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천주교성지 (2016~) (여행)/1.서울시 (서울 대교구)

용산구 신계동 당고개 성지

동방박사님 2018. 12. 2.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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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고개 순교 성지

당고개 (堂峴 : 당현) 성지는 기해박해가 일어난 1839년 (현종 5년) 12월 27일과 28일 (음력) 이틀간 남녀 천주교 신자 10명이 순교한 곳이다. 당시 일반 신자는 서소문 밖, 사제는 새남터에서 처형되었는데, 설을 앞둔 상인들이 대목장에 방해되지 않도록 처형지를 서소문 밖에서 다른 곳으로 이전해 달라고 하여 한강 가로 조금 나아간 이곳 당고개에서 사형 집행되었다.

27일에는 박종원, 홍병주, 권진이, 이경이, 손소벽, 이인덕,그리고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이성 레 등 7명이, 다음날은 홍영주, 최영이, 이문우 3명이 순교하였다. 병오박해가 일어난 1846년  (헌종 12년) 9월 16일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가 새남터로 향하던 참수 길에 잠시 쉬어갔다. 이곳 순교자가 10명 중 9명은 1984년 5월 6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시성되었고, 어린 자식들 때문에 한때 마음이 약해져 배교했던 이성례 마리아는 오랜 기간 시복 시성에서 제외됐다가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 되었다.

한국 천주교회는 1986년 문배산 마루에 순교 기념비를 세워 성지를 조성하였으나 2008년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건립되면서 기념비는 철거되었고, 단지 정리가 끝난 2011년 신계 역사공원 안에 새롭게 들어섰다.

<당고개 순교성지>

"당고개" 성지는 9분의 성인과 '복녀" 이성례 (마리아)가 순교한 곳으로 1839년 기해박해를 장엄하게 끝맺은 거룩한 땅이다.

1839년 12월 27일 박종원 (아우그스티노), 홍병주(베드로), 손소벽(막달레나), 이성례(마리아), 이경이 (아가타), 이인덕(마리아), 권진이 (아가타) 등 일곱 분

1839년 12월 28일 홍영주 (바로오), 이문우 (요한), 최영이 (바르바라) 세분 

이순교 하였다.

하느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순교의 월게 관을 차지한 열 분 중 9명의 순교자는 1925년 시복, 1984년 시성 되었고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인 이성례(마리아)는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의해 시복 되었다.

 

 

당고개 순교성지

"당고개" 성지는 9분의 성인과 복자  이성례 마리아가 순교한 곳으로 1839년 기해박해를 장엄하게 끝맺은 거룩한 땅이다.

 당시 사형선고를 받은 교우들은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는데 설날 대목장을 앞두고 처형을 중지해 달라는 상인들의 요구에 당고개로 형장이 바뀌게 되어 12월 27일 박종원 (아우그스티노), 홍병주 (베드로), 손소벽 (막달레나), 이성례(마리아), 이경이 (아가타), 이인덕(마리아), 권진이(아가타)등 일곱 분이, 12월 28일 홍영주 (바오로), 이문우 (요한), 최영이 (바르바라)등 세 분이 순교하였다. 

하느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순교의 월계관을 차지한 10분 중 9명의 순교자는 1925년 시복, 1984년 시정됨으로써 서소문 (현 서소문 공원 내)과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영광의 땅이 되었다.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이며 어린 자식 때문에 배교하였다가 다시 신앙을 고백한 뒤 순교한 이성례 (마리아)는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 되었다.

기해 대박해 

기해박해는 신유박해애 비해 체포된 신자는 적었으나 전국적인 규모로 자행되었다. 이로 인해 선교사와 회장 등 교회 지도자들이 순교함으로써 한동안 교회는 침체에 빠지고 필사할 신자의 부족과 교회 서적 압수로 인해 구전으로 교리를 전수하게 되면서 교리 이해 부족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박해로 이내 더 넓은 지역에 천주교가 전파되고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신앙공동체는 잦은 이주로 인해 경제적으로 피폐해져 이전보다 더 가난한 서민층이 주를 이루었지만 신앙은 더 복음적으로, 교리는 더욱 실천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한국 천주교회사를 쓴 파리 외방선교회 달레 신부는 이 시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839년 박해의 결과는 조선 정부가 희망하던 것과 아주 딴판이었다. 신자들이 박해로 인해 목자들과 많은 회장을 잃은 것은 사실이지만,  천주교로서는 그것이 일시적인 상실에 지나지 않았다. 천국에 그렇게도 많은 새 순교자와 전구자를 가지게 되었다는 영신적 이점뿐만이 아니라 여러 해 포교를 하여도 얻지 못하였을 선전효과를 얻었다.영의정에서 옥졸의 심부름꾼에 이르기 까지, 서울을 비롯하여 아주 멀리 떨어진 지방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천주의 말씀이 폭풍에 날려 사방으로 흩어졌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이 번식력 있는 씨앗이 싹을 터서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조정의 적의는 줄지 않았다. 그러나 일반 여론은 그때 우리 증거자들이 모범으로 보여준 애덕, 정결, 인내, 성실 등 모든 덕ㄷ을 인정하였다.""(한국 천주교회사 중권 539~540쪽)

 

 

 

 

 

 

 

 

 

 

 

 

 

 

 

신계동의 역사

 서울역에서 한강철교에 이르는 일대의 지역, 즉 철로 좌우 양측 넓은 들의  원래 이름은 사촌리(莎村里)또는 사리(莎里)로서 한가의 적막한 모래벌판이었다. 홍수가 나며 남대문 근처까지 물이 들어왔으니 많은 인가 (人家)가 들어서지도 않았다, 1886년에 일본 육군성에서 발행한 한성 주변도를 보면 욱천(旭川)에서 이태원까지 넓은 들판이 모래땅으로 버려진 채 거의 전답으로도 이용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신계란 지명은 새로 생긴 동네라는 데 연유한다. 또한 공동묘지로도 사용되다가 1899년 용산선을 부설하면서 이전되었다. 

당고개의 역사 

원효로 2가 만초천 (蔓草川) 변에 위치한 당고 개는 한양도성 남부에 위치한 고개 중의 하나로 용산의 한 줄기인 문배산 (文培山, 일명, 文平山)이라고도 불렸으며 옛날 고갯마루에 당집이 있었다는 데서 "당고개"라는 명칭이 연유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처형장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1839년 천주교인들을 근절함으로 외세의 침입을 막으려는 의도로 전국에 걸쳐 일어난 기해 대박해의 마지막 처형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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