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역사와 공간의 역사
1890년 '주교관"으로 신축된 이 건물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의 서양식 벽돌 건축물 중 하나로, 1891년 4월 19일 뮈텔 (제8대 조선 대목구장) 대주교에 의해 축성된 이래 주교관 및 경리부 건물로 사용되며, 한국 천주교 내에서 사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이름 붙여진 사도회관이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라리보 주교(제9대 서울 대목구장) 노기 남대 주교 (제10대 서울대교구장)께서도 이곳에 집무를 보고 거주하였다. 교구의 업무 증가와 새 주교관의 필요성에 따라 새로운 주교관 (1927, 현 사회복지관)이 들어서고 사도회관은 성신 대학 의학부, 부제 학교, 가톨릭 출판사, 사회복지회관, 교육관 교구 사무처 및 관리국으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쓰임도 다양하게 변화하여 왔다. 그리고 2018년 '사도회관'은 "서울대교구 역사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게 되었다.
탁희성. 이승훈의 북경 세례
1991, 한국 천주교 순교자박물관 소장 / 이승훈이 이벽의 권유로 북경에 가서 예수회 선교사 그라몽(1736~1812) 신부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장면을 그렸다.
조선 천주교회의 탄생
조선의 통치 이념이었던 성리학은 18세 게 후반 사회 안팎으로 불어오는 변화의 바람을 담아내지 못했고, 이로 인하여 실학파라고 불리는 젊은 학자들은 새로운 사상을 연구하고 조선의 발전적 방향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당시 사행길을 오가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한역 서학서를 통해 중국에 전래된 천주교와 서양문물들을 접하면서, 서양의 학문뿐 아니라 천주교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서학을 연구하는 강학 모임이 생겨났고, 이 모임은 점차 천주교 신앙집회의 모습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 천주교회는 당시 조선사회가 직면해 있던 대내외적인 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으며, 수용 초기부터 신앙에 대한 주체적인 인식을 가지고, 교우들 스스로의 힘으로 교회를 발전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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