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중국.동아시아 이해 (책소개)/1.중국역사문화

마테오리치의 기억의 궁전

동방박사님 2022. 6. 1.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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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리치가 중국에 전한 서양문화의 구체적 실상을 설명하며, 동서문 화의 만남과 융합의 가능성을 논했고 전쟁과 평화를 서술했다. 리치의 눈을 통해서 서양과 중국의 무역을 설명했고, 중국의 일상생 활과 교통 및 산업을 살폈다. 그리스도교 윤리를 기준으로 하여 평가된 중국의 생활풍습을 밝혔다.

목차

1. 궁전 짓기
2. 첫번째 이미지: 두 명의 전사
3. 첫번째 그림: 파도에 빠진 사도
4. 두번째 이미지: 후이후이족
5. 두번째 그림: 엠마오로 가는 길
6. 세번째 이미지: 이익과 수확
7. 세번째 그림: 소돔의 남자들
8. 네번째 이미지: 네번째 그림
9. 궁전 안에서

저자 소개

저 : 조너선 D. 스펜스 (Jonathan D. Spence)
 
예일 대학 역사학과 석좌교수이며 현재 미국 중국사 학계를 대표하는 역사학자로서 중국관련 역사서들을 집필하고 있다. 역사와 문학을 결합한 그의 독특한 역사서술방식은 연구자와 일반 독자 모두에게 그만의 독특함으로 자리잡고 있다. 1936년 영국에서 태어나 윈체스터 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했고, 1959년 예일 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구겐하임 펠로우쉽, 맥아더 펠로우쉽 등을 수...
 
 
시모니더라는 귀족 시인이 화려한 파티에 참가했다가 자기가 자리를 잠시 비운 사이 강풍이 불어 집이 무너지면서 순식간에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이 깔려 죽었다. 시체는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든 상황에서 비상한 기억력을 가진 시모니더는 참가자들이 앉았던 자리를 기억해 내어 시체의 주인을 찾아낸다. 이후에 서양에는 기억술을 다루는 학문이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알려져 있는 마테오 리치 역시 이 기법을 교육받던 시절에 배웠다고 한다. 기억술이란 연상을 이용해 체계를 세워 많은 것을 기억하는 방법이다. 리치 역시 엄청난 기억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새로 번역된 조너선 D 스펜스의 책을 읽으며 나는 사실 마테오 리치나 중세의 기교 많은 이들이 갖고 있었을 재주의 비상함 보다는 중국에 대한 지식을 정리하고, 그곳을 완성된 구조물인 책으로 만들어내는 작자 스펜스의 재주에 경탄을 금하지 못했다. 돌아보니 올해 내에 내가 읽은 스펜스의 책만 해도 3권이다.

어학 시간에 그리 길지 않은 단문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내 기억력이 그리 나쁨을 탓하지 않는다. 인간은 어차피 망각을 필요로하는 존재니. 하지만 스펜스처럼 자신이 연구하는 학문 분야를 일관(一貫)하며 책을 써내는 이들을 보면 부러움을 느낀다. 특히 문학적인 능력이나 과학적인 분석능력까지 겸비한 이들을 보면 그 부러움은 더욱 커진다.

이번에 만난 스펜스의 책 '마테오...'은 이전의 책에 비해 시간도 한정되어 있고, 내가 그리 좋아하지 않는 중세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 손이 가지 않는 책이다. 하지만 단지 스펜스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녹녹치 않은 책을 들었다.

책은 스펜스 특유의 매끄러운 이야기체로 진행된다. 이야기의 중심은 마테오 리치가 생존했던 1550년대부터 1610년까지다. 마테오 리치는 이탈리아 태생이지만 포르투칼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고, 1582년 마카오로 중국에 들어와 북경에서 죽을 때까지 중국에서 생활했다.

스펜스는 이 시간대를 그대로 거슬러가서 이야기를 쓴다. 그가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은 마치 그 시대에 살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한다. 거기에 그는 간간히 리치가 보낸 편지들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다. 그러니 독자들은 더욱 스펜스의 말을 믿게된다. 특히 이 책 작업이 원초적으로 어려운 것은 배경이 400년 정도 앞이라는 것도 있지만 자료가 부실한 편인 중세의 유럽과 중국을 넘나들면서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스펜스가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던 배경에는 스펜스 자신의 역량도 있지만 그의 작업을 뒷받침해주는 자료의 도움이 충분했기 때문인 것 같다. 스펜스가 수많은 자료를 토대로 이 책의 궁전을 세웠다면 마테오 리치는 당시에 유럽에 소개됐던 '동반견문록'이나 우리에게 소개되어 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천주실의'의 저자이기도 하다. 사실 천주실의는 한국 사상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책이다. 이미 다산 정약용 등은 물론이고, 개화사상가들에게 이 책이 읽히고 영향을 주었으니 적지 않게 큰 책이다.

책을 읽고도 대강 밖에 이해할 수 없지만 기억술의 방식인 '기억의 궁전'은 많은 흥미를 일으킨다. 리치가 참석했던 진사(進士) 모임에서 글자를 암송하고, 거꾸로 기억하는 모습 등을 보여주었다는 것은 흥미를 끈다.(185p) 하지만 리치가 궁극적으로 생각한 것은 포교다. 서양문명에 대한 동경을 만들고, 그것을 종교적인 관심으로 이끌려한 것이다. 그의 노력은 정말 눈물겹다.

이 책의 체계는 리치가 지시해서 지필묵 제작자인 청다웨가 그린 '정씨묵원'의 그림과 '무(武)'자, '리(利의)'자 등의 글자 풀이에서 시작한다. 이야기는 마테오 리치가 만나는 것에 한정되지 않고, '소돔의 남자들'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궁극적으로 종교적인 가치관을 책에서 심으려고 노력한다. 로마에서 강력한 종교정치를 폈던 교황 바올로 4세의 죽음이후 벌어지는 혼란상과 중국에서 횡횡했던 동성애 등의 비판을 책은 담고 있다. 이런 메시지는 시간을 한정하지 않고, 작가의 사고를 보여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스펜스의 의도가 그렇고, 리치의 의도가 그렇듯 타락과 종교와의 관계는 그리 선명하지 못한 것 같다.

마테오 리치의 전기이자 비교문화서 같은 이 책은 국내에서도 각광을 받기 시작한 '아날학파'의 글쓰기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하지만 스펜스 특유의 힘으로 포장된 글쓰기다. 문제는 그를 받아들이기에 나의 사고와 리치의 시대가 너무 멀다는 것이다.
 

책 속으로

스펜스는 리치가 <기술>에서 이야기한 기억법, 곧 기억의 궁전을 지는 법을 제1장에서 설명한다. 이어 기억의 궁전에 세워두었던 무(武)·요(要)·이(利)·호(好)의 네 가지 한자 이미지와 <정씨묵원>이라는 책에 리치가 직접 골라 넣은 4점의 기독교 성화를 가지고 책의 나머지 8장을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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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리뷰

『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 들여다보기
지은이는 기억법, 곧 기억의 궁전을 짓는 법(1장)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기억의 궁전은 리치가 중국인에게 기억술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책인 『기법』(記法)에 기초해서 짓는다. 리치는 기억의 궁전을 지으면서 궁전 안 연회실의 네 모퉁이에 대표적인 네 개의 이미지를 세워두었다. 그것은 한자(漢字)로 武, 要, 利, 好이다. 다른 한편으로 지은이는 『정씨묵원』(程氏墨苑)이라는 책에 나오는 리치가 고른 4장의 그림을 리치의 삶을 재구성하는 또 하나의 이미지로 선택했다. 그것은 성서 속의 이야기를 묘사한 <바다에 빠진 사도> <엠마오로 가는 길> <소돔의 남자들> <성모자 성화>이다. 지은이는 이 네 개의 이미지와 네 장의 그림을 마치 슬라이드처럼 번갈아 보여주면서 리치라는 인물과 16세기 동서양이라는 대조적인 시공간을 입체적으로 결합시키고 있다.

2장 ‘두 명의 전사’는 ‘武’의 기억용 이미지다. 武자를 대각선 방향으로 나누면 창 ‘과’(戈)와 그칠 ‘지’(止)가 된다. 따라서 武는 전쟁과 평화를 모두 함축한 글자인 것이다. 그러면 왜 리치는 武를 생각했을까? 16세기의 서양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립, 이슬람 세력과의 대결 등으로 전쟁과 학살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동양에서는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켜 한, 중, 일 3국이 대 전란에 휩싸였다. 이런 혼란기일수록 평화에 대한 갈망도 클 수밖에 없다. 지은이는 리치가 창조한 ‘武’의 이미지에서 그것을 본 것이다.

3장에 나오는 ‘파도에 빠진 사도’ 그림은 험난한 해상여행을 암시한다. 여기서의 사도는 베드로이다. 당시 세계의 바다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양분하고 있었다. 제해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세력다툼의 역사와, 바다를 항해하는 이야기가 3장 전반부의 내용이다. 리치는 리스본에서 배를 타고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마카오까지 왔다. 그 여행은 마치 물에 빠진 사도 베드로처럼 믿음을 시험받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3장의 후반부는 중국의 내륙수로를 다룬다. 중국이 바다로 진출하지 않고 내륙수로, 곧 운하교통에 집중한 점을 리치의 눈을 통해 관찰하고, 운하여행이 바다여행 이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리치의 경험을 통해 실감나게 보여준다.

4장은 두번째 이미지 ‘후이후이’(回回)족이다. 후이후이족 여성은 ‘要’의 기억용 이미지다. 要를 위 아래로 나누면 ‘西女’, 곧 서쪽의 여인이 된다. 지은이는 이를 통해 리치의 눈에 비친 중국의 서양인, 서양의 문화, 서양의 종교를 이야기한다. 당시 중국 서역에는 이슬람 교도가 많이 살고 있었고,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 교도(景敎徒)와 심지어 유대교도까지 있었다. 리치는 이 서양의 3교가 유교, 불교, 도교가 뿌리를 내린 중국에서 큰 거부감 없이 수용되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동서양의 종교와 문화의 융합 가능성을 모색했다. 리치는 그리스도교와 가장 유사한 교의를 가진 중국의 종교로 유교를 주목하여 스스로 유학자의 옷을 입고, 유학자들과 친분을 맺었으며, 유학자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책을 쓰기도 했다. 이런 언행이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에 어긋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리치는 자신을 ‘기인’(畸人), 곧 ‘역설적인 사람’이라고 불렀다.

5장에서는 두번째 그림 <엠마오로 가는 길>을 통해 리치가 모든 고난을 감수하고, 마치 두 사도가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 엠마오로 갔듯이 이역만리 중국 땅에서 자신의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인생역정을 더듬어간다. 그런 점에서 5장은 압축된 리치의 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점을 두는 것은 단순한 연대기적 사실이 아니라, 과연 리치가 중국에 전한 서양의 문화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나 하는 점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리치가 예수회 대학에서 교육받은 내용을 아주 상세히 기술한다. 이것은 리치가 중국에 서양문화를 체계적으로 소개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또한 5장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에 그리스도교와 서양의 학문이 소개된 것도 리치의 저작을 통해서였던 만큼, 조선 후기의 서양인식이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는지 가늠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6장은 ‘利’의 장이다. ‘利’를 좌우로 나누면 곡식을 뜻하는 ‘禾’와 칼을 뜻하는 ‘刀’가 된다. 그래서 리치는 곡식을 수확하는 농부를 기억이미지로 삼았다. 그런 점에서 ‘利’는 경제행위와 직결된다. 6장은 바로 16세기의 경제 이야기이다. 앞부분에서는 무역, 구체적으로 비단무역이나 은의 유통 같은 당시의 세계경제가 하나의 배경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문제, 리치는 어떻게 먹고 살았는가라는 의식주의 문제를 다룬다.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 중국에 온 리치이지만 그도 종교와 경제는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시간이 흐르면서 아주 유능한 재정관리자로 변해 간다. 리치는 전교 초기의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적절히 기부금을 받고, 재정을 잘 운용하여 경제적으로 풍족한 모습을 중국인에게 보여주었다. 또 리치는 중국의 관리나 지식인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 대단히 효과적임을 알고 많은 선물을 했으며, 황제에게도 많은 선물을 바치고 마침내 베이징에 정착할 수 있었다. 한편 돈벌이를 하지 않는 리치가 경제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일부 중국인들은 리치가 전교사가 아니라 은을 만드는 연금술사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는 리치의 양면적인 모습, 곧 종교인의 모습과 실리적인 인간의 모습을 다 보여주는 일화이다.

7장에는 <소돔의 남자들>이란 그림이 등장한다. 타락한 도시 소돔이 멸망하는 모습을 상징하는 이 그림을 통해 리치는 부도덕한 행위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중국인에게 경고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부도덕한 행위란 성(性)적 문란을 의미한다. 지은이는 16세기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만연했던 매춘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특히 그리스도교에서 죄악시했던 ‘동성애’에 대한 내용은 독자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로 충격적이다. 재미있는 예를 들면, 사내 ‘男’자에서 힘 ‘力’자 대신 계집 ‘女’를 붙인 ‘기’(?자가 있다. 이 ö? 저장(浙江) 지방에서 만들어진 한자로 동성애, 비역을 뜻한다. 저장성은 16세기 이전부터 동성애가 가장 많았던 지방이었다고 한다.

8장에선 네번째 이미지 아이를 안은 여자, 곧 ‘好’와 네번째 그림인 아기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를 그린 그림, 곧 성모자 성화가 제시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리치 자신이 성모신앙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중국인이 ‘십자고상’(十字苦像)보다 성모 성화나 성모자 성화에 덜 거부감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 밖에 리치의 불교 비판이나 명 말의 사상가 리즈(李贄)와의 만남, 그리고 리즈의 죽음을 다룬 부분은 아주 흥미롭다. 이 책은 리치가 자신이 세운 기억의 궁전의 문을 닫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그러나 그 기억의 궁전은 오랫동안 독자들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남겨 줄 것이다. 리치가 세계사에 큰 족적을 남겼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