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한국역사의 이해 (책소개)/4.한국학연구

광개토대왕 왕릉비

동방박사님 2022. 8. 1.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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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는 고구려 19대왕 광개토대왕의 재위 22년간(391~412)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그 아들 장수왕(長壽王)이 즉위 2년(414)에 국내성(中國 吉林省 集安縣 太王鄕 太王村)에 세운 거대한 기념비이다. 이 비는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와 고구려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것으로 그 역사적 가치는 가히 엄청나다 할 것이다.
특히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한 비문의 내용은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글자들이 많이 떨어져 나가고 흐려져 판독에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다. 게다가 일본 제국주의가 비문의 일부 내용을 조작, 왜곡하는 바람에 역사적 사실들이 엉뚱한 방향으로 연구되어 왔다. 그 해독은 대왕릉비가 1880년 무렵 재발견된 이래 100년 넘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심각한 문제로 남아있다.
특히 깊은 역사적 인식과 연구가 요구되는 비문인데 지금도 일본은 왜곡된 역사 교과서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 개탄을 금할 수 없다. 모두가 일제가 저질러 놓은 조작, 왜곡의 악영향이 아닌가 한다.
2014년 9월 29일(음력)은 광개토대왕의 능비가 건립된 지 1600주년을 맞이하는 날이었다. 이를 기념하여 양력 9월 29일에 “광개토대왕릉비 건립 160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개최하였고,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한 국민적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28년 전에 출간되었던 「광개토대왕릉비 신연구」를 개정하여 「광개토대왕릉비」라는 제목으로 재출간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 건립 1600주년을 기해 출간된 한글본 새 책이 광개토대왕과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한 일반의 이해와 관심을 배가시키는 데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목차

머리글
개정증보판 간행사

[제1부]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와 문자고석(文字考釋)

제1장 광개토대왕릉비의 건립과 재발견
-제1절 개설
-제2절 광개토대왕릉비에 관한 전설
-제3절 광개토대왕릉비의 재발견
-제4절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의 초전(初傳)

제2장 광개토대왕릉비문의 특징
-제1절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시대배경과 그 상관문제
-제2절 광개토대왕릉비 문자의 필획과 그 운용법
-제3절 광개토대왕릉비 문자의 구조
-제4절 광개토대왕릉비의 세계성
-제5절 광개토대왕릉비의 예술적 가치
-제6절 광개토대왕릉비의 역사적 가치
-제7절 소결(小結)

제3장 광개토대왕릉비문의 고석(考釋)
-제1절 고구려의 개국과 광개토대왕의 생애
-제2절 광개토대왕의 훈적
-제3절 수묘인 제도


[제2부] 광개토대왕릉비문의 문제점

제1장 이른바 신묘년 기사(辛卯年)의 위작(僞作)‘왜(倭)’자고(字考)
-제1절 머리글
-제2절 이른바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와 그 영향
-제3절 이른바 신묘년기사에 대한 회의(懷疑)
-제4절 역사상으로 본 ‘倭’의 실체
-제5절 서법상으로 본 ‘倭’자의 허상과 진상
-제6절 “來渡海”자와 ‘破’자에 대한 고증
-제7절 “破百殘倭寇新羅”설
-제8절 맺는 글

제2장 위작‘倭’자고 재론
-제1절 머리글
-제2절 “倭”자의 출현과 삭제
-제3절 “倭寇”자의 원상설(原傷說)에 대하여
-제4절 맺는 글

제3장 이른바 경자년(庚子年)기사의 “위작(僞作) 왜‘만왜’자고(倭‘滿倭’潰考)”
-제1절 머리글
-제2절 이른바 신묘년기사에 대한 해석
-제3절 이른바 경자년기사의 “위작 倭‘滿倭’潰”고
-제4절 맺는 글

부록
-부록1. 廣開土大王紀의 對外關係記事
-부록2. 주내경신 쌍구가묵본
-부록3. 국립중앙도서관 탁본
-부록4. 서울대 규정각 탁본
-부록5. 주운태 탁본
-부록6. 대만 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 부사년도서관 원석 탁본
 

저자 소개

저자 : 이형구
홍익대에 입학하여 최순우 선생(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문하에서 수학했다. 대만에 유학하여 국립대만대학 대학원 고고인류학연구소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원 역사연구소에서 『발해연안 고대문화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대만 국립고궁박물원과 중앙연구원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연구활동하였다. 1981년 귀국 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역사연구소 교수와 자료조사실장를 지냈다. 1996년 선문대학교 역사학과 개설과 함께 ...
 
저자 : 박노희
숙명여대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동방연서회에서 여초(如初) 김응현 선생으로부터 전서와 예서 및 해서 등을 전수받았다. 동방연서회에서 활동하였고, 대만에 유학하여 국립대만대학 의과대학 공공위생대학원에서 수학하였다. 그 후 중국문화대학 예술대학원에서 전 국립고궁박물원 부원장 장엄(莊嚴) 교수 문하에서 서예사와 광개토대왕릉비 서체를 수학하였다. 그리고 왕북악(王北岳) 교수에게서 논문을 지도받았다. 현재는 동양고고학연구소 ...
 

책 속으로

중국에서는 한말(漢末)[건안(建安)10년, 205] 조조(曹操)의 금비령(禁碑令)과 위진(魏晉) 남북조 시대에 걸친 묘전금비령(墓前禁碑令)의 영향으로 위진에서 남북조까지 남아 있는 비각(碑刻) 자료는 비교적 적은 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금비(禁碑) 풍조가 고구려에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러한 사실은 이 능비문의 “자상조선왕이래묘상불안석비(自上祖先王以來墓上不安石碑)”[능비 제4면 제7행 제33자부터 제8행 제4자까지]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는 당시의 국제 질서로 보아 중국보다는 광대한 영토를 장악하고 높은 문화와 매우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고구려는 중원의 삼국분란(三國分亂)시기〔220~280〕나 위진 교체기[300년 전후시기] 또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기의 혼란한 중국을 넘볼 수 있는 동북아의 패주로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당사자인 광개토대왕이나 그 사왕(嗣王)인 장수왕이 중국의 금비령을 그리 크게 중시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장수왕은 선공선왕(先公先王) 이래로 초유이면서도 동북아에서 최대의 기념비(紀念碑)를 건립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기념비는 지금까지도 세계 최대의 것임을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이 능비와 관계있는 연구 논문 중에 나진옥(羅振玉)의 “고려호태왕비발(高麗好太王碑跋)”[1909]에서는 이 능비가 해동(海東) 고각(古刻)의 으뜸(此碑爲海東古刻之冠)이라고 인정하였다. 그리고 일본인 수곡제이랑(水谷悌二郞)도 지나(支那)[중국을 지칭] 고비(古碑)가 호태왕비의 거대함만 못하다고 하였다. (...중략...) 그들 모두가 한결같이 이 능비문의 서법과 그 존재 가치를 칭송하였는데, 이는 분에 넘치는 찬사만은 아니다. 실제로 이 능비는 비신(碑身)의 위려함, 서체(書體)의 질박함, 비문(碑文)의 호방함, 그리고 자품(字品)의 근엄함뿐만 아니라 도처에 독창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 거대한 광개토대왕의 훈적비의 문자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서법 재료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동양 금석학상에서도 매우 귀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 능비문은 매우 높은 서예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아울러 역사적 가치 또한 매우 높다 하겠다.
-77~80쪽

우리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이 능비는 고구려 제19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훈적비이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란 시호(諡號)는 대왕이 재위 중에 국토를 넓게 확장하였기 때문에 바쳐진 이름이다. 광개토대왕이 개척한 국경은 북으로 송화강(松花江), 서로 요하(遼河), 동으로 연해주(沿海州), 남으로 한강(漢江) 유역에 이른다. 이러한 공적은 모두 이 능비의 비문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능비문은 평문서사체(平文敍事體)로 광개토대왕과 관계있는 일의 공적을 서술하였다. 이 비문 중의 적지 않은 기록들에 의해서 우리들은 이전에 잘못 알고 있었던 역사 기록들, 예를 들면 광개토대왕의 생몰(生歿)연대·재위 연대·재위 기간 중의 국제 관계, 광개토대왕이 마련한 제도와 법령 등을 수정·보완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성을 띤 문장에서 우리가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 역시 적지 않다. 즉 이 능비문의 제1면 제9행의 이른바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와 경자년기사(庚子年記事) 같은 기록은 우리들이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능비의 형식은 방주형사면환각(方柱形四面環刻)비인데 이런 형식은 중국의 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고구려의 독창적인 형식으로 고구려비의 전형을 이룬다. 이런 고구려비의 형식은 고구려의 또 다른 비인 중원고구려비에 나타난다. 또한 이 능비의 형태는 일본 고대삼비의 하나인 ‘산지상비(山之の上碑)’에서도 보인다. 특히 중원고구려비는 마치 광개토대왕릉비를 축소해 놓은 것과 같다. 따라서 이 능비 형식의 전파 과정을 추측할 수가 있다. 이것도 앞으로 충분히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 능비문의 문자 중에는 이체자와 간체자가 매우 많으며 중국 문자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적지 않다. 이것 역시 이 능비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인데, 어떤 이체자는 신라와 고대일본의 문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것 역시 주목할 만하다.
광개토대왕릉비의 문자체는 웅위하면서도 소박하다. 여기에 당시의 시대 배경이 서로 융합되어 창조된 새로운 품격을 지닌 서체(書體)로써 독창적인 종합서체이다. 즉, 고구려서체라고 말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문화의 금자탑으로써 이것은 고구려역사와 한국 금석학은 물론 서법사상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동양 서법(書法)상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87~88쪽

광개토대왕릉비문에 관한 지금까지의 연구는 주로 이른바 신묘년기사의 해석에 관한 논쟁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이는 한·일 사학계의 초점이 되고 있는 바이지만 대개 횡정충직의 석문을 그대로 인정하는 바탕 위에서 문맥상의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주력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 쟁론은 대체로 “왜”를 주어로 하느냐, 아니면 생략된 “고구려”가 주어이냐, 그렇지 않으면 “倭”자는 부동하는 기정자(旣定字)로 두고 “來渡海破”가 원문과 다를 것이라는 세 가지 설로 크게 나뉘어 왔다.
“倭”자를 그대로 고착시키는 한 이와 같은 여러 설은 지난 백 년 동안에도 해결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가올 백 년 동안에도 미궁의 장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상황 아래에서 지난 근 백 년 간에 조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倭”자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심히 위험스러운 시도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고증·서술한 것처럼 역사상으로는 “왜”[왜구]가 백제나 신라 또는 가라를 파할 만한 실력을 갖춘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또한 서법상으로도 “倭”자는 수많은 의문점과 모순점을 내포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270쪽

필자가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점은 광개토대왕릉비 연구에 있어서 앞으로는 석문에만 의존하는 연구보다는 한·중·일 3국 간의 현지 실물에 의한 과학적인 조사·분석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현재의 형편으로는 탁본에 의한 금석학적(金石學的) 조사·분석에 의한 연구가 당면 과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필자 역시 성야양작이 “일본과 대한민국 연구 교류가 보다 왕성하게 될 것을 바라마지 않는다”고 천명한 대로 성사되기를 기구하면서, 아울러 현재 보관자인 중국 당국은 직접 당사자인 대한민국의 학자들에게 하루바삐 마음놓고 참관하고 조사·연구할 수 있도록 마땅히 배려해야만 할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제대로 만족스러울 만한 답변을 하지 못한 점은 물론 어느 곳은 미처 언급하지 못한 점도 많다고 생각되나 후일을 기약하고자 한다.
-291쪽

광개토대왕릉비문은 우리나라 고대사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역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동북아사의 귀중한 금석문 사료임은 말할나위없다. 이렇듯 귀중한 사적이 일찍이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고 만주에서 세인의 관심 밖에 있다가 약 100여 년 전에 일본제국주의 육군참모본부 첩자들에 의하여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어 동북아 국제질서에 중대한 사건의 계기로 등장하게 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일본제국주의 군부와 관학에 의하여 능비문의 판독 작업을 하면서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고의로 왜[지금의 일본]에 유리하도록 조작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이다.
첫째, 광개토대왕의 재위 원년인 영락 1년[391] 이른바 신묘년기사 중에서 왜에 관한 기사를 삽입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倭”자와 “來渡海”자를 틀리게 새겨 고대일본[왜(倭)]의 역사에 유리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둘째, 영락 10년[400]의 경자년기사에서 “新羅城 城倭寇大潰城”이라고 하는 기사를 “新羅城 城倭滿倭潰城 ”이라고 하여 마치 ‘倭’가 신라 전역에 침입하여 이들 ‘倭’가 신라를 궤멸시킨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왕건군이 소개한 1981년 채탁된 주운대 탁본에는 분명히 “新羅 城倭寇大潰城 ”이라고 탁본되어 있다. 이는 해안 지방의 신라성에 왔던 왜구가 신라〔군〕과 고구려 원군에 의하여 크게 궤멸되었다고 하는 내용으로 주내경신의 쌍구가묵본과는 전혀 상반되는 내용이다.
이로써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왜가 4, 5세기에 백제·신라를 지배하였고, 심지어 낙동강 유역에 왜의 식민지격인 이른바 임나일본부를 두어 한반도를 통치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이로 인하여 일본제국주의의 군부와 관학자들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탈취하는 역사적인 구실을 제공하였다. 이것이 19세기 말의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의 명분이 되었다. 이와 같은 역사 왜곡이 오늘날까지 일본 국사에서 통용되고 있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322~323쪽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광개토대왕릉비 건립 1600주년을 맞아
다시 우리 광개토대왕릉비를 말한다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는 고구려 19대왕 광개토대왕의 재위 22년간(391~412)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그 아들 장수왕(長壽王)이 즉위 2년(414)에 국내성(中國 吉林省 集安縣 太王鄕 太王村)에 세운 거대한 기념비이다. 이 비는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와 고구려의 위상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것으로 그 역사적 가치는 가히 엄청나다 할 것이다.
특히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한 비문의 내용은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글자들이 많이 떨어져 나가고 흐려져 판독에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다. 게다가 일본 제국주의가 비문의 일부 내용을 조작, 왜곡하는 바람에 역사적 사실들이 엉뚱한 방향으로 연구되어 왔다. 그 해독은 대왕릉비가 1880년 무렵 재발견된 이래 100년 넘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심각한 문제로 남아있다.
특히 깊은 역사적 인식과 연구가 요구되는 비문인데 지금도 일본은 왜곡된 역사 교과서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 개탄을 금할 수 없다. 모두가 일제가 저질러 놓은 조작, 왜곡의 악영향이 아닌가 한다.
2014년 9월 29일(음력)은 광개토대왕의 능비가 건립된 지 1600주년을 맞이하는 날이었다. 이를 기념하여 양력 9월 29일에 “광개토대왕릉비 건립 160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개최하였고,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한 국민적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28년 전에 출간되었던 「광개토대왕릉비 신연구」를 개정하여 「광개토대왕릉비」라는 제목으로 재출간하였다.
광개토대왕릉비 건립 1600주년을 기해 출간된 한글본 새 책이 광개토대왕과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한 일반의 이해와 관심을 배가시키는 데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광개토대왕릉비는 왜비(倭碑)가 아니라 고구려비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왜(고대일본)가 4,5세기에 백제, 신라를 지배하였고, 심지어 낙동강 유역 가야 지역에 왜의 식민지격인 이른바 임나일본부를 두어 한반도 남부를 통치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이로 인하여 일본제국주의의 군부와 어용학자들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탈취하려는 일본 명치군부의 조선정벌의 명분을 제공하였다. 이것이 19세기 말의 이른바 ‘정한론’의 역사적인 구실이 되었다. 이와 같은 일본군부의 역사왜곡은 오늘날까지 일본 초,중,고등학교의 국사교과서나 대학의 역사교재에 통용되고 있는데, 이러한 일본의 한국사 조작, 왜곡사건의 발단은 일본 육군참모본부의 스파이 사까와 중위가 가짜 탁본인 쌍구가묵본을 만들어 일본에 가지고 가서 육군참모본부와 육군대학 어용학자들에 의해 수년에 걸쳐 광개토대왕릉비문을 정리 작업하면서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고의적으로 왜의 전공인 것처럼 왜에 유리하도록 조작, 왜곡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본의 역사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에 정면으로 맞서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기념비


오늘의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중국이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고 하는 정책을 펴면서 우리의 고대역사를 자기 내의 역사라고 왜곡하고 있고, 일본은 광개토대왕릉비문을 인위적으로 왜곡하여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한일 역사문제에서 제일 많이 논의되고 있는 부분이 바로 광개토대왕릉비 문제이다. 일본인들은 19세기말 광개토대왕릉비를 인위적인 어떤 힘을 가해 비문을 왜곡되게 해석한 이래 지난 1세기 넘도록 고대일본인 왜(倭)가 조선반도를 지배해 왔다는 주장을 계속 펴오고 있다. 현재도 일본의 역사교과서는 물론 대학의 역사교재에도 여전히 한국고대사의 왜곡은 계속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의 각종 역사교과서는 광개토대왕의 활약상이나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한 서술이 아예 빠져 있지 않으면 겨우 몇 줄로 서술되어 있을 뿐이다. 오히려 우리의 역사를 마치 중국과 일본이 그들의 역사인 것처럼 우리보다 더 활발하게 연구하고 국가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역설적인 우리의 역사인식이 정말로 통탄할 일이다.
이에 본서에서는 과거 일본인들에 의해 광개토대왕릉비에 역사에는 없는 어떤 인위적인 조작(造作)이 가했는지 여러 정황과 증거자료들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올바른 규명과 역사 정립을 위한 다양한 의견과 논거를 제시한다.
이 책을 통해 광개토대왕릉비의 훈적비(勳績碑)가 중국인이나 일본인의 기념비가 아니라 우리의 가장 자랑스러운 세계적인 기념비라는 것을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사랑하게 되었으면 한다.