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역사기억여행 (2010~) (여행지) 167

민주주의자 김근태

김근태의 생애 김근태는 1947년 2월 4일 경기도 부천시에서 태어났다. 1965년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1960년대 무렵에 학생운동을 주도하여 손학규, 조영래와 함께 "서울대 운동권 3 총사"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까지 각종 재야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수배와 투옥을 반복하였다. 전두환 정권시절이던 1985년 9월 39세에 민청학련 사건으로 23일간 경기도 경찰국의 고문 시술자 이근안 경감에게 고문받았다. 서울민사 지방법원 합의 41부 (재판장 고현철 부장판사)는 1990년 전민련 결성 사건과 관련하여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홍성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전 민청연 의장 김근태 (46)가 ' 1985년 9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치안본부 (현 경찰청)..

전태일 열사

전태일 全泰壹 전태일 全泰壹 (1948년 9월 28일 ~1970년 11월 3일) 은 대한민국 봉제노동자이자 노동운동가, 인권운동가이다. 1960년대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재봉사, 재단사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여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 청계천 피복공장에 취직하였다. 1965년에는 청계천내 삼일 회사 재봉사로 일하다가 강제로 해고된 여공을 돕다가 함께 해고되었다. 이후 한미사의 재단보조로 있다가 재단사가 사장과의 갈등으로 해고되자, 그가 재단사가 되었다. 1968년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어 1969년 7월부터 노동청을 방문,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개선과 위생환경 개선을 요구하였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1969년 6월 청계천 공장단지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조직..

민주열사 박종철

박종철 朴鐘哲 박종철 朴鐘哲 (1964년 4월1일 ~1987년 1월14일 부산출생) 은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가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이던 그는 제5공화국 말기인 1987년 고문으로 인해 사망했다. 1941년 4월1일 부산서구 아미동에서 태어났으며 부산혜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4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에 입학해 언어학과 하생회장으로 활동했다. 1986년 노학연대 투쟁에 활동하던중 1986년 4월1일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시위로 구속되었다가, 1986년 7월15일 징역 10개월 (집행유해 2년)을 선고 받고 출소했다. 박종철은 2001년 2월26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유족과 당시 학생운동 동지들은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 가묘를 만들어 그를 기리고 있..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

마석 모란공원 민족 민주열사 묘역 모란공원은 1966년 우리나라에서 사설묘지로 전국 최초로 조성되었다. 현재는 부지 100여 만평에 민족민주열사를 포함한 13,000기의 묘소가 안치되어 있다. 민족민주열사 묘역으로는 1969년 권재혁 선생을 시작으로 1970년에 전태일 열사가, 1971년에는 김진수 열사가, 1973년에는 최종길 열사가 모셔진 이후로 지금까지 민주화와 민중해방을 향한 삶을 살다 돌아가신 150여분의 열사들이 모여 계시다. 특히나 1986년에 전태일 정신을 따라 투쟁을 벌이다가 산화하신 박영진 열사를 전태일 열사가 계신 이곳에 모시기 위해 한 달야에 걸쳐 30여 명이 구속되는 강력한 장례투쟁을 벌였다. 이후 이 투쟁 소식이 전파되면서, 민중들의 참 삶과 해방을 위해 투쟁하다 돌아가신 노동자..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 박영효묘)

박영효 朴泳孝 박영효 朴泳孝 (1861년~1939년 양력 9월 21일) 조선말의 문신, 정치인, 사상가로 급진개화파이다. 철종의 부마로 고종의 친척 매제가 되며 금릉위상보국승록 대부에 올랐다. 갑신정변을 일으켰고 갑오개혁을 주도했으며 모두 실패해 도합 20여 년이 넘는 일본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1882년 도일 (渡日)중 배에서 고종의 명으로 제작된 '이응 준태 극기" 중 4괘(卦)의 좌. 우를 바꿔 재 도안했고 이것이 태극기의 원형이 됐다. 1884년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서재필, 서광범 등 동문 수학들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했다가, 청일 전쟁에 승리한 일본을 등에 업고 귀국해 다시 갑오개혁을 주도했다. 장장 13만 8천 자에 달하는 개혁 상소문을 올려 세상을 놀랬지만 호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