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한국근대사 연구 (책소개)/6.근대한반도전쟁

신미양요

동방박사님 2022. 6. 13.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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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신미양요는 당시 국제 관계 속에서 조선이 직면했던 상황을 잘 보여준다. 본서는 당시 국제 정세를 중심으로 신미양요의 전개 과정을 새로운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하였다.

목차

1장 조선의 정세
2장 제너럴 셔먼호 사건
3장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 사건 조사
4장 미국의 국내외 상황
5장 병인양요 이후 조선의 군사 전략 변화
6장 미국의 대조선 포함외교 배경
7장 미국의 타이완 원정과 르장드르의 협상
8장 미국의 전쟁 준비
9장 조선의 군사 대비
10장 어디서 온 누구요
11장 미국의 강화도 침공 과정
12장 미국의 대조선 포함외교 특성

저자 소개

저 : 신효승
 
전쟁사를 중심으로 격동의 한국 근대사를 풀어내는 역사학자다.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논문 「20세기 초 국제 정세 변동과 한인 무장 독립운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예비역 육군 소령으로 작전을 지휘한 경험을 바탕으로 심도 있고 폭넓게 전쟁을 연구해왔다. 현재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있으면서 다양한 저술 활동과 강연을 통해 한국 근대사를 해석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
 

출판사 리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그 연원을 살펴보는 것은 역사학의 가장 중요한 질문 중에 하나입니다. 역사에서 산업화, 민주화 등에 방점을 찍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현재 사회의 주요 특징을 산업화와 민주화에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세계화는 현대 사회의 주요 특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신미양요는 조선 역시 국제 질서 속에 편입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말 조선에서는 ‘The United States of America’를 ‘미국’(美國)이라 불렀습니다. ‘미국’이라는 명칭은 중국에서 ‘America’를 음역한 ‘미리견’(美利堅)에서 유래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역사적 유래를 좀더 살펴보면 1602년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서 간행한 ‘곤여만국전도’(坤輿万國全圖)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여기서 마테오 리치는 아메리카 대륙을 ‘아묵리가’(亞墨利加)라고 표기했습니다. ‘곤여만국전도’의 영향은 이후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 1614)과 김정호의 ‘지구전후도’(地球前後圖, 1834)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묵리가와 미리견은 음절상 네 음절과 세 음절로 차이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알려진 바로는, 듣기에 따라 ‘아메리카’의 경우 네 음절보다 ‘아’를 생략한 ‘메리카’의 세 음절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경향 덕분에 ‘아’에 해당하는 한자 표기를 생략하고 ‘미리가’(美理哥, 해국도지), ‘미리견 (米利堅, 영환지략) 등으로 표기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식적인 미국의 한자 표기는 1844년 청과 미국이 맺은 최초의 조약인 왕샤조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왕샤조약에서 청은 미국을 ‘아미리가합중국’(亞美理駕合衆國)이라고 지칭했다. 이후 미국은 조선에서도 동일한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신미양요 당시 미함대 사령관은 조선 관헌의 “어디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아미리가합중국”에서 왔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리고 조선 정부에 보내는 문서에도 자신들의 국명을 ‘아미리가합중국’이라고 표기했습니다.

이처럼 신미양요 당시 상대에 대한 공식적인 호칭조차 아직 정해진 것이 없었을 정도로 당시 조선은 미국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미양요 당시 방비의 한 축을 담당했던 수원 유수 신석희조차 “우리 역사에 미리견이라는 나라가 없었다”라고 하면서, “그들이 극서(지구 반대편)에서 방비가 철통같은” 조선에 배를 끌고 왔다고 회고했습니다.

다만 조선은 이들에 대해 어느 정도 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병인양요 이후 서양 선박에 대해 꾸준히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특히 손돌목을 중심으로 염하를 봉쇄할 수 있는 계획까지 마련하고, 봉화를 이용한 경보 체계까지 구축하는 등 나름의 대책을 강구했습니다. 실제 미 군함이 접근했을 때 이들의 움직임은 바로 서울에 보고됐습니다. 미 군함이 덕진진 앞에 있는 경고까지 무시했을 때는 이미 손돌목 주변 포대에 조선군이 배치된 상태였습니다. 병인양요 때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 역시 대조선 원정을 준비하면서 조선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여 고심했습니다. 당시 미국 언론에는 조선의 야만성을 매우 강조하는 기사가 이어졌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기사가 제대로 된 정보를 토대로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이를테면 뉴욕 이브닝 포스트지는 조선은 난파한 선원을 노예로 만들거나 살해하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습니다(The New York Evening Post, 1871. 6. 17). 그 외에도 출처 불명의 다양한 정보가 범람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정보 속에서 미국은 대조선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그나마 5년 전 벌어진 조선과 프랑스 간의 전쟁에서 프랑스군이 남겨 놓은 정보를 일부 획득하여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전쟁을 준비하게 부족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전쟁을 정치의 연장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협상할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보다 많은 정보가 필요했습니다. 최소한 조선의 위정자와 그들이 처해있는 정치적 상황 정도는 파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미국 언론의 기사를 토대로 살펴보면 당시 미국은 대원군과 고종의 관계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전쟁을 시작하고자 했습니다.

이때 일본은 미국 군함에 자국 관리를 태우기 위해 미국과 교섭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미국 군함에 관리를 태워 미국과 조선 간의 전쟁에서 정보를 수집하고자 했습니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조선이 패배할 것으로 예상하고, 조선이 패배하면 이를 중재한다는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습니다. 이때 중재 조건으로 조선에 국교 수립을 제안한다는 심산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예상과 달리 신미양요는 조선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미국은 전쟁의 성과도 얻지 못한 채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 역시 원하던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습니다. 자국 관리를 미국 군함에 태울 수도 없었고, 기대하던 조선의 중재 요청 역시 없었습니다. 다만 일본은 미군의 패배에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국제 관계에서 상대에 대한 정보의 중요성을 깨닫고, 조선에 많은 밀정을 잠입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신미양요는 당시 국제 관계 속에서 조선이 직면했던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여기서는 당시 국제 정세를 중심으로 신미양요의 전개 과정을 새로운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