려웠던 것일까? 그것은 번역 때문이었다!

뫼르소는 왜 사형선고를 받아야 했나?
카뮈를 배반한 『이방인』의 기존 번역들


44세의 알베르 카뮈에게 노벨문학상(1957년)을 안긴 소설 『이방인』. 그동안 세계 각국의 언어로 숱하게 번역된 이 전설적 소설에 또 하나의 번역본이 필요할까? 필요할 뿐 아니라, 기존의 한글 번역들이 『이방인』의 위대한 가치를 뭉개고 있는 현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게 번역가 이정서 씨의 판단이다. 『이방인』을 둘러싸고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나는 단지, 이 책의 주인공이 그 손쉬운 일(jeu)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선고 받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_카뮈, 영어판 『이방인』 서문

자신의 작품을 요약해 달라는 요청에 대한 카뮈의 답이다. 영어판 『이방인』의 서문으로 카뮈가 작성한 글이다. 카뮈는 두 문장으로 요약한 자신만의 역설적이고 독창적인 사유를 작품 구석구석, 캐릭터 하나하나에까지 심고 끝까지 몰고 나갔다. 지극히 민감하고 간결한 문체에 담긴 카뮈의 의도는 우리 독자들에게 제대로 전달돼 왔던 것인가? 독자들은 과연 카뮈의 『이방인』을 제대로 읽은 것인가?


번역가들이 ‘창조’해 놓은 『이방인』
오역과 의역이 소설 『이방인』을 난해하게 만들었다


『이방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뫼르소의 이야기다. 뫼르소만의 독특한 캐릭터가 소설 전반을 휘어잡는다. 그렇다면 뫼르소는 어떤 인물일까? 카뮈는 이례적으로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에 대해 상세한 해설을 내놓는다.

“… 그는 거짓말을 거부한다. 거짓말은 단지 없는 말을 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것은 또한, 무엇보다, 실제보다 더 말해지는 것이고, 인간의 마음에 주목하면서, 사람들의 느낌보다 더 말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단순한 삶을 위해 매일 하는 것이다. 뫼르소는, 외형적인 것과는 반대로, 단순한 삶을 원하지 않는다. 그는 실재하는 것을 말하고, 그의 느낌을 숨기기를 거부함으로써 즉각적으로 사회는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를 들어, 그가 그의 죄를 관례에 따라, 뉘우치길 요청한다. 그는 이 점에 대해 진정한 후회보다 더 많은 곤란을 겪는 것으로 답한다. 그리고 이 차이는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다.”
_카뮈, 영어판 『이방인』 서문

어떤 거짓말도 거부하는, 사회와 법정이 요구하는 ‘뉘우침’조차 받아들일 수 없는, 그래서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마는 뫼르소의 캐릭터는 우리 독자들에게 제대로 이해가 된 걸까? 카뮈는 미국의 독자들이 뫼르소를 잘 이해하지 못할까 봐 염려해 이런 글을 남겼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독자뿐만 아니라, 번역자들조차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오역투성이 『이방인』을 ‘창조’해 냈고, 그게 ‘정석’으로 굳어졌다.


영미권의 시각에 짜맞춰진 한글 번역의 문제

뫼르소와 작품 『이방인』에 대한 우리 번역자들의 오해와 오해를 덮기 위해 불가피했을 의역들. 이런 문제는 어디서 발생한 것일까? 역자 이정서는 “혹시 우리 학자들이 영미권 학자들의 주장을 여과 없이 받아들인 때문은 아닐까 의심해 본다”고 말한다. 언어들의 차별성을 무시하고, 영미권의 시각으로 작품의 내용을 이해하고 짜맞추다 보니 지금의 결과가 빚어진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불어판이나 영어판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심대한 착각을 하고 있다. 그건 전문가들조차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어떤 이는 원본의 난해한 문구를 만나면 ‘영어로는 이렇게 되어 있다’며 그 기준을 삼으려 할 정도이다. 그러나 영어로는 절대 불어 작품을 제대로 ‘직역’할 수 없다. 기본적인 이유의 하나가 ‘존대어’ 때문이다. 불어에는 있고 영어에는 없는 존대어로 인해, 불어 문학작품에서 특별히 존대를 하거나, 반대로 반말로 표현한 것을 영어로는 똑같은 맥락으로 표현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_이정서, 『이방인』 해설


영어판 『이방인』의 혼란과 카뮈 문체의 실종

사실은 『이방인』의 그 유명한 첫 문장 ‘Aujourd’hui, maman est morte.’부터 우리 번역은 잘못되어 있다. 우리는 문장 속 ‘maman’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만 신경 쓴 나머지 ‘엄마가 죽었다’로 해야 할지 ‘엄마가 돌아가셨다’로 해야 할지에 대해서만 논의했다. 미국이 그랬다.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번역으로 받아들여지는 매튜 워드(Matthew Ward)의 『The Stranger』의 첫 문장이, Maman died today. 이다.

그러나 사실 이 문장에서 더 중요한 대목은 ‘오늘’ 다음에 오는 쉼표다.
영어와 달리 우리말과 불어는 저 쉼표가 차지하는 의미 또한 큰 것이다.
따라서 바르게 번역하면
‘오늘, 엄마가 죽었다’가 되는 것이다.

단순한 첫 문장의 오역은 작품 전체를 관통했다. 출간 직전, 프랑스 출판물을 담당했던 독일인 게르하르트 헬러가 “원고를 받은 즉시 읽기 시작했는데, 새벽 4시까지 손에서 뗄 수 없었다”고 했던 카뮈의 『이방인』이 난해하고 지루한 소설이 된 것은 그러한 오역 때문이다. 한 문장의 오역은, 카뮈가 명쾌하게 정리해 준 작품의 핵심과 뫼르소의 캐릭터에 전혀 다가가지 못한 채, 20세기 최고의 고전 중 하나인 『이방인』을 수십 년간 미궁에 빠뜨렸던 것이다. 피해는 고스란히 독자들의 몫이었다.
전혀 새롭기 때문에 낯선, 그러나 카뮈의 사유와 문체를 정교하게 살린 또 하나의 『이방인』 번역이 나와야 했던 이유다.


원전으로 읽는 U(움라우트)
세계문학을 펴내며


번역은 오묘한 세계다. 단어 하나의 뜻만 달라져도 작품 전체의 의미나 가치가 달라진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 번역이어서 흔히 정답도 없고 원칙도 없다고 한다. 우리말과 서양의 언어는 특히 문자의 구조나 존칭법 등이 달라서 원문 그대로의 직역은 불가능하고 의역만이 가능할 뿐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그릇된 인식의 결과 지난 100년의 우리 번역문학은 원전의 가치에서 멀러지고 본래의 의미와 맛을 잃어버리게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우리 독자들은 세계적인 고전이라고 이름난 작품들을 읽고 나서도 왜 그 작품이 명저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내용을 곡해하는 경우마저 비일비재했다.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은 이런 오역과 왜곡의 근본원인이 최대한 원문 그대로를 직역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는 인식하에, 구두점 하나까지 살리는 정확하고 바른 번역을 통해 원전의 표면적인 의미를 물론 감추어진 맥락과 저자의 의도까지 그대로 전달하고자 한다. 이상으로만 취급되고 현실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받아온 직역을 통해 명저의 가치와 내용을 정확히 드러내고, 독자들은 원어민의 독서에 뒤지지 않는 고전 독서의 즐거움을 직업 경험하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

* 원전으로 읽는 U(움라우트) 세계문학의 U는
독일어 Ubersetzung(번역)의 첫 글자를 형상화한 새움출판사 세계문학의 새 브랜드 로고입니다.


역자의 말

번역, 그후


역시 카뮈다.
오랜만에 다시 봐도 가히 압도적이다. 볼 때마다 새롭게 보이는 것도 신기하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내 자신의 이야기인 양 생생하기만 하다.

2014년 기존 번역의 오역을 지적하고 어느새 8년이 흘렀다. 그 사이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오역에 대한 내 지적을 두고 당시 출판사 대표였던 내가 ‘자기 책을 팔아먹기 위해 노이즈 마
케팅을 펼친 것’이라느니, 우리 시대 번역의 대가인 ‘어른’을 욕보인 부도덕한 행위라느니, 누군가는 프랑스 현지의 카뮈 전문가에게 문의했더니 엉터리라 했다고(우리말 번역의 잘잘못을 프랑스인에게 묻는다고?) 페북 화면을 캡쳐해 올리기도 했다. 물론 처음한 내 번역에 부족함도 많았을 테다. 그러나 번역에 대한 당시까지의 우리 인식(번역은 의역이 아니면 안 된다는 인식 말이다)이 딱 거기까지였던 것 같다.
그리고 8년이 지난 2022년 오늘, 난무했던 인신공격성 글은 지금도 여전히 SNS 속을 유령처럼 떠돌고 있고, 해당 역자는 조용히 개정판을 내고(언론 기사로 알았다) 나 역시 그러했지만,
그 사이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알 길은 없다. 다만 여전히 최고의 번역처럼 떠받드는 ‘그분’의 책에 달리는 독자 리뷰들을 보면 이 책에 대한 오해는 여전한 듯하다(그 오해는 뒤에 ‘해설’로 정리해 두었다).
물론 나 역시 다시 볼 때마다 그전에 몰랐던 부분, 틀렸던 부분, 서툴렀던 부분이 매번 새롭게 보이곤 하니(이 책은 유독 더), 바른 번역, 완벽한 번역을 한다는 것이 결코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또한 깊이 절감하고 있기도 하다.

출판사에서 앞선 책(보급판) 재쇄를 찍어야 한다고 봐달라고 했을 때, 불현듯 깨달은 오류가 있어 보류시켰던 게 지난해 초다. 매일매일의 재촉을 다른 일을 핑계 삼아 미루고 미루다 보
니 또 한 해를 넘겼고,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달려든 끝에, 마침내 이제야 다시 펴내게 되었다.

카뮈 〈이방인〉을 읽는 데 있어 반드시 기억해 둘 말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그는 거짓말을 거부한다…… 그래서 어떤 영웅적 태도도 취하지 않고, 진실을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서 〈이방인〉을 읽으면 크게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카뮈가 한 말이다.

앞서 〈이방인〉을 읽었다 해도 이 말이 가슴에 저절로 와 닿지 않았다면 그건 카뮈 〈이방인〉을 읽지 않은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2022. 1. 25. 이정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